“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 못해.” 4월24일 공개된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는 나오자마자 이 구절로 뜨거운 반응을 불러왔다. 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 도마 위에 오르자 여당은 오역을 주장했다. ‘주어 논란’이 일자, 미셸 예희 리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한국어 원문을 날것으로 공개했다.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윤석열).” 해당 문장의 주어가 일본이라고 주장하던 국민의힘 쪽 이야기는 쏙 들어갔지만, 정작 더 진지하게 다뤄야 할 논쟁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윤 대통령은 ‘한·일 사이 과거는 현재의 걸림돌이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치워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과거는 과거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 묻어두거나 희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일 관계 진전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100년 전 일”을 문제 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한·일 관계는 어떤 토대 위에 마련되어야 미래로 갈 수 있나. 과거를 인식하는 것과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윤 대통령이 예로 든 유럽은 실제로 제국주의 과거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 역사학자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를 만난 배경이기도 하다. ‘과거’라 불리는 한·일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집중적으로 물었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 등에서 각종 원자료를 발굴해 해석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 일본 히로시마 G7 정상회의가 끝난 직후인 5월23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마주 앉았다. 환영과 우려를 동시에 산 한·일 정상의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참배에 대한 평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일 관계를 풀어가는 키포인트는 과거사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형성하느냐 문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

한·일 정상 부부가 5월21일 처음으로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의미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금 그곳에 가는 것은 한국에 대한 의미보다는, 원자탄 희생자 추모 의미가 더 강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쪽에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얘기할 때 일본은 원자탄 피해를 말한다. 미국의 원자탄 사용은 일본에 일정한 면죄부를 주는 역할을 했다. 그건 미국의 잘못이다.

히로시마 외 지역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있다.

강제노동 문제로 일본의 주요 섬에 끌려갔다. 오키나와, 이오지마, 사이판 등. 비행장 등을 만드는 데 동원됐다. 그때 자료가 남아 있다. 영상에는 이오지마 전투가 끝나고 미군에 붙잡힌 조선인 노동자 모습이 담겼다. 상의를 다 벗은 상태로 붙잡혔는데 표정이 밝다. 그런데 이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고 실제 배·보상이 이뤄졌는지 등은 연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로 시작한 질문에 대한 박태균 교수의 대답은 우리 현대사가 아직 제대로 조명하고 있지 못한 부분으로 옮아갔다. 히로시마만이 아니라 오키나와, 남양군도(1914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통치하에 있던 사이판 등 중서태평양 지역), 이오지마(일본 남동쪽 화산섬으로 1945년 2월 미·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성조기가 꽂힌 곳)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잊힌 존재다. 아직 조명조차 되지 않은 한·일의 공동 과거다.

5월22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기도 했다. “위령비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 결국 식민지 시대의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왜 많은 한반도 출신이 히로시마에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영원히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역사 인식 문제 해결에 길을 닦아야 한다. 위령비 방문 자체는 긍정적으로 봐야 하지만 겉치레 교류로 끝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이웃 관계다. 미래지향적이라면 언젠가는 위안부나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를 가리키는 일본식 표현)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기시다 총리가 5월7일 방한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우리(한국)가 보기에는 아쉽다. 고노 담화(일본군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 인정)나 김대중-오부치 선언(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사죄와 반성) 계승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주길 바랐는데, 개인적 입장을 내놓았다. 어떻게 보면 정부의 정치력 문제다. 그동안 나는 한일협정을 맺었던 박정희 정부를 비판했다. 그런데 실제 그때 문서를 보면, 1965년 초 시이나 일본 외무상이 방한할 때 한국 정부가 사과를 요청한다. 일본 정부는 그렇게는 못하고, 혹시 기자회견이 있고 거기서 관련 질문이 나오면 한마디 정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시이나 외무상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감 표명을 했다. 박정희 정부도 요구할 부분들은 상당히 요구했다. 외교는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다.

윤석열 정부의 논리는 ‘한국의 국력이 신장했고 일본에도 뒤처지지 않으니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빈손이라도 합의하겠으니,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만 바로잡자’라고 했어야 한다. 한·일 관계를 풀어가는 키포인트는 배상이나 돈이 아니다. 과거사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형성하느냐 문제다. 일본은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을 안 쓴다. 위안부도 강제성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한·일 간 과거사에 대해 일치하는 생각이 없다.

공통된 역사 인식을 만들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기 힘들다?

특히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렇다. 한·일 청년 세대 사이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 전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군국주의에 대한 지적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공감대가 없으면, 미래에 또 어떤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

윤석열 정부가 ‘개문발차’식으로 문제를 풀어버렸다.

한·일 양국의 현안은 얼마든지 논의해야 한다. 그와 별개로 한·일 사이 과거사 공감대 형성을 위한 시민사회의 움직임은 양국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격려가 아니라 ‘더 이상 논의하지 마라’ ‘발목 잡는다’라고 대응한다. 3월 말 일본을 갔다 왔는데 개인적으로 좀 창피하더라.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어떻게 볼까 싶어서다. ‘저렇게 빈손으로 항복할거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난리를 쳤나’ 하는 식으로 혹시 바라보는 게 아닐까 하는, 시쳇말로 찝찝함이 생기더라. 당당함이 많이 사라졌다.

3월22일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에 항의하는 수요시위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3월22일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에 항의하는 수요시위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일본의 양심 세력도 많다고 강조했다.

그렇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가미카제(2차 세계대전 말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군 전함을 충돌해 자살 공격한 일본 특공대)’를 자발적으로 간 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만화로 그려지기도 했다. 겉으로는 자발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어쩔 수 없이 강제당했던 부분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한·일이 서로 미래 발전적인 역사관을 가질 수 있다.

양심적 목소리는 왜 일본 주류가 되지 못했나?

1차 계기는 1970년대 이후 일본 정치가 보수화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사회당이 없어졌다. 지금 일본에는 야당다운 야당이 없다. 견제 세력이 없는 권력은 자정능력이 떨어진다. 두 번째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컸던 것 같다. 이 이슈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일본 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식민지 시기나 이전 문제보다 북한 문제가 더 중요하게 부각됐다. 일본의 피해자성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 하나, 일본 경제가 별로 좋지 않다. 경제가 안 좋으면 기본적으로 사람이 관대해지지 못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일본 사회가 갖고 있던 다양성과 관대함이 줄어들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본의 사과는 받기 어려운 걸까?

일본은 이미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몇 차례에 걸쳐 유감 표명도 했고. 실제 일본의 양심적인 사람들 말고, 보통 사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만날 사과하라고 하냐’ ‘뭐가 진심 어린 사과냐’. 일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사과를 받는 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차라리 그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같이 연구하고 자료를 공유하며 공감대를 갖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한·일 정상 부부가 5월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했다. ⓒ연합뉴스
한·일 정상 부부가 5월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했다. ⓒ연합뉴스

공통된 과거 인식은 어떻게 만들 수 있나?

과거사 문제는 일단 현안과 분리해, 계속 조사를 해서 공감대를 찾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자료를 찾아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일본은 보수든 진보든 자료를 들이밀면 그것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객관적 자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걸 어떻게 발견해서 풀어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한국은 정부 산하 위원회도 만들고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다. 우리 쪽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일본 쪽 자료를 지금 찾아야 한다. 1945년 이후 자료는 미국에도 있지만, 1945년 이전 자료는 미국에 없다. 어떻게 찾을 것인지 고민도 필요하다.

관련해서 카이로 선언을 강조했다.

1943년 카이로 선언이 올해 80주년이다. 당시 미국·영국·중국 정상이 모여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일본은 ‘자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전쟁’ ‘서양 제국주의자를 몰아내기 위해 했던 전쟁’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해당 선언에는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되어 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2년 후 1945년 포츠담 선언에서 이 부분을 다시 확인했다. 포츠담 선언에서는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연다는 규정도 있었다.

카이로 선언(1943년 12월 미·영·중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일본에 대한 대응과 아시아 전후 처리에 관해 협의한 선언으로,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기에 필요한 중요한 작전을 장기적으로 계속 수행할 것” 등과 같은 내용이 담김),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미·영·중 정상이 독일 포츠담에서 만나,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함)의 의미를 짚는 것이 중요하다고 박 교수는 강조했다. 이를 일본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인하는 분위기로 가면서, 한·일 사이 갈등이 깊어졌다.

1946~1948년에 진행된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가 단죄되지 못했다.

냉전의 문제도 있었고, 유럽 제국주의자들도 똑같은 짓을 많이 했다. 그래서 전쟁범죄 변호인들이 ‘승자의 재판 아니냐’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이 전략폭격기와 원자폭탄을 쓰면서 민간인을 너무 많이 죽였다. 민간인 학살 문제가 나오자 ‘너네도 똑같이 죽여놓고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냐’란 얘기가 나왔다.

그럼 “100년 전 일”은 문제 삼으면 안 될까?

최근 전 세계적 흐름을 보자. 과거사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영향력을 갖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영국에서는 케냐, 네덜란드에서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배상 책임과 사과를 명시한 판결이 있었다. 독일에서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동유럽 출신의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과 보상 정책이 실시됐다. 옛 서독의 정부·법원·기업들은 '독일 통일 이전 강제노동자 피해 배상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외국인 강제 노역자 피해에 대한 보상을 수용했다. 이처럼 세계적 추세는 과거 문제를 해결하고 가자는 것인데,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덮고 가자고 한다. 윤석열 정부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세계를 선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이수용씨가 경남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내 위령각에서 희생자들의 위패를 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이러한 세계적 흐름의 계기가 있나?

언론과 학자들이 중요 역할을 했다. 언론에서 그런 사실을 폭로하기 시작했고 학자들이 관련 자료를 찾았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의 책임을 인정한 한국 법원의 1심 판결은 굉장히 세계적 사건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잘못한 일을 배상하고, 바로잡을 건 바로잡고, 규명하는 나라'라는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역사학자는 긴 시각에서 사건을 살핀다. 어떤 일들이 당대에 평가받지 못해도 결과적으로 ‘결단’이 되나?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시민들이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것인가?

시민들이 상황을 참고 지켜보거나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지만, 결국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단건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와 관련 있다. ‘결단을 했고 결단한 길로만 쭉 간다’ ‘나머지는 그냥 둔다’ 이러면 안 된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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