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가방은 꽤 많은 것을 말해준다. 크고 튼튼할수록, 멀리 떠나 오래 머무를 확률이 높다. 박하경(이나영)의 경우, 작은 짐 하나가 전부다. 때론 교통카드 하나만 챙겨 집을 나서기도 한다. 해남의 어느 절에서 만난 보살님은 하경과의 첫 대면에서 그의 가방부터 눈여겨보았다. “가방을 단출하게 잘 싼 거 보니까 여행 고수인갑네. 난 여기 절에 처음 올 때 45리터짜리 가방에 온갖 거를 다 챙겨왔어요.” 하경의 짐이 가벼운 것은 그가 “당일치기 여행자”라서다. 제한된 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해 일정표를 꽉 채울 만도 한데, 하경의 여행은 “걷고 먹고 멍때리는” 것이 전부다.
5월24일 공개된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는 주말마다 “딱 하루의 여행”을 떠나는 하경의 이야기다. 흔히 여행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은 여행자의 운명적 전환점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절박한 사연의 주인공이 마지막 버킷리스트로 떠난 여행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거나 여행지에서 가슴 설레는 인연을 만나 사랑에 빠지거나, 대개 그런 특별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에 비해 〈박하경 여행기〉는 주인공의 가방처럼 단출하고 소소하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혹 어떤 순간을 실감하는 게 다인” 여행의 기록은, 그래서 오히려 인상적인 차별점을 지닌다.
드라마는 매회 다른 여행지로 떠나는 하경의 일일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1회는 해남, 2회 군산, 3회 부산, 4회 속초, 5회 대전, 6회 서울의 고궁과 박물관, 7회 제주, 8회는 경주 등 총 8부작 안에 8곳의 여행일지가 담긴다. 하지만 드라마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여행지의 풍경보다 그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다. 예컨대 많은 프로그램이 아름다운 배경을 위해 찾는 제주도에서, 드라마는 하경이 빵집에서 만난 한 꼬마(김민채)의 생애 첫 심부름 길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과정을 그린다.
속초 편은 아예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만난 노인(박인환)과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뉴스를 지켜보던 노인이 “우리 때는 다 참고 살았다”라며 시위하는 젊은이들을 큰 소리로 비난할 때, 하경은 그의 ‘꼰대 짓’을 참다못해 그만 화를 내고 만다. 귀경 버스 안에서 좀 전의 행동을 후회하던 하경은 종착역에 내리자마자 노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마찬가지로 후회하는 듯 보였던 노인 역시 자녀들 선물로 싸온 김부각을 내밀며 본인만의 방식으로 사과를 표한다. ‘나 홀로 여행’임에도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무심한 듯 다정하게 곁을 내주는 하경의 여정은, 대개 여행자 본인의 자기 성장에 집중하는 여행 드라마들과 달라서 더 사랑스럽다.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으로서 여행
박하경의 가방은 단출하지만 가볍지는 않다. 그의 하루 여행은 소박하지만, 그 배경에 우리 시대의 무거운 현실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박하경 여행기〉는 세기말 유행병으로 불렸던 '방랑벽'의 사회문화적 조건을 분석한 이언 해킹의 저서 〈미치광이 여행자〉를 인용하면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갑자기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직장도 가정도 버리고 심지도 자기 자신도 잊은 채 여행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둔주, 보행성 자동증, 방랑벽 등으로 불린 이 증세는 마치 유행병처럼 유럽 곳곳에 번졌고 정신없이 길을 떠난 이들은 미치광이 여행자로 불렸다.”
인용 바로 뒤에 붙는 하경의 내레이션은 그가 생각하는 여행의 본질적 성격을 함축한다. “그들은 과연 미쳐서 여행을 떠난 걸까?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버릴 거 같아서 떠난 게 아닐까.”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하경이 여행을 꿈꾸는 순간은 속된 말로 ‘빡센’ 일상 속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다. 수업 중 하나같이 피로에 찌든 제자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 주말 아침부터 학교 일로 전화기가 울려댈 때가 그런 순간이다. 그러니까 ‘세기말 미치광이 여행자’들과 하경의 공통점은, 그들에게 여행은 단순한 여가 활동이 아니라, 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필요 불가결의 행위였다는 점이다.
이언 해킹은 방랑벽이, 낭만적 여행의 욕구를 끌어낸 대중관광 보급 시기와, 동시에 경기 불황의 여파로 떠돌이 노동자가 증가하던 시대의 격차 사이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여행 붐은 주 5일 근무제 도입과 함께 찾아왔다. 문제는 노동시간의 단축이 고강도 노동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주 5일제 시대에 등장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문구만 봐도 여행은 ‘강도 높은 노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 5일 동안 고도의 노동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K-직장인’들은 주말에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말하자면 하경의 여행은 ‘저녁이 없는 삶’에 유일하게 쉼표를 찍는 순간이자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인 것이다. 가장 근래의 국제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교사의 행정업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최근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방영 당시, ‘초등학교 교사는 바빠서 복수할 틈도 없다’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이 큰 호응을 얻은 것도 이 같은 현실을 잘 보여준다. 〈박하경 여행기〉에서는 학교에서 ‘학생회 담당’인 하경이 부장 교사와 학부모들의 전화와 메시지로 주말을 방해받는 에피소드를 통해 교사들의 노동 현실을 반영했다.
하경의 ‘당일치기’도 실은 그러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불가피한 타협이다. 그래서 하경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빠듯하게 계획하고 실행하기보다 ‘비우고 오는’ 여행을 택했다. 드라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하경은 말한다. “나는 여전히 여행이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특별히 재미있지도 의미 있지도 않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혹 어떤 순간을 실감하는 게 다다. 그래서 즐겁다.” 무한경쟁 시대는 휴식조차 일을 위한 재충전의 기회로 삼으라고 요구한다. 하경의 ‘쓸데없는 여행’은, 이처럼 자기 계발이 아니면 무용한 것이라 치부하는 시대를 향한 이의 제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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