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8일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비질란테〉.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11월8일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비질란테〉.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2023년 미니시리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는 사적 복수 대행극을 표방했다. 법적으로 구제받지 못한 억울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악랄한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2021년 첫 방영의 인기에 힘입어 올해 시즌 2로 돌아왔고 전작을 능가하는 호응을 얻었다.

올해 넷플릭스 국내 오리지널 시리즈 가운데 가장 높은 화제성을 이끌어낸 〈더 글로리〉 역시 사적 복수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부와 권력을 이용해 법적 처벌을 피해 간 가해자들을 향해 직접 복수를 실행하는 학교폭력 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은 이 작품은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사적 복수와 사적 제재는 근래 국내 드라마계에서 제일 눈에 띄는 키워드 중 하나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복수심은 원래도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야기 소재였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복수물은 양상이 좀 다르게 보인다. 단순한 해원의 판타지를 넘어 부조리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사회고발물 성격이 짙어졌다. 주인공은 단지 억울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보호와 구제를 받지 못한 약자의 대변자로 그려지고, 그의 복수는 정의의 대리 실현적 의미를 띤다.

특히 최근에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더욱 높아지면서, 주인공이 심판자를 자처하며 악인을 처단하는 자경단물의 성격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 같은 새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11월8일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비질란테〉다. ‘자경단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가져온 이 작품은, “법이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죗값을” 직접 받아내고자 하는 경찰대학생의 악인 처단기를 그린다.

주인공 김지용(남주혁)은 낮에는 건실한 경찰대생으로 살아가지만, 밤이면 법망을 피한 범죄자들의 냉혹한 심판자로 변신한다. 그의 극적인 변화에는 엄마를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이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풀려난 어린 시절의 한과 울분이 자리하고 있다. “법에는 구멍이 나 있다. 선처받으면 안 되는 나쁜 놈들한테 선처를 남발한다. 이제 내가 그 구멍을 메우겠다. 이런 게 정의다”라고 확신하는 지용은 사적 복수를 완료한 이후에도, 또 다른 범죄자들을 향한 심판을 계속해나간다.

더 낮은 곳에서의 복수 판타지

〈비질란테〉의 주인공 김지용(남주혁)은 법망을 피한 범죄자들의 죗값을 직접 받아내려 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비질란테〉의 주인공 김지용(남주혁)은 법망을 피한 범죄자들의 죗값을 직접 받아내려 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비질란테〉의 흥미로운 지점은 극 안에서 사적 제재가 유행하는 현실에 대한 자의식적 코멘트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가 원하는 다크히어로, 비질란테’라는 별명과 대중의 호응에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공분이 자리하고 있음을 일깨워주지만, 동시에 무분별한 추종과 모방범죄, 마녀사냥 등의 묘사를 통해 그 폐해도 같이 환기한다. TV 시사 프로그램의 토론, 언론 보도, 경찰대 수업 토론 등 드라마 안에 빈번하게 끼어드는 여러 극적 장치가 단순히 사적 제재물의 장르적 쾌감에만 빠지지 않도록 한다.

사적 복수물이 자경단물로 변화한 배경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한층 강력해진 사법 불신의 정서다. 이 작품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판사 출신의 문유석 작가가 지난 11월12일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그는 성폭력 범죄에 대한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 관행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계기로 2011년 영화 〈도가니〉를 언급했다. 실제로 〈도가니〉와 동시기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아낸 작품들이 잇달아 등장한 것도 당시 사회의 지배적 정서를 말해준다. 대표 사례로 2012년 영화 〈부러진 화살〉과 드라마 〈추적자〉(SBS)는 모두 부조리한 법 제도와 관행을 과녁 삼아 분노를 표현한 사적 복수물이다. 전자는 법정에서 일어난 석궁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고, 후자에서는 딸을 잃은 억울한 남자가 법정에서 범인에게 총을 겨눴다. 다만 이 시절만 해도 아직은 주인공 편에 선 정의로운 법조인이 존재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사적 제재 드라마에는 사법 시스템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2018년 사법 농단 사건 이후 법조인 히어로물의 인기가 사그라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법 불신을 넘어선 충격과 절망의 정서가 정의 실현의 장르적 해결로서 사적 제재 판타지물의 유행을 키운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같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문유석 작가가 〈미스 함무라비〉(JTBC, 2018), 〈악마판사〉(tvN, 2021) 등의 전작과 〈비질란테〉의 차이점을 이야기한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의 전작들이 법원이란 시스템 안에서 벌이는 저항을 이야기한 것과 달리, 〈비질란테〉는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이 법대 위에서 내려지는 판결로 인해 쌓인 울분을 표출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다.

실제 〈비질란테〉의 김지용은 자경단물의 대표적 히어로인 배트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경찰대에 다니고 있으나 아직은 고학생의 신분이며, 그가 사적 제재를 통해 돕는 사람들은 평소 지나치는 길에서 만나는 약자들이다. 지용은 독자적인 자경단 활동이 힘에 부치자 부와 권력을 지닌 추종자 조강옥(이준혁)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더 글로리〉에서 복수의 주체는 계급 피라미드 구조의 맨 밑바닥에 위치한 두 여성, 문동은(송혜교)과 강현남(염혜란)이었다. 그들은 일생을 바쳐 모아온 자원을 교환하는 ‘최저시급의 복수’로 간신히 가해자들을 응징한다. 제목에서부터 소시민의 정서를 강하게 드러내는 〈모범택시〉도 마찬가지다. 자경단인 무지개운수의 구성원들은 각자 장기를 모아 힘을 합치는 방식으로 복수를 대리한다. 요컨대 최근 사적 제재물에 담긴 ‘더 낮은 곳에서의 복수 판타지’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심리적 거리를 말해준다.

기자명 김선영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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