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조선인에게) 어떻게 죽는 방법이 좋은가 묻자 ‘눈을 가리고 총으로 쏴줘’라고. 막대기를 줄지어 세워두고 3명을 한 명씩 한 명씩 총으로 쐈지….” 일본인 노인 기미즈카가 카메라 앞에서 범행 사실을 털어놓자, 객석이 고요해졌다. 1923년 관동대지진(간토 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에 관한 가해자 증언이다. 당시 일본 계엄군이 ‘보호’ 명목으로 조선인 3500명을 나라시노 수용소에 이송한 후, 인근 마을 자경단에 조선인 15명을 ‘불하(팔아넘김)’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소학교 3학년 때 조선인이 나무에 묶여서 죽임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할머니의 증언도 이어진다. 증거가 남지 않도록 시체를 불태우는 일은 “경찰 입회하에” 이뤄졌다.
1986년 다큐멘터리 〈불하된 조선인〉은 일본과 한국, 미국 등에서 1200회 이상 상영됐다. 일본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낳았다. 이미 40년 전이라 카메라 앞에 선 일본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증언은 필름에 남았다. 영화를 찍은 오충공 감독(68)은 “그때 기록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기억이 있다”라고 말한다. “일제 식민지 때 재일조선인 200만명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끌려온 사람들도 많다. 그 역사를 일본인 학자는 안 쓴다. 재일조선인이 안 쓰면 누가 하겠는가?” 재일동포 2세인 그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40년간 기록해오고 있는 이유다. 3월10일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했다. 인권 탄압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는 이들에게 매년 주어지는 상이다. 올해 9월1일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다.
처음엔 그저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1983년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에 다닐 당시, 관동대지진 때 매장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한다는 뉴스를 봤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그는 곧바로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 〈독립신문〉 기록을 보면 학살된 희생자는 6661명. 유족은 나타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학살이 정부와 관계없는 문제라고 일관했다. 한국 정부는 무관심했다. “유족을 찾는 게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분이 언제 일본에 갔고 어떻게 일하다가 죽었는가, 그리고 유골은 어디에 묻혔는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비극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일본 관동(간토) 지방 각지에 매몰된 조선인 추도비는 물론이고 일본 순사의 증언, 주민 목격담을 조각조각 모았다. 그의 오랜 노력 끝에 당시 생존자인 조인승 할아버지가 증언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1983년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에 처음 담겼다.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을 위해 3월 초 한국을 찾은 그는 일정이 빠듯했다. 올해 8월 개봉될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 부정〉 제작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을 오가며 유족 14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 30년 만에 다시 카메라를 잡은 이유는 그간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매년 9월1일 일본 도쿄에 있는 요코아미초 공원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몇 년 전부터 맞은편에서 우익단체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폭행한 일본인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고 있다.” 아베 정권부터 역사 수정주의 바람이 크게 불면서 조선인 학살을 은폐·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커졌다. 차기작에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집요하게 파고들 예정이다. “역사를 바로 알자는 목소리를 반일로 매도해선 안 된다.” 101년, 102년이 되어도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오충공 감독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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