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아프간 특별기여자 가족의 아이. ⓒ시사IN 신선영

차창 밖으로 아파트 단지가 쉴 새 없이 휙휙 지나가더니 어느 순간 풍경이 달라진다. 공장 굴뚝이며 조선소 크레인들이 울산대교 너머로 솟아 있다. 바닷가 선적 부두에는 자동차 수천 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 울산 동구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공업도시를 채운 건 외지인들이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세계적 규모의 조선소 두 곳이 있었다. 타 지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왔다. 아파트와 학교가 하나둘 생겨났다. 하지만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0년대 조선업 불황이 시작되었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3만명 넘는 인구가 떠났다. 그 자리엔 ‘소멸 우려 지역’이란 이름이 남았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던 울산 동구의 이야기다.

2022년 2월 이후로 새롭게 쓰이는 이야기가 있다. 그 시작엔 또 다른 외지인들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그 가족 158명이 울산 동구 서부동의 한 아파트로 이주했다. 거센 반발과 갈등이 불거졌다. 주민들은 한국인 자녀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이슬람 동네’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울산 동구 주민들에게는 분명 예년과 다른 해였다. 무슬림(이슬람교도), 노동자, 이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누가 갈등을 해결할 것인가.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시사IN〉은 2월 중순 울산 동구에 닷새간 머물면서 그 시간들을 취재했다. 상처도 컸지만, 드물게 이웃이 되기도 했다. 거기엔 다문화 사회가 던진 갈등을 피하지 않고 해결하려 애썼던 사람들이 있었다.

울산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를 먼저 경험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울산 동구만의 것이 아니다. 시작은 외지인이지만, 그 끝은 한국인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2월18일 아프간 특별기여자 가족들이 사는 울산 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간이 시장이 열리자 아프간 남성들이 식재료를 구입하고 있다.ⓒ시사IN 신선영
2월 18일 아프간 특별기여자로 울산 동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왼쪽) 쉬르존 씨가 간이 시장이 열린 아파트 앞 마당에서 파키스탄 마트를 운영하는 오마르 씨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할랄 인증을 받은 고기부터 인도식 쌀, 고수, 견과류 등 파키스탄인 오마르 씨가 가져온 식자재 박스가 아프간 특별기여자 가족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깔렸다. ⓒ시사IN 신선영

2023년 2월18일 중앙아파트

비가 쏟아지더니 금세 그쳤다. 아스팔트 바닥이 젖었다. 오후 2시12분쯤 트럭 한 대가 울산 동구 서부동의 한 아파트로 들어선다. 주차장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살람” 하고 외쳤다. 아프가니스탄 언어인 다리어로 하는 인사다. 운전기사는 파키스탄인 오마르 씨. 그가 운영하는 파키스탄 마트에서 식자재를 싣고 왔다. ‘할랄 인증(이슬람교에서 허용하는 것)’을 받은 닭고기부터 인도식 쌀, 고수, 대추야자 상자가 아스팔트 바닥 위로 깔렸다.

단톡방으로 소식을 받은 아버지들이 하나둘 집을 나왔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간이 시장이라 인기가 좋다. 자말 씨(52)도 그중 한 명이다. 평일엔 현대중공업에서 엔진 기계를 조립하는데, 일이 고된 탓에 주말에도 피곤이 가시질 않는다. 슬리퍼를 신고 나와 냉동 닭고기 두 봉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아내가 부탁한 저녁거리다. 여자들도 시장에 가지만, 남녀가 유별하다는 아프간 문화가 남아 있는 탓에 주말 장보기는 대체로 남자들의 일이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수동적인 아내로 보기엔 섣부르다. 아내 사지아 씨(42)는 남편보다 의욕적인 사람이었다. 아프간에선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뜨개질을 가르쳤다. 한국에 와선 아프간 어머니 대표를 맡았다. 얼마 전엔 홈플러스와 다이소를 찾아가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자말 씨의 월급 200만원으로 다섯 식구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올해 큰아들이 울산과학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에 합격했다. 외국인 특별전형으로 붙은 아프간 학생 7명 중 한 명이다. 기쁨도 잠시, 사지아 씨는 학비를 급히 마련해야 했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엔진 기계를 조립하는 일을 하는 자말 씨의 아내 사지아 씨가 15일 저녁 울산 동구의 아파트에서 아프간식 쌀로 만든 밥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울산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리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충북 진천에서 2개월, 전남 여수에서 4개월을 꼬박 시설에서만 지내다가 마침내 도착한 곳이었다. 한국어는 서툴고 사람들은 차가웠다. “집 밖을 나갈 때마다 한국인들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아프간 사람들이 싫다고 하더군요.” 그를 향해 ‘떠나라’는 손짓을 하는 이도 있었다. 아프간 사람들에겐 물건을 팔지 않겠다거나, 아프간 아이들이 인근 놀이터를 이용하지 말게 해달라는 민원도 들어왔다.

2월9일 주차장 마당에서 아프간 아이들이 현대중공업 수거업체 관계자와 함께 공놀이를 하고 있다.ⓒ시사IN 신선영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지난해 연말 남편 자말 씨는 회사에서 상을 받았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안전 작업에 최선을 다했다’는 공로상이었다. 6학년 딸과 5학년 아들의 한국어는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책장에 한국어 교재들이 빼곡했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다. 갓난아이였던 자이납은 어린이집에 들어가고, 열여덟 살인 워리스는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외국인을 받지 않는다는 식당을 간신히 설득했단다. 10대 여자아이 몇몇은 BTS ‘아미’ 단톡방을 만들어 종일 수다를 떤다. 아이 넷이 울산에서 태어났다. 아프간이었다면 꿈꾸기 어려웠을 일상이다.

저녁이 되자 집집마다 향신료 냄새가 진해졌다. 그날 산 파키스탄 식자재가 저마다 요리되고 있었다. 시장이 열렸던 아파트 주차장은 다시 아이들 차지가 됐다.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술래잡기며 연날리기며 쉼 없이 달릴 이유가 많았다.

부모님과 함께 한국으로 온 열여덟 살 워리스의 방에 한국어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시사IN 신선영
방학 기간 중에도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열여덟 살 워리스. ⓒ시사IN 신선영

2022년 2월7일 울산 현대중공업

20년째 울산 동구에 사는 김창유씨는 가끔 여기가 섬 같다고 생각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소 동네’였다. 충남 천안 출신인 그는 2003년 현대중공업에 취업하면서 이곳에 정착했다. 몽골어 전공자라 외국인 노동자들의 통역 지원을 맡았다. 지금은 현대중공업 ‘동반성장지원부 책임’이다.

2022년 1월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법무부에서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의 일자리를 찾는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조선소는 늘 인력 수급이 문제였다. 울산 현대중공업의 경우 협력업체 1만명 중 1500명이 외국인 노동자다. ‘외국인 노동자 없으면 조선소 망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내국인들은 여기에 안 와요. 저도 제 자식은 조선소 안 보내고 싶은걸요. 외국인들 안 오면 한국 제조업은 그냥 끝이라고 봐야 해요.” 동남아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노동자들은 받아봤어도 아프가니스탄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다들 의사나 통역가 같은 엘리트라고 했다.

2월 15일 오후 아파트 앞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프간 아이들. 그 뒤로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 크레인이 보인다. ⓒ시사IN 신선영

가족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구직자는 29명인데 가족까지 합하면 158명이었다. 5세 이하 아이들도 많았다. 당장 숙소부터 구해야 했다. 중앙아파트는 인근 울산대병원 의사들이 쓰던 숙소였다. 재개발을 앞두고 코로나19 격리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 동짜리 구축 건물이긴 해도 가족들이 살기엔 괜찮겠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때마침 현대중공업 협력업체 12곳에서 아프간인 29명을 채용하겠다고 했다. 남자 28명, 여자 1명이었다.

외국인 지원 업무라면 도가 텄다. 김창유씨가 보기에 늘 3개월이 고비였다. “회사도 노동자도 3개월 안에 적응이 돼야 하더라.”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김씨는 협력업체 사장님들에게 ‘아버지들은 무조건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연스레 정착 지원은 김창유씨의 몫이 됐다. 부랴부랴 아이들 교복을 맞추고 예방접종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내가 우리 애들 키울 때도 예방접종이란 게 있는지 몰랐는데….” 기숙사에 매트리스가 남는다 하면 가져다주고, 아이가 아프다 하면 응급실에 데려갔다. 어느새 ‘아프간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퇴근한 자말 씨(왼쪽 두 번째)가 아들 이만, 부인 사지아, 딸 파르니안(왼쪽부터)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시사IN 신선영

“한국 사람한테 이 정성으로 잘해줬어봐라.” 지인들은 그에게 핀잔을 줬다. 어떤 특별 기여를 했길래 30평짜리 아파트를 주느냐고도 했다. 김창유씨가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시대가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100명 규모 업체에 외국인들 10명 들어오면 일자리 10개 뺏겼다고 그랬잖아요. 지금은 그 10명이 들어오면서 90명의 일자리를 지키는 거예요.” 외국인 노동자는 공업도시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무조건 견디라거나, 노동력만 제공하고 본국으로 떠나라는 식의 태도는 ‘일손’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실이 그렇다면 김씨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프간 사람들은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2022년 2월7일이었다. 아프간 아버지들은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숙소를 마음에 들어했다. 협력업체 사장들은 다 좋은데 술을 먹지 않더라며 조금 아쉬워했다. 회식 자리엔 특별히 주문한 할랄식 고기가 올랐다. “할랄 오레오라고 들어봤어요? 튀길 때 돼지기름을 안 쓴대요. 한번 검색해보세요. 억수로 비싸요.” 김창유씨가 웃었다.

그사이 지역사회의 반발이 커지고 있었다. 서부초등학교에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 28명이 배정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2021년 8월26일 오후 4시 인천공항

한국 정부는 이들을 ‘특별기여자’라고 불렀다. 아프간에서 한국 정부에 협력한 아프간인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의무라고 했다. 카불 공항에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공항으로, 다시 인천공항까지 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2021년 8월26일부터 이틀간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가족 391명이 군수송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그제야 사지아 씨는 안도감에 눈물을 쏟았다.

아프간의 한국인들에게 사지아 씨 남편은 ‘자말’로 불렸다. 본명은 하이다르자다 하산 자말. 바그람 공군기지 내 한국 병원은 2010년 한국 정부가 아프간 재건 활동을 위해 지은 곳이다. 사업을 위해서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목수부터 운전기사, 사무직까지 경험이 많은 자말 씨에게도 취업 제의가 왔다. 8년간 바그람 병원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김창유(사진) 현대중공업 동반성장지원부 책임은 아프간 가족들이 울산 동구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가까이에서 도왔다. ⓒ시사IN 신선영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건 2021년 8월15일이었다.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은 미군이 철수한 지 한 달 만에 벌어졌다. 자말 씨는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직감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이 집권하던 시기, 그의 아버지도 무자헤딘(아프간의 무장 게릴라 조직)의 공격으로 희생되었다. “무자헤딘이 오고 나서 내 삶은 완전히 빼앗겼다.” 사지아 씨도 마찬가지였다. 탈레반 통치 아래 여성 교육과 취업은 전면 금지되었다. 여성이 외출하는 경우 온몸을 가리고 눈만 내놓는 ‘부르카’ 착용이 의무화됐다.

외국 정부와 일해온 자말 씨는 부역자로 처단될 위험이 컸다. 그때 한국 정부가 대피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미라클 작전’이었다. 자말 씨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한국은 안전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카불 거리에는 총성이 산발적으로 들렸다. 수천 명이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카불 공항으로 몰려들었다. 일주일 전에 태어난 신생아도, 결혼한 지 한 달 된 신혼부부도 있었다. 8시간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기다린 끝에 카불 공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날이 무더웠다. 아프간을 점령한 후 탈레반은 바그람 한국 병원과 직업훈련원을 폭파했다.

아프간 현지 조력자들이 26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아프간 현지 조력자들이 26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2022년 3월2일 서부초등학교 체육관

미라클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보도될 때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이 정말 선진국이구나.’ 김혜진씨(44)는 감격했다. 그 감격이 충격으로 바뀐 건 6개월 만이었다.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울산 동구에 집단 이주를 한다고 했다. 내 이웃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결정이 주민 공청회도 없이 통보되는지 화가 났다. 아무리 정부가 보장한 사람들이라 해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면 누가 책임질 건가. 그도 초등학교 5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이 있었기에 옆 학교인 서부초등학교 학부모들의 반발을 누구보다 이해했다. 지인이 이슬람 난민 반대 서명을 받고 있었다. 김씨도 동참했다.

울산광역시교육청은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들이 이슬람 종교와 문화를 아무것도 모른 채 흡수할까 우려된다’ ‘시민 합의 없는 난민 수용 반대한다’는 민원이 빗발쳤다. 학부모들은 동구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부초 운동장에서 피켓을 들었다. ‘먼저 외국인 학교부터 고려하라!’ ‘우리 아이들 마음 놓고 학교 보낼 수 있는 대안을 달라!’

장영복 울산교육청 교육협력담당관실 팀장은 머리를 쥐어 싸맸다. 느닷없기로는 교육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월24일 법무부가 보낸 공문 한 장이 전부였다.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 84명이 이주하니 각 학교에 지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학부모의 반발이 충분히 이해가 돼요. 아마 누구라도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공무원들은 법에 따라서 움직이잖아요. 외국인 처우에 관한 법률이나 난민법에 보면 누구나 동일하게 교육을 받도록 돼 있는데, 그런 원칙을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서 문제가 금방 풀리겠습니까?”

당시 울산교육청에는 노옥희 교육감이 있었다.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 교육’은 그의 교육철학이었다. 반대 여론에 물러날 수 없다면, 직접 설득해내야 했다. 교육청은 먼저 학부모와 학교 관계자가 참여하는 ‘소통 협의체’를 만들었다. 거의 매일 회의가 열렸다. 시간이 안 되면 전화로도 했다. 말이 회의지, 쏟아지는 원망과 성토를 듣는 자리였다. 장 팀장은 한 명의 학부모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3월2일 서부초등학교 체육관에서 학부모 설명회가 열렸다. 코로나19로 인원 제한이 있었는데도 109명이 참석했다. 노옥희 교육감은 학부모들이 우려하는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다고 말했다. 일종의 특수학급처럼 아프간 특별반을 운영하고, 한국어 교사와 장학사 등 보조 인력을 배치해서 꼼꼼히 ‘케어’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마지막에 노옥희 교육감은 이렇게 덧붙였다. “낯선 데에서 새로운 배움이 일어납니다. 서로 같은 사람들끼리 있으면 배움이 안 일어납니다. 한국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2022년 3월21일 오전 8시 서부초등학교

이른 아침부터 중앙아파트 앞이 부산스러웠다. 노옥희 교육감을 비롯한 교육청 관계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첫 등교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에는 다리어가 함께 쓰여 있다. 아버지들도 이날만은 함께했다. “자기 자식들 학교 가는 건 봐야 하지 않겠냐”라며 김창유씨가 협력업체 대표들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아이들 저마다 하나씩 든 종이가방엔 사탕이 담겨 있었다. 전날 밤까지 현대중공업 관계자들이 반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2월10일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들이 울산 동구 남목청소년 문화의집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노옥희 교육감은 열한 살 아스마의 손을 꼭 잡고 서부초로 향했다. 꿈이 무엇이냐 묻는 노 교육감의 질문에 아스마는 한국어로 “의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한국 친구들과는 분리돼 수업을 들을 예정이었지만, 아프간 아이들 28명을 위한 특별반 세 반이 만들어진 덕분에 한국어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노 교육감은 그날 아이들에게 “학교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었다. 여러 차례 협의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부모들은 완전 분리를 요구했다. 합의점을 찾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장영복 팀장은 말한다. “원칙대로면 외국인 특별반 운영을 할 필요가 없죠. 학부모 우려가 너무 크니까 1학기에는 급식도 수업도 따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도 해외 어학연수 가서 한국인들끼리만 있으면 영어가 안 늘잖아요. 결국에는 섞여야 적응을 하거든요. 과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접점을 늘려가자고 했어요.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이요.” 교육청은 아프간 학생들이 ‘한국반’에 가는 시간을 주에 한 시간, 두 시간씩 점차 늘려가기로 했다(〈시사IN 제807호 ‘첫 등굣길 사진 이후 그는 떠났지만…’ 기사 참조).

서부초의 역할도 컸다. 한 번은 한국인 어머니와 아프간 어머니들이 만나는 자리가 서부초에서 마련됐다. 아프간 어머니 대표인 사지아 씨도 참석했다. 직접 구운 아프간 빵 ‘볼라니’도 만들어서 갔다. 사지아 씨는 한국인들이 가진 우려를 이해하려고 했다. 다만 설득하고 싶었다. “이슬람은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해요. 하지만 탈레반은 여자들의 인권을 모조리 빼앗았어요. 우리는 탈레반이 아닙니다. 제 딸 파르니안은 한국 덕분에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모두가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직접 만나니 풀리는 오해도 있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서로 대안을 찾아보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2022년 7월 울산 동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

김혜진씨도 그즈음 파힘 가족을 만났다.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다문화센터)에서 주관하는 ‘함께 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다. 아프간 가족과 내국인 가족이 일대일 파트너를 맺었다. 다문화센터에서 일하는 지인이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날 날짜가 다가오니 괜한 걱정이 몰려왔다.

파힘 가족도 열한 살, 일곱 살, 네 살 아이들이 있었다. 바그람 병원 의사였던 파힘 씨는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았다.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특히 막내 아이가 김혜진씨 첫째 딸을 잘 따랐다. “제가 오해를 많이 했더라고요. 말은 안 통해도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동구청과 다문화센터가 주관하는 이슬람 문화 이해 교육도 여러 차례 들었다. 히잡을 쓰는 것도 어떻게 보면 성당에서 미사포를 쓰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 수 있겠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김혜진씨 가족은 처음으로 파키스탄 식당에서 할랄 음식을 먹어봤고, 파힘 씨 가족은 처음으로 한국 미용실과 커피숍에 가봤다.

울산에 정착한 아프간 가족들을 1년 넘게 돕고 있는 울산 동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정숙 센터장. ⓒ시사IN 신선영

이 프로그램으로 내국인 가정 10팀이 아프간 가정을 만났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정숙 다문화센터장은 참고할 만한 사례가 없어 한참 헤맸다. 제주 지역의 다문화센터에도 연락을 취했다. 그나마 비슷한 사례가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였다. 그마저도 난민 신청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데다, 정착 지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잘 대비한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사건 사고가 벌어지진 않을까, 그는 내내 노심초사했다. 갈등은 대개 사소한 차이에서도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프간 부모들에게 분리수거 방법부터 교통 예절, 한국의 자녀 양육 방식 등을 세세히 가르쳤다. “결국 이분들이 한국 사회에서 건강한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사회적 갈등이 커지면 그땐 비용이 더 들어요. 그걸 생각하면 초기 비용은 훨씬 싼 편이에요.” 한국어가 빠르게 향상된 아프간 아이들을 보며, 정착 지원에 공력을 들일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현대중공업부터 교육청, 구청, 경찰서, 다문화센터까지 긴밀한 협조 체계가 만들어졌다. 기관 간의 ‘행정 칸막이’가 사라진 건 이례적이었다. 지역사회 우려가 큰 만큼, 공적 에너지가 단기간 압축적으로 모였다. “정부가 폭탄을 울산 동구에 휙 떨어트렸는데 모든 주체가 달려들어서 폭탄을 나누어 받아낸 것 같다.” 이정숙 다문화센터장은 동료들과 이런 농담을 했다. 곧 다가올 미래를 울산은 좀 더 빨리 경험한 셈이다. “이슬람은 전 세계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대한 문화권인데 우리 사회엔 정착과 교류의 경험이 없었어요. 미래세대는 앞으로 무슬림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정치를 할 수도 있잖아요. 이제 울산은 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터질 폭탄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기회였다.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울산 동구에 온 지도 1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2023년 2월18일 울산 바닷가

며칠 전부터 마르와가 바다에 놀러간다고 여기저기 자랑을 해놓는 바람에, 중앙아파트에도 소문이 쫙 났다. 마르와네 가족과 경아네 가족이 함께 바닷가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하필 아침부터 비가 와서 마르와의 실망이 컸다. 마르와는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한국·아프간 청소년 파르핫, 마르와, 마라핫, 성경아, 성창훈, 사디콜라(왼쪽부터)가 함께 2월18일 울산 동구 대왕암 출렁다리를 찾았다. ⓒ시사IN 신선영

지난해 ‘함께 하다’ 프로그램으로 맺어진 두 가족은 지금까지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설날에 경아네가 떡국을 가져다주었더니 마르와의 부모가 경아네를 집으로 초대했다. “같이 밥 먹으면 식구인데, 우리 이제 식구네요.” 경아 어머니 권월수씨의 말이다. 빵 한쪽이라도 나눠 먹는 문화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상 푸짐하게 아프간 음식을 대접받고 나서 다음 약속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아파트에서 바닷가까지는 20분 거리였다. 출렁다리 너머로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험준한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카불과는 풍경이 많이 달랐다. 비가 오지 않으면 축구를 할 참이었다. 아이들은 축구를 하며 친해졌다. 마라핫은 축구선수가 꿈이고, 경아는 체육을 가장 좋아했다. 둘은 열네 살 동갑내기다. 생각보다 한국어를 잘하는구나, 집에서는 히잡을 벗는구나, 닭고기도 잘 안 먹는구나…. 경아는 몰랐던 사실을 하나씩 알아갔다. 축구를 하는 데 피부색이나 종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후 2시쯤 아파트로 돌아오니 오마르 씨네 식자재 트럭이 와 있다. 지난번 마르와네에서 먹었던 건과일이 참 맛있었다며 권월수씨가 식사재 더미를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아쉽게도 없었다. 오마르 씨는 “다음 주에 다시 와달라”고 말했다. 권씨는 대신 대추야자를 8000원 주고 샀다. 때마침 장을 보러 나온 자말 씨도 만날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저마다 안부 인사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공을 차며 노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2월 18일 다문화센터에서 주관하는 ‘함께 하다’로 맺어진 한국-아프간 청소년들이 대왕암 공원을 찾았다. (가운데) 마라핫 앞에서 동갑내기 성경아 양이 장난을 치고있다. ⓒ시사IN 신선영
기자명 울산/글 김영화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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