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장면 1. 국무회의

2022년 12월13일 국무회의는 여러모로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5월 정권 출범 이후 ‘자유’라는 모호한 방향성만 되풀이하던 윤석열 정부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정책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다. 이틀 후인 12월15일 국민과의 대화 형식으로 진행된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는 노동·연금·교육 등 정권 초부터 예고했던 ‘3대 개혁’을 필두로 여러 국정 개혁이 어젠다로 전면에 부상했다.

정책 행보를 걷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12월13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공격적으로 던진 의제는 건강보험 개혁이었다.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강경한 어조로 그 필요성을 역설했다. “국민 건강을 지키는 최후 보루인 건강보험에 대한 정상화가 시급합니다. 지난 5년간 보장성 강화에 20조원을 넘게 쏟아부었지만 정부가 의료 남용과 건강보험 무임승차를 방치하면서 대다수 국민에게 그 부담이 전가되고 있습니다.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인기 영합적 포퓰리즘 정책은 재정을 파탄시켜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해치고 결국 국민에게 커다란 희생을 강요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보험 개혁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여기서 ‘인기 영합적 포퓰리즘 정책’은 ‘문재인 케어’를 뜻한다. 이전 정부의 대표 정책을 정면으로 겨눈 것이다.

장면 2. 두 개의 진실

2017년 8월9일 문재인 전 대통령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을 직접 발표했다. 의학적 필요가 있지만 현재 비급여로 지정돼 환자가 직접 내고 있는 의료비를 급여화해 국민건강보험에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선택진료비 폐지, 2~3인실 병실 급여화,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확대가 있다. 이번에 윤석열 정부에서 칼을 들이댄 MRI·초음파 검사 급여화도 굵직한 줄기이다. 이 정책 패키지는 ‘문재인 케어(문케어)’라고 불리게 됐다. 대통령의 이름을 딸 만큼 문재인 정부의 상징적 정책으로 떠올랐지만 사실 정권을 떠나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대체로 꾸준히 확대돼왔다(〈그림 1〉 참조).

건보 개혁이 예고된 뒤 문케어를 두고 두 개의 주장이 서로 부딪쳤다. 현 정부와 보수진영은 문재인 케어가 과잉 진료를 유발하며 건보 재정을 악화시켜 국민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을 침식시켰다고 비판한다. 반면 문재인 정권 출신 인사들은 그간 보험료로 걷은 건보 수입이 지출을 능가해 누적 적립금이 쌓이고 있었으니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해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양쪽 다 자신에게 유리한 대목에만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림 2〉는 국회 예산정책처가 2021년 10월 발표한 국민건강보험의 중기재정 수지이다. 코로나19 유행 기간에 비코로나 환자들의 병원 방문이 줄어들어 전체 의료비 지출이 감소한 덕분에 2021년과 2022년 실제 건보 적립금 액수는 좀 더 많다. 액수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건강보험 재정을 추계한 그래프는 하나같이 〈그림 2〉와 같은 패턴을 보인다.

2005년부터 쌓여가던 건강보험 적립금은 2020년대 들어 감소세로 돌아선 뒤, 2020년대 중반이면 바닥이 난다. 건보 지출은 2021년 약 80조원에서 2030년 약 164조원으로 2배 이상 불어나고 건보 수입은 이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감사원이 추산한 장기 재정전망에 따르면 2040년에는 건보 지출과 수입의 격차가 1.8배, 2050년에는 2.6배까지 벌어진다. 이대로라면 건강보험은 지속 가능하지 않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위기가 닥칠 거라는 주장은 진실이다.

그런데 건강보험 지출 증가를 전부 문케어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문케어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는 제도이니 당연히 건보 지출을 늘렸겠지만 늘어난 지출에서 문케어의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는 다시 따져볼 문제이다.

또 하나의 그래프가 있다. 〈그림 3〉은 ‘2018년 건강보험통계’를 기반으로 2011년부터 2018년까지 건강보험 진료비(건보 급여+본인부담금)를 연도별로 나타낸 그래프이다. 매년 진료비가 상승하는 흐름 속에서 65세 이상의 진료비 증가와 규모가 압도적이다. 2018년 기준, 건강보험 가입자 1인이 연간 진료비 152만8000원을 쓸 때 65세 이상 가입자 1인은 456만8000원을 썼다.

건보 지출을 증가시키는 요인은 추세적 요인과 정책적 요인으로 나뉜다. 건강보험 급여를 확대하는 문케어는 정책적 요인이다. 문케어를 비판하든 지지하든, 보건의료계 전문가들은 대체로 ‘고령화’라는 추세적 요인이 정책적 요인을 뛰어넘어 건보 지출 증가를 이끄는 대세라는 데에 동의한다. 고령화란 생애에서 가장 많은 의료비를 쓰는 시기의 인구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1990년 건보 전체 진료비에서 8.2%를 차지했던 65세 이상 진료비 비중은 2018년 40.8%까지 증가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고령인구로 진입하는 2020년대를 지나며 이 추세는 더욱 급물살을 타게 된다.

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건강보험 개혁은 분명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평소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 보건의료계 전문가는 “윤석열 정부에서 지금 타이밍에, 현재의 국민건강보험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담론을 제기한 것은 100번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문케어가 추세를 가속화했을지는 몰라도 건보 지출 증가를 이끄는 핵심 요인은 따로 있다는 점에서, 건보 개혁이 문케어 때리기에 급급하다면 거대한 파도가 덮쳐오는데 조개를 줍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윤 정부가 추진하려는 개혁 조치들은 ‘고령화’라는 해일에서 건강보험을 지켜낼 수 있을까.

장면 3. 보건복지부 공청회

2022년 12월8일 보건복지부는 공청회를 개최해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및 필수의료 지원 대책안(이하 건보 개편안)’을 발표했다. 12월13일 국무회의, 12월15일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역설한 건보 개혁의 내용을 채우는 구체적인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이틀 간격의 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인기 영합적 포퓰리즘 정책” “고가의 MRI를 무제한 사용”이라며 전 정부를 비판하고 “건보를 본래 취지대로 정상화시키겠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강도 높은 표현은 문케어 폐기와 일대 변혁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12월8일 발표된 보건복지부의 건보 개편안을 하나씩 뜯어보면 ‘문케어 폐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그동안 이어져오던 보장성 강화 기조를 중단하고 현 상태를 유지 보수하는 재정비에 가깝다. 복지부는 다방면에 걸쳐 재정건전성 제고 및 효율화 방안을 마련했는데, 가장 중점적으로 언급된 정책은 MRI·초음파 검사와 외국인 무임승차 방지이다.

2017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성모병원에 방문해 건강보험 보장 강화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개편으로 MRI·초음파 검사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이 철회되는 건 아니다. 비급여였던 MRI·초음파 검사가 문케어의 일환으로 급여화되면서 비용이 저렴해지자 의학적 필요가 떨어지는데도 MRI·초음파 검사를 과도하게 이용하는 실태가 생겨났다. 이번 개편안은 이런 남용을 막기 위해 급여 기준(건보 적용 기준)을 좀 더 명확하게 세우겠다는 것이다. 문케어 설계에 관여한 보건의료계 인사는 “필요한 조치”라고 말했다. “의료적 필요성이 있으면 보장한다는 정책 취지에서 벗어나 급여를 부당하게 청구하는 행태를 바로잡고 재정 누수를 방지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든, 윤석열 정부든 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로, 외국인들이 건강보험에 무임승차해 건보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이를 막겠다는 정책은 ‘마타도어’에 가깝다. 국내 거주 외국인 건강보험 재정은 2018년 2251억원, 2019년 3651억원, 2020년 5715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다만 중국 동포로 범위를 좁히면 적자로 나타난다. 이번 개편안은 외국인 피부양자가 입국한 뒤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건강보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요건을 강화했다. 그 외에 과다 의료 이용자 관리 강화, 본인부담액상한제 합리화 등이 이번 개편안에 담겼다.

개편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주변적인 이슈에 한정됐다는 것이다. 건보 지출 효율화라는 방향성을 지지하는 전문가들도 이번 개편안에 건보 개혁의 핵심이 담기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우선 이번 조치들을 통해 줄일 수 있는 지출이 건보 재정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이다. 가장 굵직한 예산이 MRI·초음파 검사 진료비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감사원에서는 MRI·초음파 검사 과잉으로 인한 재정 누수를 대략 2000억원으로 추정했다. 큰 금액이지만 거의 한 해 100조원에 육박하는 건보 지출과 비교하면 0.2% 수준에 불과하다.

건강보험의 수입 측면인 재원 조달과 관련해서는 어떤 방안도 발표되지 않았다. 앞서 살펴봤듯이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 증가는 예정된 추세이기에 건강보험료 인상은 외면할 수 없는 의제이다. 보건복지부는 정말 ‘개혁’이라 할 수 있는 근본적 대책들은 2023년에 수립되는 제2차 건강보험 종합계획(2024~2028)에서 제시할 예정이라고만 밝혔다.

이 약속대로 윤석열 정부가 제2차 건강보험 종합계획에서 건보 개혁을 진지하게 다룬다면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할까? 그런데 오랜 기간 한국의 건강보험 제도를 연구해온 한 학자는 “건강보험 문제의 해결 방안은 건보 내부가 아니라 건보 밖에 있다”라고 말했다. 임승관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장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건강보험 개혁은 한국의 의료체계를 ‘재구조화’하는 논의 위에서 전개되지 않으면 답을 찾을 수 없다.” 임 원장은 “89년 체제의 시효가 다해간다”라는 표현을 썼다. 1989년은 전 국민 의료보험 가입이 완성된 해이다.

장면 4. 황금기

한국의 의료는 이용자(국민)-공급자(의료기관)-사회보험(건보)이라는 세 주체가 독특한 균형을 이루며 성장해왔다(〈그림 4〉 참조). 주요 국가 가운데 의료를 시장에 맡기는 나라는 미국이 거의 유일하다. 대부분의 나라는 의료 보장에 정부가 개입한다. 아플 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이다. 예기치 않게 병에 걸리는 건 일생의 큰 위험이다. 조세든, 보험료든 공적으로 재원을 마련해 의료비에 대비하는 것은 이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료라는 영역을 시장경제에만 맡겨둘 수 없으니 각 나라는 저마다 고유성을 가진 체계를 구축해왔다. 크게는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정부가 직접 의료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세금으로 운영하는 의료기관에서 공무원 신분인 의사가 일하는 영국 국영 의료서비스(NHS)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의료 공급과 재원 조달이 분리된 사회보험 방식이다. 독일, 한국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회보험 유형이라는 큰 틀 아래서 한국 의료는 몇 가지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 전 국민이 건보 가입자이고, 모든 병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의무적으로 계약을 해야 한다(의료보험은 1977년 박정희 정부에서 처음 도입했다.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 가입이 의무화되었고 김대중 정부에서 직장이나 지역별로 나뉘어 있던 의료보험을 ‘국민건강보험’으로 통합했다). 두 번째는 민간 병의원에서 거의 전적으로 의료 공급을 담당한다. 한국은 전체 의료기관 대비 공공병원 비중이 5% 정도로 OECD 평균(약 50%)을 한참 밑돈다.

건강보험이 병의원에 의료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해왔다. 행위별 수가제는 진찰료, 입원료, 검사료 등 의료 행위별로 가격(의료수가)을 정해놓고 그 가격대로 급여(보험금)를 의료기관에 지급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일정 부분은 의료 이용자(보험 가입자)가 내는데 이것이 흔히 말하는 본인부담금이다.

‘89년 체제’라고 통칭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보건의료 구조는 고도성장기를 배경으로 한국 의료 인프라를 급속도로 키워냈다. 예방의학자로서 의료관리학을 공부한 박건희 경기도 감염병관리지원단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행위별 수가제는 의료 행위별로 비용이 카운트되기 때문에 의사가 진료를 많이 할수록 수입도 커지는 구조이다. 재원 조달은 건강보험이 도맡고, 의료 공급은 민간이 주도하며, 행위별 수가제가 이 둘을 이어주는 시스템이 극도의 효율성을 발휘했다. 병원과 의원 수가 빠르게 증가했고 의사들은 더 많은 환자를 봤다. 그 덕분에 국민들의 의료 접근성과 선택권은 대폭 확대됐다. 정부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 공공병원으로 의료 공급을 커버하려 했다면 지난 30~40년 동안 경험한 것처럼 빠르게 의료 인프라가 갖춰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러 기형적인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한국 보건의료 모델은 분명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OECD 평균(80%)에 비해 공공에서 보장해주는 의료비 비율은 다소 낮지만 영국 국영 의료서비스처럼 위급하지 않은 질환으로 의사를 보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하거나, 미국처럼 민간 보험이 없으면 의료비 폭탄을 맞게 되는 양단의 폐해에서 벗어난 시스템을 만들었다. 거시적인 지표들은 더욱 뚜렷하다. 한국은 OECD 평균보다 의료비를 적게 쓰지만 건강은 가장 높은 수준이다. OECD 회원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1970년 70세에서 2019년 81세로 늘었는데, 같은 기간 한국은 62.3세에서 83.3세로 늘어났다.

그러나 박건희 단장은 “이 성공은 계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이용자·공급자·건강보험이라는 한국 보건의료의 세 주체가 나름대로 만족해왔지만 모두 불만족으로 돌아설 날이 멀지 않았다.”

장면 5. 무한 증식

보건의료계에는 ‘철의 삼각’이라는 개념이 있다. 의료의 질, 접근성, 비용은 동시에 긍정적 방향으로 달성되기 어렵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치료의 수준(질)이 높아지고, 병원을 더 자주 찾으면(접근성), 상식적으로 거기에 드는 돈(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서 살펴봤듯이 한국 의료는 그동안 이 세 마리 토끼를 얼추 다 잡는 데에 성공해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림 5〉는 보건의료 철의 삼각형을 도식화한 모형이다. 사실 이 삼각형 밖에는 좀 더 근본적인 틀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한 국가의 전체 의료비 총량이다. 정재훈 가천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질, 접근성, 비용이라는 세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풍선에 빗대어 이를 설명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풍선이 부풀어 오르면서 그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 세 개가 모두 커지면서 좋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풍선에 불어넣는 바람이 전체 의료비 총량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전체 의료비는 현재 OECD 평균에 비해 낮은 수준이지만 같이 눈여겨봐야 할 지표가 하나 더 있다. 의료비 증가 속도이다. 정재훈 교수는 “한국은 지난 30년간 의료비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말했다. 이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한국 의료비는 2008년부터 2013년 연평균 5.4% 증가했지만 2013~2018년에는 7.3%씩 늘어났다(〈그림 6〉 참조).

이처럼 가파른 확장을 뒷받침하는 동력은 고도성장과 생산가능인구(15~64세)의 증가였다. 나라의 경제력이 커지고 생산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늘어나는 의료 수요를 따라잡고도 남을 만큼 의료비를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동력은 빠르게 꺾이고 있다. 고령화·저출생의 여파로 인구구조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인구특별추계’에 따르면 생산가능인구 비율은 2017년 전체 인구의 73.2%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들어 2030년에는 65.4%, 2050년에는 51.3%까지 떨어진다(〈그림 7〉 참조). 의료의 질, 접근성, 비용이라는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던 아까의 그 풍선을 떠올려보면 숨이 차서 더는 풍선을 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문제는 풍선을 부풀릴 연료가 소진되고 있는데도 한국 의료는 확장적인 방향으로 돌진 중이라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89년 체제’라 일컬을 수 있는 한국 보건의료체제 자체가 의료량과 비용을 끊임없이 늘리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

행위별 수가제는 의료 행위가 증가할수록 수입이 많아지기 때문에 공급자(의료기관) 측면에서 과잉 진료를 유발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민간 병의원에 의료 공급을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환경에서 이런 유인은 더욱 강화된다. 이용자(환자·국민) 측면에서는 거의 무제한적으로 허용된 의료 접근성이 과다한 의료 이용을 불러온다. 한국처럼 질환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1·2·3차 의료 피라미드에서 가장 고도의 의료를 제공하는 상급 종합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처럼 의료 공급이 수요를 늘리고, 확대된 수요를 다시 공급이 채워주면서 한국은 의료를 가장 빈번하게 쓰는 나라가 되었다. 2017년 연평균 1인당 의사 방문 건수는 16.6건으로 OECD 1위이다. 2위인 일본(12.6건)과도 격차가 크다.

이런 토양에서 2000년대 중반 도입된 실손보험은 의료량과 의료비 증가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정재훈 교수는 실손보험이 출시된 이후 기존 질서를 교란시킬 때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3~4년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품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실손보험 가입자는 보험금을 내고 나면 의료비가 거의 무상의료에 가까워진다. 의사 입장에서는 ‘이것 필요하다, 저것 필요하다’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환자가 왔을 때 ‘실손보험 있으세요?’ 물으면 되는 것이다.”

공적으로 의료 재원을 마련하는 여러 나라에서는 의료 지출을 통제하는 장치도 갖추고 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식이 영국 NHS의 주치의 제도이다. 주치의는 장기적으로 담당 환자의 건강을 관리한다는 취지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게이트 키핑’의 역할을 한다. 환자가 과다하게 자주 진료를 받거나, 쓸데없이 2·3차 병원으로 가서 값비싼 의료를 이용하는 것을 막는다. 한국 보건의료체계는 영국 NHS에 비해 이러한 통제장치의 허들이 훨씬 낮기 때문에 이용자가 의료 접근성과 선택권을 폭넓게 누린 측면이 있다.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한국 모델에서 불필요한 의료 이용을 통제하는 장치가 환자가 내는 ‘본인부담금’이었다. 그런데 비급여 진료와 본인부담금까지 보장해주는 실손보험이 도입되고 가입자가 대거 늘어나면서 이마저도 거의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처럼 무한증식 루프에 올라탄 보건의료체계에 고령화라는 거대한 지각변동까지 더해진 것이 2023년 한국이 마주한 현실이다.

한국은 연평균 1인당 의사 방문 건수가 16.6건(2017년 기준)으로 OECD 1위다. ⓒ시사IN 윤무영

장면 6. 새로운 규범

장면 3에서 등장했던 보건의료학자의 말로 돌아가보자. “건강보험 문제의 해결 방안은 건보 내부가 아니라 건보 밖에 있다.”

건보만 들여다본다면 건보 개혁의 원리는 간명하다. 현 정권의 기조처럼 보장성 확대를 중단하고 재정 누수를 막아 ‘지출’은 줄인다. 보험료를 올리고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정부가 매년 지키지 않았던 국고보조금 20%를 건보공단에 제대로 지원해 ‘수입’은 늘린다. 물론 이런 정책들을 현실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해법’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건보 개혁이 덧셈 뺄셈의 접근법에 그친다면 정말 목표로 했던 건보의 지속가능성은 지켜낼 수 없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의 스케일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에 내재한 ‘무한증식 루프’를 그대로 둔 채 초고령화 사회에 본격 진입한다면 건보 수준에서 지출 조정을 한다 해도 보험료를 엄청나게 올리지 않고는 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실효성 있는 ‘진짜’ 건보 개혁이 되려면 건강보험뿐만 아니라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나머지 두 주체인 이용자와 공급자도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건보 개혁은 곧 한국 보건의료 개혁과 동의어인 셈이다.

“건보 문제 해결 방안은 건보 밖에 있다”라고 했던 보건의료학자는 “건강한 국민”과 “합리적인 공급자”가 개혁의 키워드라고 말했다. 인구 전체의 고령화는 막을 수 없더라도 ‘건강수명’을 늘려서 노인성 질환으로 의료비가 증가하는 시기를 미루고, 앞서 살펴봤듯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빈번하게 병의원을 찾는 의료 이용 패턴을 전환하는 과제가 이용자들 앞에 놓여 있다. 공급자들은 과잉 진료 관행에서 벗어나 환자의 건강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적정 의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확장 지향적이었던 한국 보건의료 시스템을 멈춰 세우고 대신 질적·구조적 상향을 꾀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불필요한 의료 수요를 조절하기 위해 국민들은 지금까지 누리던 의료 접근성과 선택권에 일부 제한을 두는 정책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공급자 측면의 과잉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행위별 수가제’에서 의료비 총액을 제한하는 ‘묶음 방식’의 지불제도로 변경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공공병원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적정 의료’를 제공하는 합리적 의료 공급자 모델을 정착시키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보건의료 개혁과 관련해 다양한 정책과 제안이 쏟아지고 무수히 많은 논의가 오갈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가운데 무엇을 택하든 이용자인 국민과 공급자인 의료계가 ‘새로운 규범’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내야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민간 상품인 실손보험이 얽혀 있고, 노령인구에 접어든 윗세대와 더 많은 건강보험료를 부담해야 할 아랫세대 간의 조율이라는 성격까지 고려한다면 이는 실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과업이다.

이 과정에서 각 주체는 지금까지 누리던 것 중 일부를 양보하고 내려놓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건보 개혁이란 ‘한국 사회의 미래’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내걸고 긴 시간 설득과 조정, 양보와 타협을 거쳐야 하는 고도의 정치 행위이기도 하다.

장면 7. 다시 국무회의

한 보건의료계 전문가는 “정권 지지율 90%가 필요한 정책”이라는 말로 건강보험 개혁의 어려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대결적이고 적대적인 구도로는 넘을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2022년 12월13일 국무회의에서 건보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이전 정부를 비난하는 언어들로 채워졌다. 미래를 위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조금씩 내려놓고 힘을 모으자는 호소는 들어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는 ‘건강보험 개혁’이라는 분명한 시대적 의제를 꺼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은 아직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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