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태찌개.ⓒ최갑수 제공

아는 선배한테서 문자가 왔다.

“○○반점 폐업. 아저씨 암 걸리심. ㅠㅠ”

반점은 기름 볶는 요리다. 중국 음식이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 ‘한국 식당은 김치’라며 매번 갓 담근 겉절이에 묵은지를 내는 집(중국집인데도 그렇다). 선배에게 이런 문자를 주절거리며 보냈다.

“사라지는 노포, 마지막 날에는 모든 단골이 모여서 꽃다발도 좀 안기고, 추억의 음식도 실컷 먹고, 주인이 혼신의 힘으로 마지막 주문을 만들어내고 땀을 훔치면서 홀에 나설 때 손님들이 박수를 쳐줄 수 있는 그런 문화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폐업의 변이라도 써놓고 문 닫는 집은 드물다. 우리 사회는 이제 외면의 시대가 되었다.

학창 시절에 잘 다니던 술집이 있었다. 등록된 상호는 뭔지도 모르겠고 선배들마다 개미집이라고도, 왕개미집이라고도 부르는 대학가에 흔하게 있던 아줌마 술집. 방학 때에도 돈 한 푼 없이 그 집에 가서 막걸리 한 병을 시켜놓고 공짜 깍두기에 마셨다. 계산을 못하니 나가지도 못하고 저녁이 될 때까지 내처 마셨다. 기다리다 보면 퇴근한 선배가 누구라도 왔다. 물론 술값도 선배가 내줬다. 그런 집의 주인 내외가 병들고 가게를 그만하게 되었다.

몇 년 후, 학과 창립기념식에 그 아주머니를 불렀다. 명예 79학번인가 학사증을 준비하고 행운의 열쇠도 드렸다. 학생들이 끝내 못 갚은 외상값 대신이었다. 그 아줌마, 그러니까 김진자씨는 마이크를 잡고 소감을 말했다.

“79학번 ○○아, 너 뒷주머니에 돈 숨기고 술값 안 낸 거 내가 다 안다. 80학번 ○○아, 너 그때 여자 바꿔가며 데려와도 아무 말도 안 했지. 81학번 ○○아, 너는 등록금 갖고 술 마시다가 그때 휴학했지?”

비상한 기억력으로 유명한 김진자씨는 완벽하게 왕년의 비밀을 다 떠벌릴 기세였다. 행사장이 난리가 났다. 더 심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마이크를 뺏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뒤풀이에서 다들 많이 취했다. 명예 학번 술집이 있는 학과를 다닌 게 우리들의 자부심이었다.

사실 그 집은 안주가 정말 맛없기로 유명했다. 공짜인 김치는 배추김치를 먹어본 기억이 없고, 깍두기를 냈는데 무를 얼마나 작게 잘랐는지 술 취하면 헛젓가락질을 할 정도였다. 동태찌개가 주력 안주였다. 그때는 그랬다. 물을 많이 부어서 양이 많아 보이고, 여차하면 재탕할 수 있는 찌개가 사랑받았다. 재탕을 부탁하면 잔소리를 하면서도 어떻게든 찌개를 다시 끓여 내다주던 사람이 또 김진자씨였다. 학생들이 가는 개미 콧구멍만 한 대폿집으로 어떻게 자식들 가르치고 생계를 유지하셨는지 모르겠다.

재래시장 동태의 모습.ⓒ연합뉴스

학생용과 어른용 찌개는 달랐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했을 때였다. 무슨 장난이었는지 그 집에 다른 술집의 여주인을 모시고 갔다. 내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크게 놀랐다. 김진자씨의 음식솜씨가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동태찌개의 국물은 어찌나 진하고 살뜰한지 목으로 넘기기가 미안했다. 동태 살은 결대로 살살 찢어져서 녹아내렸다. 학생용과 어른용 동태찌개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김진자씨는 동태찌개 한 냄비로 하루 종일 버티는 학생들을 상대하느라 나름 요령이 생겼달까. 김진자씨에게, 아니 개미집 아줌마에게 나중에 그 여주인이 우리 엄마가 아니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이유야 뭐 여러분이 아실 것 같다. 김진자씨는 여전히 잘 계신다. 동문 선배가 가끔 통화한다고 한다. 그때마다 예의 학생들 이름을 외며 운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동태찌개는 앞선 일화 말고도 몇 장면이 있다. 어머니가 우릴 먹이던 동태찌개도 김진자씨와 비슷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숟가락은 많고 동태는 한 마리니, 물을 많이 붓고 요령을 부려야 했다. 그 얘길 나중에 들었는데 이러셨다.

“뭐 별수 있었나. 두부와 콩나물을 많이 넣었지. 늬 형제들이 먼저 먹겠다고 숟가락이 바쁜 걸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지 뭐. 아 참, 미원도 꽤 넣었다. 뭔 수가 있나. 국물 양 늘리자면.” 동태찌개의 맛은 동태의 기름기와 겨울 무가 반씩 한다고 생각한다. 동태에 기름기가 있다는 건 미묘한 얘기다. 기름기 없기로 유명한 생선이 동태인데, 맛있는 동태찌개는 연하게 기름이 돈다. 아마도 껍질에서 나오는 기름 같다. 그게 풍부하게 맛을 내려면 큰 놈이어야 한다. 시중에서는 큰 동태를 거의 구할 수 없다. 내 인생에서 큰 놈, 대물을 본 것도 손에 꼽는다.

서귀포 올레시장 안쪽에 마트가 하나 있다. 그 문 앞에 오랫동안 동태를 파는 할머니 세 분이 딱 정확한 간격을 두고 앉아 계신다. 몇 년 전의 일이니 아직도 세 분이 다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이 할머니들은 그 자리에 백 년 동안 있었던 것처럼 미동하지 않고 마치 정물처럼 있다. 호객도 하지 않는다. 생선 장수라면 바닥이 흥건해서 장화 신고 일하는 게 당연한데 이 할머니들은 전혀 다르다. 마치 바르셀로나 시장에서 마른 하몽을 파는 장인들처럼 동태 한 마리를 작은 좌판 위에 얹어두고 칼 한 자루만 벼르고 앉아 계신다. 동태는 누런 포장지로 덮여 있어서 마치 경건한 성물처럼 보인다.

주문을 하면 할머니는 칼을 들어서 썩썩 포를 뜬다. 물을 뿌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아주 깔끔하게 마른 상태로 작업이 끝난다. 세상에나, 어디서 그런 동태를 가져오는 것일까. 흔히 보는 동태보다 세 배는 됨직하다. 썰 만큼만 포장지를 벗겨내어 썰고는 이내 덮어버려서 동태의 전체 크기를 보지도 못했다. 저런 동태라면 포도 좋지만 찌개를 끓일 때 얼마나 진하고 묵직할까.

제주도 사람들은 전으로 부쳐서 제사에 쓰기 좋은 큰 동태를 선호한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잡히는 생선은 크기가 작거나 전으로 부치기 어려운 데 비해 동태는 살집이 좋고 썰어 팔기 좋아서 1990년대부터 사랑받았다.

한번은 강릉 중앙시장 지하에서 비슷한 동태를 보았다. 명태 잡던 동해안 사람들이니 그런 귀물을 먹는 습관이 남아 있어서일까. 한 마리가 3㎏은 되었던 것 같다. 토막을 쳐서 아이스박스에 담았는데 팔이 저릿하게 묵직했다. 그렇게 큰 동태는 볼살의 맛이 기가 막히다. 어두일미가 괜히 나온 말인가. 대구만 볼살이 있는 게 아니다.

지난 제795호의 짜장면 편에 나온 친구가 군대 생활을 강원도 고성군 거진에서 했다. 그때 입대 전이었던 나는 면회를 갔다. 1984년 2월9일의 일이다. 부대 안에서 친구 면회를 마치고 눈이 펑펑 내리던 거진항의 술집에서 동태인지 생태인지 모를 찌개를 먹었다. 명태가 잡히면 생태로 먹고, 파도가 세서 출어를 못하면 한겨울 제철의 동해안 북쪽 어항에서도 동태를 먹었다. 생태를 밖에 두면 동태가 되는 계절이기도 했다.

술집은 시종 무시무시한 함경도 사투리로 가득했다. 알아들을 수 없던 이방 같았다. 드르륵, 김이 서린 미닫이문을 열고 드나들던 명태잡이 아바이들의 풍채와 말투가 기억에 생생하다. 누런 양푼에 담겨 있던 그 집의 술국이 당장이라도 김을 뿜어 올릴 것 같았다. 춥다. 동태찌개 먹기 좋은 날들이다.

기자명 박찬일 (셰프)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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