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녀석과 만난 곳이 모래내 중국집이었다. 우리는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최갑수 제공

녀석은 짜장면이 붇고 있는데도 젓가락을 잘 대지 않았다. 술잔만 자꾸 들었다. 그가 고개를 뒤로 꺾을 때마다 목젖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였다. 많이 말랐네. 사람이 마르면 목젖이 크게 보인다. 그 큰 목젖을 움직이며 술을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우고서야 그가 말했다.

“미안하다. 못 지켜서. 집사람은 도망갔어.” 전국을 뒤지며 찾아다녔다고 했다. 서울 가리봉동, 구로동은 물론이고 서울 근교 도시들, 멀리 여수까지 가봤다. 중국의 처가에도 갔다. 아내는 없었다. 냉대만 받았다. 자네가 해준 게 뭐 있나. 가난은 아내를 못 지켰다. 녀석과 내가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새 학기가 되어 교실에 들어갔더니 맨 뒷자리가 하나 남아 있어서 앉았다. 머리를 박박 깎고, 눈빛이 번쩍번쩍하는 녀석이 짝이 되었다.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천재 선수인 허재랑 동급생이었다. 물론 허재는 다른 학교 소속 선수였다.

“허재는 이미 중학교 때 고등학생보다 잘했어. 시합에서 그를 막는 법은 딱 하나 있었지. 10반칙이라고 했어. 농구에서 5반칙이면 퇴장이잖아? 우리 선수 두 명이 허재에게 붙어서 5반칙으로 연속 퇴장당해야 그나마 막는다는 소리야.”

녀석은 나이가 우리보다 한 살 많았다. 하지만 ‘복자’는 아니었다. 복자란 유급해서 1년 나이 많은 동급생을 말한다. 회복할 복, 사람 자를 쓰는 복자(復者). 복자는 깡패이거나 운동선수 출신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일반 학생도 유급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그 나이 무렵 1년은 컸다. 덩치며 운동능력이 한 해 한 해가 다른 청소년기였으니까. 학교에서 나서서 유급을 권유했다. 그걸 속어로 ‘꿇린다’고 했다. 그렇게 생겨나는 복자는 아무도 안 건드렸다. 깡패이거나 운동선수인데 누가 건드리겠나. 나는 그 시절, 별로 살고 싶지 않은(?) 소년이었다. 짝이 될 녀석에게 복자고 나발이고 반말을 했다.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난 복자 아니야. 나이는 한 살 많다만. 친군데 말 놓는 거지.” 초등학교 때 어찌어찌하다가 한 살 늦었다고 했다. 이름에 용(龍)이 들어갔다. 64년 용띠였다. 그때 우리 학급은 ‘돌반’이었다. 공부 안 하거나 못하는 애들이 모였다. 담임은 첫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랑 붙고 싶은 놈은 계급장 떼고 해보자. 1년 조용하게 살고 싶다. 도와주라. 나, 이 학교 선배잖니.” 별명이 카리스마였다. 당시엔 카리스마라는 말이 흔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진짜 카리스마가 있었다. 처음엔 한 반에 60명이던 숫자가 한 달이 지나면 한두 명씩 사라졌다. 2학년을 마칠 무렵엔 열 명 가까이 없어졌다. 다수가 주먹 세계로 빠져나갔다. 철조망, 철탑, 542(버스 종점 이름이었다) 같은 불량 그룹들로. 그 그룹에 들어간 애들은 간혹 본드나 낮술에 취해 학교 앞에 와서 애들을 삥뜯었다. 그런 학교에서 학생들 간수하고, 분위기 잡기에는 카리스마 선생이 최고였다. 그는 매질을 별로 안 하고도 조용히 학급을 잘 이끌었다.

물론 선생님이 없을 때 툭 하면 교실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얻어터진 놈은 수돗가에 가서 코피 쓱 닦고 와서 수업을 받곤 했다. 녀석은 한 번도 싸움을 안 했는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은 내게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선수를 하느라 기초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수학시간에 졸지 않는 건 반장이랑 녀석밖에 없었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의 한 중국집. ⓒ박찬일 제공

황과와 오이, 같지만 다른 것

나는 공부하기 싫어했고, 학교 갔다가도 대충 도망쳤다. 가끔 녀석과 교복 입은 채로 학교 뒷산의 절 밑, 사하촌에 가서 밀주를 마셨다. 어른 흉내였지만 우리는 심각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난에 대한 절망 같은 것이었다. 녀석의 집에 처음 가서 놀란 건, 키 큰 우리 둘이 그 집에서는 제대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붕이 낮았다. 라면을 끓여 양은 밥상에 놓고 먹는데, 대낮인데도 천장에서 쥐가 뛰어다녔다. 나랑 비슷한 녀석이 있구나.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어찌어찌 우리는 살아냈다. 군대 갔다 오고, 대충 밥벌이를 찾았다. 녀석은 보일러 고치고 설치하는 일을 했다. 장가가고 싶어 했는데 연애를 못하는 눈치였다. 어느 처녀가 저 가난뱅이에게 쉬이 시집오겠는가.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녀석이 장가간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사회를 봤던가. 조선족 처녀였다.

신혼집에 한 번 갔었다. 녀석이 애를 많이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둘이 잘 맞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우리는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중국 남자는 술 안 마신다고 했다. 술 좋아하는 그는 낙제였던 것 같다. 술 안 마시는 중국 남자. 그건 예감을 주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아내가 우울해한다고 녀석은 걱정했다. 안주로 오이를 내왔는데, 아내는 황과라고 했고 녀석은 오이라고 수정해주었다. 황과, 오이.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했다.

그러고는 이혼 아닌 이혼 소식을 들었다. 이혼 도장도 못 찍었다. 당사자가 없어졌으니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실종 신고를 하고 그러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당시 바빴다. 가끔 녀석에게 회사로 전화가 왔다. 바쁘다 야. 그래. 곧 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못 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들어간 게 모래내 중국집이었다.

어중간한 오후, 그 시절엔 중국집 2층에서 짬뽕 국물과 군만두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폼은 사라지지 않아서 녀석은 중국집 팔각 물 잔에 소주를 마셨다. 짜장면엔 으레 그렇듯이 얌전하게 채 썬 오이가 올라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라진 아내에 대해, 황과와 오이에 대해 말했다. 같지만 다른 것이었다.

짜장면에 소주는 꽤 잘 맞는다. 여럿이 앉은 자리에서 안주로 주문한 짜장면을 숟가락으로 잘게 자른다. 그냥 놔두면 불어서 술안주를 할 수 없다. 밥으로 먹으면야 후루룩 먹게 되는데, 술안주는 천천히 먹게 되니까. 소주나 이과두주를 한 잔 마시고 앞접시에 짜장면을 숟가락으로 덜어서 춘장을 조금 뿌리고 생양파를 얹어 먹는다.

그날 우울했지만 녀석과 그렇게 짜장면 안주로 재미나게 술을 마셨다. 우리는 금세 취했고, 녀석은 큰 키를 꼿꼿하게 세우고 밤길을 걸어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만난 건 적십자병원 빈소였다. 오래 울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짜장면을 안주로 술을 마시면 녀석이 생각난다.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잊을 수가 없다. 이 글 초고를 써놓고 방산시장 중국집 방산분식에서 3000원짜리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잔도 없이 물컵을 주는 집. 반병씩 따라서 쭉 들이켜면 두 번에 끝난다. 잘살고 있냐. 거긴 소주 있냐. 빈 소주병만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기자명 박찬일 (셰프)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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