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일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대표팀이 기념촬영을 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에도 어김없이 ‘경우의 수’가 등장했다. 한국 축구는 2022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을 앞두고 16강에 오를 수 있는 각종 경우를 셈해야 했다.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한국의 승리를 전제로, 다른 경기(가나-우루과이) 결과까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필 3차전 상대는 우승후보급으로 평가되는 포르투갈이었다. 유럽의 스포츠 전문 통계업체 옵타(OPTA)가 전망한 한국의 16강행 확률은 9.9%에 불과했다. 이런저런 걱정 앞에서 안정환(MBC 해설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경우의 수는 숫자에 불과하다. (경우의 수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MBC 〈안정환의 히든 카타르〉에서).”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한국 선수들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가진 힘을 모두 쏟아냈다. 전반 5분 만에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김영권의 골로 다시 균형을 만들고, 경기 종료 직전 손흥민의 질주와 황희찬의 침투에 이은 합작골로 경기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간절함은 하늘을 움직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놓았을 때, 다른 경기장에서 한국이 가장 바라던 결과(우루과이 2-0 승)가 나왔다. 가나가 이겨서도 안 되고 우루과이가 한 골을 더 넣어서도 안 되는, 딱 그만큼의 경우를 완성하는 스코어였다. 그런데 이 기적 같은 성취를 두고 대표팀의 막내 이강인은 “기적이라기보다는”이라는 말로 제동을 걸었다. “그만큼 선수들과 코치(코칭스태프), (지원) 스태프 분들이 한 팀이 되어 노력을 많이 한 결과다.”

이강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희박한 가능성을 살려 조별리그를 통과한 벤투호의 경기력은 4년간 다져온 전술과 기술, 조직력의 총합이었다. 2002년 4강 신화와도 대비되는 지점이다. 20년 전의 성공이 상대의 강점을 통제하는 수비(압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번에는 우리가 ‘의도한 전술’을 통해 경기를 주도하고 장악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우루과이전(0-0 무)에서는 적극적인 중원 싸움으로 상대의 침투를 차단했다. 특히 공격 상황에서나 수비 상황에서나 상대보다 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선수들의 움직임이 이어졌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수아레스는 무뎠고 발베르데와 누녜스는 한국의 압박에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가나전(2-3 패)에서는 두 골을 먼저 내주고도 따라잡는 저력을 보였다. 내용으로 보면 결과가 더 아쉬운 경기였다. FIFA 통계에 따르면 이날 한국은 점유율 53(%)대 32(%), 슈팅 수 21대 8, 유효슈팅 6대 3, 코너킥 12대 5 등 공격 지표에서 가나를 크게 앞섰다. 다만 결정력이 부족했다. 가나가 유효슈팅 3개를 모두 골로 완성한 것과 비교된다. 그럼에도 패스를 통한 지배력과 좁은 공간에서의 패턴 플레이가 유지됐고, 세트피스를 활용한 ‘약속된 플레이’가 다양하게 진행됐다. 과거의 월드컵에서처럼 무력하게 패하는 경기가 아니었다.

포르투갈전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승골을 만들어낸 손흥민. ⓒ연합뉴스

5골 중 4골이 20대 초중반 선수들 작품

포르투갈전에는 스포츠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 승리의 모든 서사가 녹아들었다. 고난(손흥민·김민재 부상)과 역경(탈락 위기)을 딛고 총력(황희찬 복귀, 이강인 선발, 정우영 센터백 변경)을 쏟으며 끝까지(후반 추가시간) 포기하지 않았기에 역전(2-1 승)의 기쁨을 맛봤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승골을 합작한 인물이 손흥민과 황희찬이었다는 사실도 극적이다. 마스크를 쓰고 투혼을 불사른 주장과 부상을 딛고 폭발한 ‘황소’의 질주가 실낱같은 희망을 살렸다. 16강전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을 상대로도 능동적인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개인 기량과 체력에서 열세를 보이며 1-4로 패했지만,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알리송에게 세이브(선방)하도록 만들었다. 알리송은 5개의 세이브를 기록했다(〈뉴욕타임스〉).”

‘빌드업 축구’로 대변되는 벤투의 지향점은 후방에서부터 상대 골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볼을 소유한 상태로 경기를 주도하는 데 있다. 짧게 주고받는 패스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긴 패스도 적절히 활용한다. 골문 앞까지 빠르고 정확하게 볼을 전달하는 게 핵심이다. 빠른 전환 플레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활동량과 압박 능력이 중요했다. 이강인에게 마지막 평가전까지 요구된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했다. 4년간 벤투가 선수 기용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실상 핵심 선수들을 중심으로 전술의 뼈대와 틀을 만드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벤투의 철학과 전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한배를 탈 수 없었다. 원칙대로 선수를 선발하고, 기준에 맞춰 전략 전술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벤투 사단의 방향성과 훈련 프로그램에 선수들은 깊은 신뢰를 보냈다. 벤투 감독을 향해 외부에서 비난 여론이 일어도 선수들은 “감독님을 믿는다”라거나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월드컵 본선에서 벤투가 전술적 유연성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벤투의 교체 카드가 거의 예외 없이 적중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4년간 발 맞춰온 호흡과 조직력의 힘이다.

역대 세 번째, 12년 만의 16강 진출은 그저 기록으로 머무는 성취가 아니다. 다음 대회까지 연속성을 기대할 수 있는 성공 경험이 생겼다. 중원에서 공수 조율의 핵심 역할을 소화한 황인범(26)은 “쫄지 않고 당당하게 플레이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골 맛을 본 젊은 선수들도 많다. 이번 대회 한국이 기록한 5골 중 4골이 20대 초중반 선수들의 작품이다. 조규성(24, 2골), 황희찬(26), 백승호(25) 등이다. 수비 기둥 김민재(26)까지, 4년 뒤면 이들이 선수로서 최전성기에 달할 시점이다. 번뜩이는 존재감을 보여준 이강인이 21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한다. 심지어 그의 목표는 1승이나 16강 진출에 그치지 않는다. 이강인은 브라질전이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팀들은 모두 우승을 하려고 한다. 언젠가 우리가 우승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팀이 되려면 발전을 많이 해야 한다.”

이제 다시 현실로 눈을 돌리면 중요한 과제가 남았다. 차기 사령탑 선임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카타르월드컵을 끝으로 벤투 감독과 결별을 공식화했다. 그가 남긴 메시지는 선명하다. 4년을 버텨 일궈낸 성취는 4년이라는 물리적 시간보다 확고한 철학과 신념의 승리였다. 후임 감독은 한동안 벤투의 그림자와 싸울 수밖에 없다. 지도 철학부터 선수 선발, 훈련 프로그램, 전술 체계, 상대 분석에 이르기까지 벤투 사단과 비교될 것이다. 벤투 감독에게 신뢰를 보내던 선수들의 눈높이 혹은 기대감까지 고려해야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차기 감독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기자명 배진경 (전 ⟨포포투⟩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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