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5월27일 프랑스 경기를 앞둔 오스트리아 팀.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마티아스 신델라. ⓒdpa

카타르월드컵에서 이란 선수단이 경기 전 국가가 울려 퍼질 때 일제히 함구해버린 이야기를 들었을 거야. 이란에서 벌어지는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고 정부의 살인적 탄압에 반대하는 의미였지. “순교자여, 그대의 함성은 역사에 울려 퍼지리. 인내하며 이어나가는 영원한 그 이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여” 운운하는 이란 국가의 가사를 ‘씹으면서’ 그들은 소리 없이 외쳤던 거야. “순교자는 과연 누구인가. 공화국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뉴스를 들은 순간부터 아빠는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팀 다음으로 이란 팀을 열렬히 응원하기로 했다. 오늘은 이란 선수들처럼, 골리앗 같은 거대한 상대에게 작은 힘으로나마 맞섰던 그라운드의 다윗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한다.

1934년 이탈리아에서 제2회 월드컵대회가 열렸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승리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전갈을 보내며 선수단을 압박하는 판이었으니 대회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했다. 경기 때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축구가 아닌 격투기를 자주 선보였고 심판들은 눈을 감았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결승전에서 이탈리아 선수에게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아우성치던 관중은 한 골을 먹자 그냥 “죽어라”를 합창했어. 연장 끝에 패배한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이 아쉬움에 앞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지경이었지. 체코 선수의 회고. “우리는 경기에서 졌지만 살아남지 않았나.”

4강전에서 이탈리아의 상대는 오스트리아였어. ‘축구계의 모차르트’라는 극찬을 들었던 슈퍼스타 마티아스 신델라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팀은 당대 유럽 최강이었어. 월드컵이 열리기 전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신델라를 빼고도 이탈리아를 4대 2로 완파한 이력도 있었어. 이탈리아 선수들은 이 ‘축구계의 모차르트’를 망가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아무리 거친 태클을 해도 심판은 눈을 감았고, 우아한 발놀림으로 상대방 수비를 무너뜨리던 신델라는 무자비한 발길질에 만신창이가 되고 말아. ‘분더팀(Wunderteam)’, 즉 ‘놀라운 팀’이라는 별칭을 지닌 오스트리아는 끝내 이탈리아에 패했다.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입은 신델라는 3-4위전에 출전하지 못하고 월드컵을 끝내야 했지.

193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도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우승 후보였어. 오스트리아 팀은 지역 예선을 거쳐 월드컵 출전권을 따냈지만 월드컵에 발을 디디지 못했어. 프랑스월드컵은 1938년 6월4일 킥오프됐지만 그로부터 석 달 전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나라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야. 오스트리아의 슈퍼스타 마티아스 신델라의 상황은 더 나빴단다. 그는 나치가 혐오해 마지않는 유태인이었으니까.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자마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프로축구협회를 해산시키고 오스트리아 축구계의 유태인 청소에 나섰지. 유태계 구단주들은 구단을 빼앗겼고 유태계 선수들은 직장을 잃었다. 신델라가 소속된 FK 오스트리아 빈 팀 단장이었던 미힐 슈바르츠도 직을 잃고 해외로 탈출을 모색해야 했어. 나치 당국은 유태계 인사와의 교류는 물론 대화조차 하지 말라고 강요했단다. 하지만 신델라는 슈바르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 “새 클럽 단장은 단장님하고 말도 섞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계속 단장님하고 얘기할 겁니다.”

신델라의 저항은 1938년 4월3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친선경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 빈의 프라터 스타디움에서 거창하게 열린 이 경기를 독일 민족의 ‘형제애 부각’의 장으로 승화시키고 싶어 했어. 아울러 선수들에게 이 경기는 사이좋은(?) 무승부로 끝나야 한다고 압박했지. 하지만 신델라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다.

11월21일(현지 시각) 영국과 경기에 나선 이란 축구 선수들이 국가가 울려 퍼질 때 일제히 함구했다. ⓒAP Photo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세리머니

신델라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전반전 내내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며 ‘사이좋은 무승부’에 동참하는가 싶었어. 하지만 후반전 절반이 지날 즈음 별안간 신델라의 움직임이 빨라지더니 0대 0으로 끝나기를 고대하던 독일 당국에 얼음물을 끼얹는 골을 성공시킨다. 신델라는 나치 고위 관계자들이 즐비하게 앉은 본부석 앞으로 달려가 왈츠를 추며 골 세리머니를 했다고 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왈츠. 슈퍼스타가 아니었다면 그 경기장에 서지도 못했을 유태인 신델라의 왈츠 앞에서 나치 관계자들의 얼굴은 얼마나 일그러졌을까. 나치 깃발을 흔들던 오스트리아 관중도 이내 자신들 기억 속 ‘분더팀’을 되살려 환호한다.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사이좋은 무승부는 물 건너가고 신델라의 분더팀은 한 골을 더 성공시켜 2대 0으로 독일 팀을 꺾는다.

이후 신델라는 독일 대표팀에 합류하라는 끈질긴 제안을 받았어. 1938년 월드컵을 앞두고 나치는 신델라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감수하고라도 분더팀의 전력을 독일 대표팀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 같아. 하지만 신델라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거부한다(나치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신델라의 대표팀 합류를 거부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고는 아예 축구장을 떠나 카페를 열었지. 그 카페는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해외로 떠난 유태인으로부터 인수한 것이었어. 유태인의 피난을 노려 그 재산을 거저먹다시피 하는 얌체 짓이 유행이던 시기, 신델라는 이전 유태인 주인에게 제대로 된 값을 치렀다. 이런 행동만으로도 신델라는 게슈타포의 감시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고, 게슈타포는 신델라 가게의 ‘고객 절반이 유태인’이라고 지적하며 그가 나치당에 동조적이지 않다고 윗선에 보고했지.

나치 깃발 수만 개가 휘날리던 ‘오스트리아-독일 통일 기념경기’에서 우정의(?) 무승부 언질을 걷어차고 결승골을 넣은 후 나치 간부들 앞에서 왈츠를 추던 신델라는 몇 달 뒤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굴뚝이 막혀서 발생한 일산화탄소 질식사였는데 지금까지도 사고설, 나치의 암살설, 자살설 등이 분분해. 어느 쪽이든 정상 사회에서라면 ‘축구계의 모차르트’ 마티아스 신델라가 맞닥뜨려야 할 운명은 아니었을 거야.

자신이 대표하던 국가가 허무하게 사라지고 자신을 응원하던 국민들은 나치 깃발을 들고 환호하며 ‘하일 히틀러’를 합창하는 막막한 상황에서, ‘우애 넘치는’ 무승부를 대놓고 강요하던 나치 관계자들 앞에서 의연하게 골을 성공시키고 왈츠 스텝을 밟았던 신델라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그도 두려웠을 거야. “이란에 돌아가면 사형당할 수도 있다”라는 풍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국가 제창 시간에 어깨동무를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던 카타르월드컵의 이란 선수들만큼이나 말이다. 하지만 신델라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유태인들이 피눈물 흘리며 고립되고 떠나가던 그 순간에 축구를 통해 저항했고, 축구를 포기함으로써 살기등등한 골리앗을 거슬렀다. 2022년 카타르월드컵에 가족과 함께 초대받았지만 “조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모든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해야 한다”라며 거절하고, 반정부 시위 지지 메시지를 냈다가 체포된 이란 축구 영웅 알리 다에이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자유와 생명을 위협하는 골리앗들은 끊임없이 더 거대하고 더욱 교활한 모습으로 재생되지만 그에 맞서는 다윗들의 용기 역시 항상 새롭게 부활한다. ‘한낱 공놀이’일 수도 있는 축구에서조차.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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