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1일 일본 관동 대지진 이후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연합뉴스

2023년은 매우 끔찍한 역사적 사건의 100주기다. 일본의 관동(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이 벌어진 해가 1923년이었거든.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일본의 관동 지역을 거대한 지진파가 휩쓸고 지나갔다. 마침 점심시간으로 가정집이나 식당에서 밥을 짓고 요리를 할 때였기에 건물이 무너지면서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다. 지진 전 상륙했던 태풍의 여파로 강풍마저 불어대는 바람에 대화재가 도쿄 시내를 비롯한 관동 지역을 삼켰다. 사망자 10만여 명 가운데 불타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고 하니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당시 일본에는 꽤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와 살고 있었다. 먹고살 일거리는 식민지 조선보다 넉넉하게 많았을 테니까. 일본인들로서는 이전에는 만날 기회가 없었고 가까이 살지도 않았던 낯선 문화와 풍습을 지닌 사람들이 몰려온 셈이야. “일본의 여관에서 전에는 조선인의 숙박이 드물었기에 우대해주었는데 최근에는 이것(조선인의 숙박)이 관례가 되는 동시에 조선인의 악취가 코를 찌르며… 가래침 뱉기 등 불결 행위가 파다해 (조선인들에 대한) 대우가 일변했다(〈조선일보〉 1921년 5월10일)”라는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변화를 짐작할 수 있어. 조선인들이 실제로 불결하고 냄새났다기보다는 문화가 다르고 형편이 좋지 않은 외국인 집단이 주변에 자리했던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겠지. 더하여 3·1운동에 이어 무장 투쟁과 의열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20년대 초반, 일본 제국주의는 물론 일본의 보통 사람들도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심을 마음속에 담게 된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 부족, 그리고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 그리고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가 버무려지고 있었다고나 할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심장부가 파괴된 자연재해가 터졌다. 이 미증유의 재난을 맞아 눈에 핏발 선 일본 사람들 사이에 악마의 속삭임이 돌기 시작했어. “조선놈들이 이 틈을 타서 뭘 어떻게 하려 한다더라.”

예나 지금이나 ‘카더라 방송’의 위력은 놀랄 만큼 강고하다. 또 대재앙 이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희생양을 만드는 방식은 역사에 드물지 않았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 대한 유언비어를 쉬이 믿어버렸고 증오를 폭발시키기 시작했어. 9월2일부터 조선인들이 희생되기 시작했지만 이걸 무마하고 제어해야 할 일본 정부는 한 술 더 뜬다.

9월3일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는 이런 발표를 한다. “도쿄 부근 지진 재해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불을 지르고, 불령(不逞)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를 하고 있다.” 정부가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한 셈이었고 설마 하던 일본인들까지도 악마로 둔갑시키는 계기가 됐지.

일본 각지에 ‘자경단’이 조직되었고 여기에 공권력까지 가세한 대학살이 벌어졌어. 조선인들이 잘 발음하지 못하는 일본어 발음의 “15엔 50전”은 죽음을 부르는 암호였지. 죽창을 든 자경단이 “15엔 50전”을 요구할 때 더듬거리거나 그 발음이 일본인스럽지 않은 이들은 가차없이 죽음을 당했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6000명이 넘는다고 해. 하지만 이 야만의 시간 속에서도 끝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은 일본인도 있었어. 학살에 쫓겨 경찰서로 몸을 피한 조선인과 중국인 300여 명을 지킨, 당시 쓰루미 경찰서장 오카와 쓰네키치는 그중 한 사람이다.

일본 쓰루미 경찰서장 오카와 쓰네키치. ⓒNaver blog 갈무리

이슬람 사원 앞 돼지고기 파티를 향한 외침

9월2일 일본인 자경단이 중국인 4명을 경찰서로 끌고 왔다. 우물에 독을 타려던 것을 잡았다고 했지. 오카와 서장이 보기에는 중국인들이 가진 건 독도 아니고, 그들이 폭도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대들이 이토록 의심한다면, 내가 이 병에 든 내용물을 마셔보겠네. 그렇게 하면 독약인지 아닌지 판단이 설 게 아닌가(〈오마이뉴스〉 김보예의 일본 여행 속 역사 이야기).” 그러고는 벌컥벌컥 들이켰어. 그중 한 병은 맥주였고 한 병은 간장이었다지. 이후로도 조선인들이 무시로 경찰서로 끌려왔고 이미 학살은 도처에서 벌어졌다. 흥분한 자경단은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서에 수용한 조선인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조센징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후환을 없애버리겠다.” 그때 오카와는 이렇게 노호한다. “조선인에게 손대려면 한번 해봐라. 나부터 먼저 처치한 다음에야 조선인들을 죽일 수 있을 거다.” 한풀 꺾인 일본인 폭도들이 조선인들이 도망가면 어찌할 것이냐고 볼멘소리를 하자 오카와는 또 한 번의 포효로 일본인 폭도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만약 한 명이라도 여기에서 도주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대들 앞에서 배를 갈라 사죄를 하겠노라.”

살기에 눈이 뒤집혀버린 군중처럼 무서운 건 없어. 멋진 연설로 분노한 군중을 진정시키거나 설득하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누군가 “죽여라” 한마디로 불을 댕기면 상황은 끝난다. 이런 광기의 불바람 앞에서 공직자의 본분, 아니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지키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야. 눈 질끈 감고 외면해버리고서 한숨 쉬며 어쩔 수 없었다 변명하면 그뿐인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그러나 오카와는 그 일을 했다. 어떤 거인보다도 크고 강력한, 인간 도살 행위를 정당화하는 광기에 사로잡힌 ‘혐오’라는 골리앗 앞에서 오카와 쓰네키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라는 단단한 돌팔매를 휘두르며 맞섰던 거야

관동 대지진 이후의 조선인 대학살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비극이고, 일본인들의 처절한 반성이 필요한 사건이야. 하지만 조선인들에게 죽창질을 하고 칼을 휘두른 일본인들은 결코 타고난 악마가 아니었어. 선량한 얼굴로 조선인들과 곧잘 어울리기도 했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악마로 돌변하게 만든 악마성이 일본인들의 특수성일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요즘 대구 대현동의 이슬람 사원 건축 문제로 주민들과 지역 무슬림 간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을 거야. 이미 법원 판결로 사원 건축에 문제가 없다고 확정지어진 후에도 일부 주민들은 무슬림들이 금기시하는 돼지 머리를 갖다 놓거나 심지어 돼지고기 파티를 벌이는 무리수를 두고 있지. 아빠는 이런 경향이 1920년대 초, 갑자기 불어난 조선인들을 바라보며 마늘 냄새가 나고 불결하며 아무데나 침 탁탁 뱉는 조선인들, 그리고 ‘독립운동 한답시고 테러나 벌이고 사람을 죽이는’ 조선인들을 바라보던 일본인들의 시각과 똑같다고 여긴단다. 차이에 대한 몰이해, 그릇된 우월감, 그리고 근거 없는 공포 말이야. 돼지고기 파티가 벌어지는 와중에 어느 경북대 학생들이 이 ‘야만적인(단호하게 말한다. 이건 야만적인 일이야)’ 타 종교 조롱과 경멸을 규탄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바로 철거당했다. 그중 경북대 사범대 학생은 이렇게 외쳤다. “학생이자 예비 교원으로서 대한민국 시민, 세계 시민으로서 도덕적 책무와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 대한민국 교육자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가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평등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국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뉴스민〉 2022년 12월15일).” 이 외침을 들으며 아빠는 가슴이 더워졌구나. 100년 전 오카와 서장의 절규를 읽을 때처럼 말이다. 어쩌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횃불 같은 외침들이 끊기지 않기에 인류의 역사는 절망의 바다 속에서 희망의 섬을 찾고, 야만의 칼바람 속에서 인간의 온기를 더듬어온 게 아니겠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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