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부대는 부대 정신을 계승하고자 강원도 철원에 있는 백골상 부근에 백골공원을 조성했다.ⓒ연합뉴스
백골부대는 부대 정신을 계승하고자 강원도 철원에 있는 백골상 부근에 백골공원을 조성했다.ⓒ연합뉴스

파국적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인구절벽 문제로, 전쟁 이후 유지해온 ‘60만 대군’ 한국군의 편제도 바뀌는 중이다. 오랜 전통을 지닌 ‘메이커 사단’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기묘하게도 사라지는 부대 출신들이 많아 한동안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가 안줏거리로 올랐다. 그때 “우리 부대는 절대 안 없어진다”라며 기염(?)을 토하는 이가 있었다. 3사단 출신이었다. 이른바 백골부대.

어느 사단인들 피맺힌 사연 한 자락 없을까마는 3사단 역시 우리 현대사, 6·25 전쟁사와 깊고도 짙게 엇갈리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부대명 ‘백골’은 이 부대에 대거 입대한 서북청년단원들이 ‘죽어 백골이 돼서라도 고향을 되찾겠다’며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제주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주역이 됐던 바로 그 서북청년단 말이다. 백골부대는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오늘날 ‘국군의 날’을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학도병들을 도우러 왔던 장교 김승우의 소속 부대, 영화 〈고지전〉 속 다급한 상황에서 전우들을 사살하면서 부대원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던 포항 철수작전의 실제 주역도 3사단이었다(영화와는 달리 이 포항 철수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3사단의 경례 구호는 그 사단 명칭처럼 으스스한 ‘백골’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돌격’ 구호를 썼는데 25대 사단장 박정인 준장이 부임한 뒤 바뀌었다. 2016년 타계한 박정인 장군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함경남도 신흥 출신이었던 그는 함흥 반공 봉기에 가담한 뒤 월남해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1950년 10월 말, 박정인 당시 소령은 전투 중 포로가 되어 압록강변 평안북도 벽동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는 탈출을 감행해 남하하다가 또다시 북한군에 생포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북한군 부대의 정치군관이 전쟁 전 함흥 봉기 와중에 죽일 듯이 다퉜던 사람이다. 박정인은 두들겨 맞고 벽동 포로수용소로 재차 끌려갔지만 또다시 포로수용소 담장을 넘었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인민군을 만나면 중공군 행세를, 중공군 앞에서는 인민군 시늉을 하며 전선을 넘었다. 박정인 소령의 동료들은 그가 죽었다고 단정하고 모아둔 조의금을 선사하며 반겼다고 한다(‘박정인의 구술을 통해 본 창군과 한국전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동원 지음).

이 영화 같은 사연의 군인이 백골부대 사단장으로 재직하던 1973년 3월7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휴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이 북한 지역에 포격을 퍼붓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이날 오후 DMZ에서 표지판 작업을 하던 백골부대원들에게 총알이 날아들었다. 인민군의 도발이었다. 삽시간에 세 명이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부상병들과 1개 소대 병력은 인민군의 총격 속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보고를 받은 박정인 소장이 마이크를 들고 나타난다. “즉각 사격을 중지하라.” 그러나 인민군이 한국군 사단장의 명령을 들을 리 없었다. 사격은 계속됐다. “부상자에 구애받지 말고 과감하게 작전하라”는 군 사령관의 지시와 “환자 구출을 위해 무리하게 사격하지 마라”는 군단장의 기묘한 엇갈림(〈월간조선〉 2011년 1월호) 가운데에서 박정인 장군은 초유의 결단을 내린다. 북한의 GP를 겨냥해 사단 포병부대 화력을 쏟아 붓고 그 와중에 고립된 병력을 구한 것이다. 백골부대 내에서 이른바 ‘3·7 완전작전’으로 전해지는 사건이다.

휴전 후 최초로 ‘북한 지역’에 쏟아진 한국군 포탄으로 GP에 집결해 있던 인민군 수십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 반격을 넘어서 박정인 준장은 또 하나의 행동을 취한다. 그날 밤, 모든 군 차량을 동원하여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까지 돌진시킨 것이다. 기겁을 한 인민군은 전군 비상사태를 발동했다. 당시 비상사태에 돌입한 백골부대원들은 결사의 각오 속에서도 죽음의 공포를 곱씹고 있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출동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최전방의 우리 부대원은 모두 죽게 될 거라는 불안과 공포가 우릴 짓누르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떠오를법한 그리운 얼굴들(부모님, 형제, 친구, 짝사랑했던 여자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제주의 소리〉 ‘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휴전 이후 반복된 충돌

휴전 이후로도 한반도에서는 이렇듯 남과 북의 충돌이 계속됐다. 북한 무장 병력이 휴전선을 넘어 남한 군인과 민간인들을 살해하거나 남측의 특공대가 되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1965년 무장 공비들이 한국군 중령의 집을 습격해 일가족을 몰살시키는가 하면, 1967년에는 국군 참모총장을 지냈던 이진삼이 대위 시절 북파공작원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침투해 인민군 수십 명을 살해했다. 또한 1967년 DMZ에서 북한군 침투조가 한국군 GP를 공격하자 정봉욱 사단장이 DMZ 내 포격을 감행해 물리친 일도 있었다.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던 한반도에서 이 모두는 여차하면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불쏘시개였다. 1973년 3월7일 백골부대에서 벌어진 일도 다르지 않았다. 핏발 선 헤드라이트를 켜고 북으로 내달려오는 한국군 트럭 대열에 북한군이 대응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기도 버겁다.

한편 이 모두는 단순한 군사적 도발을 넘어선 국제적 정치 행위이기도 했다. 북한의 군사 도발 정점이라 할 1968년 1월21일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작전과 1월23일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이 발생하고 바로 며칠 뒤 베트콩은 베트남전쟁의 분기점이 된 구정 대공세를 펼쳤다. 이 사실은 우리가 겪은 군사적 충돌이 남북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 역학관계의 발현일 수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한국군 월남 파병을 용인할 수 없으며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동아일보〉 1965년 1월22일)”이라던 북한 김일성은 무수한 군사 도발로 그들의 냉전 동지들을 도왔던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른바 ‘신냉전’의 암울한 분위기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자칫하면 1960년대로의 ‘백 투더 퓨처’가 우려되는 상황. 만에 하나 중국이 타이완 침공을 현실화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중국 입장에서 타이완 방어에 나서는 미국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가장 좋은 수단은 1960년대처럼 북한의 도발을 부추기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처하는, 또 그에 앞서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할까. 역시 1960년대로 돌아가 서로 죽고 죽이는 보복과 응징의 무한궤도로 복귀해야 할까.

군인은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래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3·7 완전작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박정인 장군을 해임하고 곧 예편시켰다. 군인의 자의적 판단이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트럭 돌진’ 상황은 명령 계통을 밟지 않은 박정인 장군 개인의 보복 이벤트였던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군인이지만 이를 예방하거나 결단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의 일이다.

백골부대원들이 지금도 기념하는 ‘3·7 완전작전’ 50주년을 맞아 사뭇 궁금해진다. 과연 오늘날 윤석열 정부는 이 임무를 얼마나 무겁게 생각하고 있을까. 도발에 대한 “확실한 응징”과 “선제공격 불사”를 외치는 모습은 과연 바람직한가. 시대와 맥락이 달라진 21세기의 정부가 50년 전 박정인 소장과 같은 결기만 다지며 초전박살, 멸공통일만 되뇌는 것은 과연 정상적인 상황일까. 안 그래도 금싸라기같이 귀한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과거 냉전 시대처럼 허무하게 쓰러져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정부는 단호하기 전에, 현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자명 김형민 (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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