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국 등 거의 모든 산업국가들이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초저금리를 고집하는 중이다. 미국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연준)은 경기침체를 초래하더라도 금리인상으로 물가부터 잡으려 하는 반면 일본 중앙은행(일본은행)은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려고 절치부심한다. 일본은 왜 이럴까?
일본이 금리를 올리지 않는 이유
일본의 금리인상 거부엔 명분이 있다. 이 나라의 인플레이션율(인플레율)이 실제로 매우 낮은 편이기 때문이다. OECD에서 산출한 국가별 인플레율(소비자물가지수 기준)에 따르면, 지난 8월 현재 미국 8.3%, 영국 8.6%, 이탈리아 8.4%, 독일 7.9%, 캐나다 7.0%, 프랑스 5.9%, 한국 5.7% 등이다. 일본은 3.0%. 이 정도로 인플레율이 낮은데 금리를 왜 올려야 하는가.
이쯤에서 질문 하나. ‘일본만 인플레율이 유독 낮은 이유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다. 일본의 ‘팬데믹 규제’ 완화가 다른 나라들보다 늦어 경기회복이 본격화되지 않았다. 식량·에너지 가격의 급격한 변동을 억제하기 위한 일본 특유의 규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답변으로는 부족하다. 일본의 낮은 인플레율은 최근에 발생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부터 그랬다.
1980년대 일본은 지구 최강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역동적 국가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자산시장 거품이 붕괴되면서 ‘일본 주식회사’의 모든 활력이 빠져나갔다. 소비자들은 돈을 쓰지 않고 기업은 투자를 꺼린다. 이렇게 수요가 확대되지 않으니 물가가 오르기는커녕 심지어 내린다. 어떤 나라든 경기순환의 한 국면에선 불가피하게 겪는 일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현상이 지난 30여 년에 걸쳐 지겹게 지속되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이후 지금까지 일본의 인플레율은 줄곧 1% 주변이나 마이너스(물가하락)를 기록했다. 2014년에 단 한 번 2.5%를 넘겼으나(2.76%), 이 또한 당시의 소비세 신설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인플레율과 함께 경제성장률도 바닥을 기었다.
개별 가계 입장에서 인플레는 혐오스러운 현상이다. 국가경제 차원에선 그렇지 않다. 인플레 자체가 활력 있는 경제활동의 징후다. 이에 더해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가 ‘미래의 물가 인상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현실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경제주체들이 ‘앞으로 물가가 오른다’고 예측한다면 소비와 투자를 서두를 터이다. 지금 사는 것이 이로우니까. ‘물가가 정체되거나 내릴 것’으로 판단하면 소비·투자를 늦추게 된다(나중에 사는 것이 이롭다). 이로 인해 물가가 더욱 정체되면서 소비·투자 수준을 다시 낮추는 악순환(디플레이션)이 나타난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디플레이션이 우려되는 경우 물가 올리기를 시도한다.
그 선두에 일본은행이 있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 경향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며 새로운 통화정책들을 개발해냈다. 이 나라의 기준금리는 1995년부터 지금까지 0.5%를 넘긴 적이 없다. 이론적으로는 금리가 낮으면 수요(소비와 투자)가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수요는 요지부동이었다. 2012년 말 집권한 아베 신조 당시 총리와 그가 임명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이런 답답한 상황에 ‘폭탄’을 던졌다. 대규모 금융완화(경제주체들이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도록 돈을 푼다는 의미)로 소비와 투자를 촉진해 2~3% 수준의 인플레율을 달성하려 했다. 2016년부터는, 지금도 시행 중인 ‘특단의 조치’들을 감행한다.
특단의 조치들
첫 번째, 일본의 기준금리를 –0.1%로 내렸다. 이른바 ‘마이너스 기준금리’다. 일반 시민들이 시중은행에 계좌를 만든다면 시중은행들은 중앙은행에 계좌를 만든다. 시중은행들은 ‘중앙은행 계좌’에 예치한 자행의 돈(지급준비금)을 인출해서 민간에 빌려준다. 평상시에는 시중은행들 역시 중앙은행에 예치한 지급준비금에 대한 이자를 받는다. 그러나 ‘마이너스 기준금리’에서 중앙은행은 시중은행의 예치금(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주기는커녕 ‘보관료’를 받는다. 시중은행 입장에선 중앙은행에 1000억 엔을 예치해두면 0.1%인 1억 엔이 그냥 날아가버린다. 일본은행이 일견 황당해 보이는 이런 제도를 시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돈을 중앙은행에 맡겨두지 말고 민간에 대출해서 수요를 늘리라’고 시중은행을 압박하기 위해서다(마이너스 금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시사IN〉 제445호 ‘통화정책의 최종 버전, 마이너스 금리’ 기사 참조).
두 번째는 ‘수익률곡선 통제(YCC:Yield Curve Control)’이다. 정부가 통화량을 늘리거나(금융완화) 줄이는(금융긴축) 가장 기본적 수단은 기준금리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정책수단이 있다. 국채의 수익률을 높이거나(금융긴축) 낮추는(금융완화) 방법이다.
국채는 국가에 돈을 빌려주고 받는 증서다. 국채에는 예컨대 ‘국가가 1만원을 빌렸으니 일정한 기간 뒤에(만기에) 1만2000원으로 갚겠다’라고 기입되어 있다. 빌려주는 자(투자자)의 입장에선 1만원(국채 가격)짜리 국채를 사면 만기에 1만2000원(만기 상환금)을 돌려받아 2000원의 수익을 내게 된다. 수익률은 20%(2000원/1만원×100)이다.
그런데 국채는 만기 이전에도 사고팔 수 있다. 국채 가격 역시 수요와 공급에 따라 오르내린다. 만기 상환금(여기선 1만2000원)은 그대로다. 국채 수요 증가로 그 가격이 1만1000원으로 올랐다고 치자. 이 국채를 사는 사람은 1만1000원을 투자해 만기에 1만2000원을 상환받는다(수익금 1000원), 국채수익률은 약 9%(1000원/1만1000원×100)로 떨어진다. 국채 수요가 줄어 가격이 9000원으로 떨어졌다면? 투자자로서는 9000원으로 사서 만기에 1만2000원(수익금 3000원)을 돌려받으니 국채수익률이 33.3%로 올라간다. 이처럼 국채 가격과 국채수익률은 반비례한다(〈그림 2〉 참조).
‘국채수익률’은, 국가에 빌려주고 수익을 기대하는 투자자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다. 국가 입장에서 국채수익률은, 돈을 빌릴 때 감당해야 하는 비용(금리)이다. 국가가 빌릴 때 내는 금리(국채수익률)는 다양한 금리들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어야 마땅하다. 국가가 돈을 떼먹을 위험성은 극히 작기 때문이다. 국채수익률은 기준금리와 더불어 ‘금리들의 디딤돌’ 구실을 한다.
국채수익률이 내려가면(올라가면) 다른 금리도 내려간다(올라간다). 국채수익률을 조정하면 다른 금리들을 움직일 수 있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대량 매입하면 국채 수요 증가로 그 가격이 올라간다(국채수익률 하락). 반대로 중앙은행이 국채를 대량 매도하면 국채 가격이 떨어진다(국채수익률 상승).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에서 미국·일본 등의 중앙은행은 장기 국채(만기가 5년 이상인 국채)의 대량 매입으로 국채수익률(과 나아가 시중금리)을 떨어뜨렸다.
일본은행이 2016년 9월에 도입한 ‘수익률곡선 통제’는, ‘10년 만기 국채의 수익률을 0%에 맞추겠다’는 약속이다. 국채의 수요 하락으로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익률이 0% 이상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치자. 일본은행은 수익률이 0%로 내려갈 때까지 무제한으로 해당 국채를 사들인다. 장기 국채의 수익률(나아가 이에 영향받는 각종 장기 금리)을 낮게 유지할 터이니 민간에서는 마음 놓고 투자활동을 벌이라는 신호다.
일본은행은 ‘기준금리 –0.1%’와 ‘10년 만기 국채수익률 0%’라는 양 날개를 달고 인플레율을 높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차원의 금리인상에 따라 다시 궁지로 몰리고 만다.
일본은행의 딜레마
금리는 통화의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같은 액수의 자금도 고금리인 미국 달러로 예치하면 4% 이자가 붙는데 초저금리인 일본 엔으로 맡기면 1% 이자도 어렵다. 엔으로 가진 자산을 달러로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벌어지면서 달러 대비 엔의 가치가 급전직하했다. 올해 1월 초에는 110엔 정도면 1달러로 바꿀 수 있었다. 10월20일 엔 가치는 달러당 150엔을 돌파했다.
엔 가치 하락이 일본 경제에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다. 일본 기업은 수출품의 현지 가격을 떨어뜨려 판매량을 늘릴 수 있다. 그러나 급격한 큰 폭 하락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이 수입하는 식량과 에너지, 중간재 등의 가격이 올라 서민들을 괴롭힐 것이다. 더욱이 일본 엔은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안전자산’으로 여겨져왔다. 세계경제가 불안할 때 글로벌 투자자들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엔 표시 자산’을 매입한다. 엔이 낮은 가치의 불안정 통화로 전락하면 일본의 근본적 국익이 훼손된다.
일본은행은 딜레마에 빠졌다. 금융완화(초저금리)를 고수하면 엔 가치가 떨어진다. 포기하면 ‘디플레이션 탈출’의 꿈이 사라진다. 지난 6월, 투기세력들이 일본은행에 도전장을 내민다. 일본 국채를 대량으로 공매도해서 그 가격을 떨어뜨리려 시도했다. 일본은행은 국채를 대량 매입하며 대응했다.
일본은행은 금융완화 노선을 계속 밀고 나갈 전망이다. 10월13일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현재로서는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도 같은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10월11일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구로다 총재와 계속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규모 금융완화를 포기하면서 구로다 총재를 중도 퇴임시킬 것이라는 항간의 기대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일본은행은 ‘금융완화’와 ‘엔 가치 안정’ 사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작정일까? 금리 차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글로벌 자금이 엔에서 달러로 갈아타는 것은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일본은행이 엔 가치를 지키려면 시장과 싸워야 한다. 지난 9월22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엔 가치가 1달러당 145엔을 넘어서는 순간 일본은행이, 외환보유고에서 꺼낸 달러를 팔아 엔을 사는 외환시장 개입을 감행했다. 동아시아 금융위기 당시인 1998년 이후 24년 만의 개입이다. 평상시라면 환율 조작으로 비난받을 일이다. 경제 데이터 제공업체 CEIC에 따르면,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8월 기준 1조1769억 달러다. ‘탄알’은 비교적 풍부하다. 그러나 엔 가치 유지를 위해 항구적으로 외환보유고를 털기는 어렵다.
일본은행의 ‘복심’을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구로다 총재와 마찬가지로 철두철미한 금융완화론자인 가타오카 고시 일본은행 전 정책위원이 퇴임 직후 가진 인터뷰들이다. 그는 8월7일 〈파이낸셜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일본이 디플레이션을 끝내고 경제 체질을 바꿀 절호의 기회로 지금의 글로벌 금리인상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일본은행이 대담한 수단을 취한다면, 일본은 물가 흐름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일생에 한 번뿐인(once in lifetime) 기회다.”
가타오카 전 위원은 엔 가치 하락에 따른 선순환을 기대한다.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면 엔 가치의 하락으로 수출이 늘어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고금리인 상황에서 일본만 저금리라면, 오히려 그 차이만큼 일본의 투자 환경이 개선된다고 내다본다. 로이터와 한 인터뷰(9월6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실질금리 하락에 따라 자본 지출(투자)이 늘어나고 있다. (엔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진다면) 해외로 나간 투자가 일본으로 돌아오는 등 기업의 행동양식도 바뀔 것이다.”
엔 약세를 적극 활용해 일본 산업의 수익성과 경쟁력을 높이자는 발상이다. 인플레의 본격화로 서민층 부담이 무거워질 수 있지만, 이는 일본 경제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위한 통과의례로 간주한다. 금융완화론자들은 심지어 자국 시민들이 인플레로 충격받아 물가에 좀 더 예민해지기를 바란다. 30여 년 동안의 경기침체에서 일본인들은 ‘우리 경제에 인플레 따위는 없다’는 고정관념에 침식되고 말았다. 노동조합도 임금인상보다는 일자리 안정에 더 관심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인들의 소득은 기이할 정도로 오르지 않았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가 일본 정부의 보고서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1991년에서 2019년까지 1인당 실질임금이 미국은 41%, 독일과 프랑스는 34% 상승했지만 일본은 5% 상승하는 데 그쳤다.” 소득이 제자리걸음인데 물가가 오를 리 만무하다.
그러나 생필품 부문에서 인플레가 진행되는데 시민들의 소득이 따라 오르지 않으면 정치·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피할 수 없다. 금융완화론자들이 ‘과감한 정부지출’을 요구하는 이유다. 기시다 총리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일본에 필요한 것은 임금 억제가 아니라 임금인상이다. 기업들이 임금을 올릴 수 있도록 지원 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임금을 올린 기업에 대한 세제혜택을 의미한다.
일본에 가장 안전한 시나리오는 미국 연준의 금리인상 포기다. 글로벌 자금이 일본으로 회귀하면서 엔 가치가 극적으로 오를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리인상 흐름이 지속된다면 일본 경제는 엄청난 리스크를 지고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는 동시에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인플레를 부추기는 한편 그 부작용을 과감한 정부지출로 상쇄해야 한다. 노사관계 및 노동시장 개혁으로 경제주체들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한다.
일본은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절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강국 교수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시한다. “인플레가 임금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일본 경제의 ‘축소균형’을 깨기 위해 총대를 메야 한다. 그러나 노조와 시민사회가 임금상승을 관철시킬 만큼 강하진 않다. 정치권의 리더십도 약하다. ‘물가가 올랐으니 임금도 높아져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확산되어 나가길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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