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성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지난 6월2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임금 데이터 공개를 둘러싸고 여성단체와 기업들은 오랫동안 갈등했다. 여성단체들은 남성과 여성 사이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선 더 많은 임금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직무·직급·고용형태·근속연수 등에 따라 분류된 근로자 집단의 성별 임금 격차 데이터를 공개해야 임금 격차의 진짜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이에 반발했다. 임금 현황 데이터는 경영상 비밀이며, 사회적 위화감이 증대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포함했다. 임금 격차 현황 보고와 개선계획 수립을 의무화해 성별 임금 격차를 완화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 2019년 이름을 ‘임금분포공시제’로 바꿔 재추진 의사를 밝혔지만 끝내 실패했다. “경영계의 반발 등 이해당사자 간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임금공시제는 좌초됐지만, 그사이 의미 있는 진전도 있었다.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Affirmative Action) 제도를 통해 수집하는 정보에 근로자 임금 현황을 추가한 것이다. 2006년 처음 시행된 AA 제도는 원래 기업들로부터 직종별·직급별 남녀 근로자 현황(근로자 수)만을 수집했다. 그러다 2019년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남녀 직종별·직급별 임금 현황까지 수집할 수 있게 됐다. 성별 고용 격차와 관련해 중앙정부가 민간기업들에 자세한 고용·임금 데이터를 제출하도록 한 첫 번째 시도였다.

고용노동부 “기업들이 부담 느낀다” 

이 데이터를 통해 정부는 개별 사업장과 업종별 성별 임금 격차의 실태를 좀 더 정확하고 자세히 파악하며, 격차를 줄일 개선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각 기업은 자사의 남녀 임금 격차를 계산하고 작성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격차의 원인을 발견하고 분석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 시절 실패했던 임금공시제를 실시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었다. 임금공시제까지 이르기 위해선 수집 정보 범위를 더 넓히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방안을 찾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고용노동부는 그동안 직종별·직급별로 나눠 제출하던 성별 임금 현황 정보(맨 위)를 내년부터는 전체 남녀 평균만 제출하도록(위) 바꿨다.

그러나 이 진전은 3년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AA 적용 대상 기업들로부터 제출받는 정보의 종류를 자진해서 대폭 축소했기 때문이다. 남녀고용평등법은 각 기업이 정부에 제출해야 할 정보의 구체적인 항목과 서식을 시행규칙으로 정하도록 했다. 지난 6월3일 고용노동부는 이 시행규칙을 개정해 그동안 직종별·직급별로 나눠 제출하던 성별 임금 현황 정보를 내년부터는 전체 남녀 평균만 제출하도록 바꿨다. 2017년 발의돼 2년 가까이 걸친 법률 개정 끝에 모을 수 있게 된 데이터를 주무 부처가 스스로 포기해버린 것이다.

고용노동부의 이러한 후퇴는 성별 임금 격차 정보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관점과 연결된다. 윤석열 정부는 대선후보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임금공시제’가 아닌 ‘근로공시제’를 주장했다. ‘양성평등 일자리 구현’의 한 방안으로 채용, 근로, 퇴직 단계별 성비를 공개하기는 하되, 기업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공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임금 자료는 아예 공시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개정된 AA 서식에 따라 수집되는 기업의 성별 임금 데이터는 사실 ‘영업비밀’ 수준의 정보는 아니다. 이미 다양한 채널을 통해 수집되고 대중에 공개되어왔다. 상장기업은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공공기관은 알리오(ALIO)에, 지방공공기관은 클린아이(CLEANEYE)에 남녀 평균 임금액을 공개하고 있다. 세 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공개한 기업·기관이 약 3000곳에 이른다. 2021년 기준 2553개사를 대상으로 한 AA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수다. 

고용노동부는 이번 시행규칙 개정 취지에 대해 또다시 ‘기업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이유를 들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기업 간담회 등을 하면 기업들이 임금 자료 제출에 부담을 느낀다고 말한다. 개정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검토도 거쳤다. AA 제도는 기업의 자발적인 개선을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금 데이터 서식을 간소화했더라도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시 성평등임금격차개선위원장을 맡아 2019년 국내 최초로 서울시의 성평등 임금공시제 시행을 이끌었던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체 남녀 평균 임금 자료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성별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가 오히려 여성에 대한 불이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처음으로 실시한 이듬해, 성별 임금 격차가 높다고 지적받은 몇몇 기관이 내놓은 해법은 상식과는 정반대였다. 평균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기관들은 여성 신입사원 채용을 줄였다. 고임금을 받는 관리자 및 상위 직급 여성을 늘리기보다는 저임금을 받는 신입사원에서 여성 비중을 줄여 임금 격차를 완화하려는 꼼수였다. 다행히 서울시는 직종별·직급별 임금 정보 등 비교적 세세한 정보를 제출하도록 했기 때문에 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신 교수는 “뭉뚱그려 자료를 받게 되면 왜곡된 데이터나 잘못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상세한 데이터가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뒷걸음질과는 달리 상세한 성별 임금 정보의 수집과 공개는 전 세계적인 추세다. 각국 상황에 따라 수집하는 정보의 종류와 공개 정도는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수집 범위를 늘려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4년 유럽연합은 ‘투명성을 통한 남녀평등임금 원칙 강화에 대한 위원회 권고’에서 임금체계의 불투명성이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어렵게 한다며 임금 자료에 대한 투명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조 아래 유럽 각국은 입법을 통해 성별 임금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핀란드는 3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남녀 근로자의 임금 격차를 반영한 젠더평등계획을 매년 작성하고 이를 개별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공개하도록 했다. 프랑스는 5가지 기준에 따라 기업의 남녀평등지침 점수를 평가하며 모든 기업이 이 결과를 온라인 사이트에 공개하도록 했다.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 모습. 창구에는 여성 직원이 대부분이다. ⓒ시사IN 신선영

“임금 자료, 사업장 단위로 공개해야”

비유럽권 나라 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가 성별 임금 데이터 공개의 선도적 사례로 꼽힌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정부 산하 직장성평등청(WGEA)은 데이터 공개 사이트(data.wgea.gov.au)를 별도로 운영한다.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은 누구나 고용형태별·직급별·직종별로 교차분석한 산업별 남녀 임금 격차를 확인할 수 있다. 개별 기업에 대해선 성별 근로자 구성 비율은 어떠한지, 고용주가 임금 평등을 위한 조치를 이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일과생애연구본부 김난주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은 “한국도 AA 제도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개별 사업장 단위로 공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사이트(www.aa-net.or.kr)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산업별·규모별 평균 여성 고용률과 여성 관리자 비율, 규모별·형태별(공공기관, 지방공사 및 지방공단, 민간기업) 직급에 따른 근로자 수 정도를 공개한다. 개별 사업장 단위로 공개되는 정보도 없고, 임금 격차 정보는 더더욱 없다.

AA 제도에서 개별 사업장 단위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페널티’로만 활용돼왔다. AA 제도는 산업별·규모별 여성 고용률과 관리자 비율 평균의 70%에 미달하는 사업장에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시행계획’을 제출하도록 한다. 3년 연속 이 기준에 미달한 기업 중 시행계획에 따른 이행 실적이 부진한 기업은 ‘이행촉구등급 사업장’으로 분류된다. 만약 기업이 고용노동부의 이행 촉구에도 따르지 않는다면 해당 기업의 이름과 여성 근로자 비율, 관리자 비율을 공개한다. 그나마도 ‘시행계획의 이행을 위하여 실질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경우’ 명단 공표 대상에서 제외된다. 

결과적으로 정보공개가 이뤄지는 기업은 극소수에 그친다. 실제로 올해 ‘이행촉구등급 사업장’은 322개사로 전체의 13%에 육박했지만, 명단이 공개된 사업장은 33개사에 불과했다. 김난주 연구위원은 “정보공개를 제재 수단으로만 사용하면 투명한 정보공개와 그에 따른 여성 고용 및 임금 격차 해소를 기대하기 어렵다. 정보공개는 처벌 수단이 아니라 원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IN〉의 보도가 나간 이후, 고용노동부는 “AA와 관련한 시행규칙 개정은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추진됐던 일이다. 윤석열 정부 이전인 지난 2월 전문가 논의가 이뤄졌고, 3월에 공식 절차가 시작됐다. 기업이 제출하는 자료가 부정확해 ‘임금’을 근로복지공단에 신고한 ‘보수총액’으로 명확히 정하고, 임금 현황 보고 대상에서 단시간근로자 등을 제외해 정확성을 높이려는 취지였다. 앞으론 고용노동부에서 임금 데이터를 직접 분석할 예정이고, 관련 연구용역을 현재 진행 중이다”라고 추가 해명을 내놓았다.

기자명 주하은 기자 다른기사 보기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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