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 선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 ⓒ김흥구

스크린 너머로 영도대교가 보였다. 유난히 큰 초저녁 보름달이 다리 위에 떠 있었다. 시내버스가 둔탁한 엔진소리를 내며 다리를 오갔지만 관람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부산 중구 유라리광장에서 영화 〈아프리칸 닥터〉가 상영 중이었다. 야외 객석을 채운 관객의 연령대가 일반 상영관보다 높아 보였다. 산책하던 주민이 걸음 속도를 줄이더니 빈자리에 앉았다. 담요를 두르고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이 부산 영도의 밤 풍경을 풍성하게 했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준비한 ‘동네방네비프’의 일환이다. 부산 일대 17군데가 ‘시네마 천국’이 되었다. 같은 시각 해운대에서도 사람들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스파이의 아내〉를 봤다.

다음 날 아침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앞, 덜 마른 머리카락에 생수병을 든 사람들이 어딘가로 향했다. 피곤해 보여도 성실하게 걸음을 옮겼다. 끼니마저 거르며 하루 네다섯 편씩 영화를 챙겨 보는 ‘씨네필’의 축제, 부산국제영화제 8일 차였다. 그 틈에 누구보다 피곤한 얼굴을 한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가 있었다. 1년의 수고가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결실을 맺는다. 2008년 아시안필름마켓 실장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합류하고 2013년 영화제부터는 프로그래머로 직함을 바꾼 그에게도 올해는 특별하다. 3년 만에 정상화된 영화제이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에는 온라인 상영과 병행하며 오프라인으로는 모든 영화를 한 번씩만 틀었다. 관객 입장을 30%로 제한했다. 개막식도, 폐막식도 없었다. 2021년에는 관객을 50%까지 늘리고 개·폐막식이 부활했지만 역시 축소된 규모였다. 올해는 다르다. 객석의 100%를 채울 수 있었다. 영화 팬들의 기다림을 반영하듯 영화제 초반부터 매진 행렬이 이어졌다. ‘양조위(량차오웨이)의 화양연화’ 특별기획 참석차 영화제를 방문한 량차오웨이 배우에 대한 관객의 열렬한 반응은 당사자와 주최 측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알랭 기로디 감독을 비롯한 해외 게스트 1000여 명과 많은 국내 영화인들이 참석했다. 71개국 243편의 영화가 관객을 만났다.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는 영화잡지 〈씨네21〉 편집장 출신이다.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영화가 좋아 대학 졸업 후에 영화와 관련된 일을 무작정 ‘찔러봤다’. 지금은 사라진 영화 무가지와 격주간지 〈시네필〉에서 ‘잠깐’ 일하다 〈씨네21〉 창간 소식을 듣고 연락해 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1995년부터 시작해 14년 동안 일했다. 기자로 일한 시간과 영화제에 몸담은 기간이 비슷하다. ‘영화’라는 이력은 꾸준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영광과 위기의 순간을 함께 지나온 그를 만났다.

3년 만의 정상화라 더 각별할 것 같다.

오랜만에 영화제다운 영화제를 하게 된 것 같다. 해외에서 오신 분들도 팬데믹 이후 첫 출장이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굉장히 반가워하고 좋아했다. 영화제는 영화만 틀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다. 대면 행사를 통해 영화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올해는 그렇게 할 수 있어서 특별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주말까지는 거의 모든 영화가 매진이었기 때문에 꽤 많은 관객이 온 것 같다. 특히 량차오웨이 배우의 ‘오픈 토크’ 때 4000명 정도 참석했다. 그 행사장이 꽉 차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올해는 확실히 사람들이 많이 왔고 북적북적한 느낌이었다. 

량차오웨이에 대한 반응을 예상했나?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량차오웨이라는 배우가 세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게 드러난 것 같다. 젊은 세대가 모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최근에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영화나 〈무간도〉가 재개봉을 해서 의외로 팬들이 많은 것 같다. 또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지난해에 개봉했기 때문에 그걸 본 관객들도 있는 것 같다. 굉장히 희귀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폭넓은 세대에 인기가 있으면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전 세계에 몇 명 없다. 모실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

축소되었다가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면?

비행기값이 예전의 거의 2배다. 그 외에도 비용이 상승했는데 지자체와 정부에서 지원받는 예산은 오르지 않았다. 같은 금액으로 더 많은 행사를 하려다 보니 얼마간의 적자를 피하지 못하겠구나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올해는 성대한 영화제를 만들고 싶었다. 준비하는 동안 여전히 팬데믹이어서 애로사항은 꽤 많았다.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해외에서 입국할 때 격리 조치가 없어진 건 올해 들어서다. 초청 당시만 해도 일본은 게스트가 모두 비자를 받고 PCR 검사를 해야 했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그 약속을 잡는 것도 업무였다. (경쟁이 치열해서) 영화제 (온라인) 예매창이 열리면 모두 달라붙어 예매하듯 스태프들이 다 붙어서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나중에는 무비자로 완화되었지만 일은 일대로 했다. 부산으로 오는 직항 노선 중 없어진 것도 많다. 일본에서 오려면 인천으로 들어왔다가 김포로 가서 부산으로 오는 식이다. 나중에는 직항이 풀려서 취소하고 다시 작업해야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러시아 상공으로 날아가던 비행기들이 노선을 바꿔서 시간이 더 걸리는 상황이고, 그러다 보니 일정이 꼬여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많은 해외 게스트가 와주었고 좋은 얘기를 해주어서 기뻤다.

이번 영화제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꼽는다면?

량차오웨이 배우가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을 때 개인적으로 뭉클했다. 영화제를 하면서 이런 순간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영화제를 하는 보람이기도 하다. 나도 사인을 받았다(웃음). 기자간담회는 거의 팬 미팅 분위기였다.

10월6일 배우 양조위(량차오웨이)가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열린 영화 〈2046〉 GV에 참석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개막작인 이란 영화 〈바람의 향기〉를 최고작으로 꼽았다. 영화제가 추구해온 방향을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만들 때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모습을 발굴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세계적으로 아시아 영화가 덜 알려져 있었고 같은 아시아여도 잘 모르는 나라의 영화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나라가 이란이다. 국내 관객들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개봉하면서 비로소 이란에 좋은 영화들이 있다는 걸 안 것 같은데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런 영화를 많이 소개했다. 단순하면서 깊이 있는 이란 영화가 많다. 영화제가 추구했던 가치와 부합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바람의 향기〉를 말했다. 그걸 떠나서도 영화 자체가 좋다. 작고 느리고 화려하지 않은 영화다. 영화의 본질은 화려함이나 예산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도 아니다.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 하는 바를 얼마나 잘 전달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다.

한국 영화가 칸 영화제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기도 하고 OTT로 영화의 국가 간 경계가 희미해졌는데, 영화제의 그런 정체성은 왜 여전히 유의미한가?

그럼에도 전 세계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할리우드다. 한국에서도 미국 영화 아니면 한국 영화인 것 같다.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고 우리는 그 다양성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향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화제는 우리가 잘 몰랐던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에 이런 보석 같은 영화가 있다고, 문을 열어 보여준다. 어느 나라도 이걸 대신해주지 않는다. 아시아에 도쿄 영화제, 홍콩 영화제가 있지만 이들조차 아시아에 문호를 열고 많은 작품을 선보이기에 어려움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고 영화제라고 할 때, 돈을 많이 쓴다거나 작품 수가 많다거나 이런 걸 떠나 아시아의 다양한 영화를 소화하는 영화제라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

OTT 콘텐츠가 작년에는 세 편이었는데 올해 아홉 편으로 늘었다.

시대가 바뀌고 여러 가지가 변하면서 우리도 스스로 묻게 된다. 영화제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예를 들어 전에는 아시아라고 하더라도 부탄에서 영화가 만들어질 거라고 상상을 못했는데, 이제 부탄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 범주도 마찬가지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걸 반영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같은 드라마가 나오고 있고 또 이런 작품을 관객들이 좋아한다.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하는데 일반 영화관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팬데믹 이후로 사람들이 극장에 가기를 꺼려하는 것 같아서 다시 극장을 찾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제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온라인 영화제로 전환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거다. 영화는 집에서 혼자 보는 게 아니라 극장에서 함께 보는 매체이고 온전히 집중해서 보는 매체다. 어느 정도 회복될지 모르겠지만 영화제가 극장을 찾는 습관을 잊지 않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로 일하다 영화제로 자리를 옮기고 난 후, 매주 마감을 하다가 1년에 한 번 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감 이외의 일정은 어떤가?

출장을 많이 간다. 농사라고 얘기하기에는 운이 되게 중요해서 낚시라고 해야 하나. 미끼를 꿰서 여기저기에 던져놓는다. 누군가 물어주기를 바라면서. 량차오웨이 배우도 그중 하나다. 작년 영화제가 끝나고 회의를 하면서 어떻게 안 되겠나 이런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던져보기로 했다. 배우가 원하는 영화 여섯 편을 틀고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하려고 하는데 한번 올 수 있겠느냐고. 지난해 12월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답을 듣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니까 이게 낚시다(웃음). 어떤 영화가 걸릴지 모른다. 아무리 열심히 비료를 준다고 해도 내가 담당하는 영역에서 좋은 영화가 안 나올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복권을 긁는데 꽝이 나올 수도 있고 엄청난 게 걸리기도 한다. 그 경우 미리 자랑은 못하고 그냥 환호성을 지르면서 ‘어떻게 포장해서 보여주면 관객들이 좋아할까’ 상상을 해본다.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겠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영화를 통해, 또는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을 통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을 고른다. 예전에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그때는 내가 한국 영화 담당이었는데 홍상수 감독 영화를 왜 두 편이나 선정했느냐고, 편애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영화제는 원래 편애를 하기 위해 생긴 거라고 말씀드렸다. 다른 면에서의 형평성은 필요하지만 어떤 영화가 정말 훌륭하다고 하면 그 영화를 알리기 위해 모든 걸 한다. 말하자면 공평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정 리스트를 보고 동의해주면 기쁜 거다. 동의를 못 받으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겠지만 편애할 수밖에 없다.

영화제 개최가 불투명한 적도 있었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

역시 〈다이빙벨〉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2014년 부산시의 〈다이빙벨〉 상영 취소 요구를 영화제가 거부하자 부산시는 영화제 예산을 삭감하고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감사원에 고발하는 등 사퇴 압박을 이어갔고 2016년 영화계에서 보이콧 움직임이 일었다).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힘든 과정을 거쳐 영화제는 살아남았고 이용관 이사장도 복귀했다. 상처는 많이 남았지만 어쨌든 영화제를 지켜내긴 했다.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영화계에서 보이콧이 일고 어려울 때, 돌아가신 강수연 집행위원장과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이 그래도 영화제를 해야 한다고 믿고 그걸 위해 너무너무 애를 썼다. 영화제를 지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영화계 안에서 받은 상처도 있었던 것 같다.

외부의 적과 싸울 때 우리 모두 단결해서 한목소리를 낸다면 좋겠지만 과정에 대해 조금 안다면 상반된 입장이 있었던 것을 이해할 거다. 그 상반된 입장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루아침에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고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지석〉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내게 고 김지석 선생은 멘토였다. 프로그래머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들어와서 처음 해봤기 때문에 기댈 수 있는 분이 선생밖에 없었다. 그분 덕분에 영화제가 뭔지도 알았고 프로그래머가 할 일이 뭔지도 배웠다. 단순히 좋은 영화만 선정하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을 관리하고 영화제를 통해 어떤 가치를 지켜내고, 그런 부분이 굉장히 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분이 했던 역할을 온전히 메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시아 지역만 프로그래머 세 명이 나눠서 일을 하는데 그래도 안 된다. 흔적이 크게 남아 있고 그걸 미력하게나마 메우려고 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비롯해 지자체마다 영화제 폐지 얘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특히 지자체가 영화제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 같다. 많은 정치인이 편의적으로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하는데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10월9일 부산 서구 송도오션파크에서 ‘동네방네비프’가 열렸다.ⓒ부산국제영화제 제공

허문영 집행위원장 2년 차다. ‘허문영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굉장히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면서 영화제를 이끌고 있다. 영화제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전문적이면서 깊이 있게 파고드는 반면 저변은 넓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동네방네비프’를 기획했다. 부산 전 지역에서 영화제를 같이 즐겨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영화제가 생존하기 힘들다. 깊이 있게 하려면 특별 기획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해서 올해 일본 영화, 다큐멘터리, 량차오웨이 기획전을 했다. 두 가지 트랙이다.

수십 년간 직업적으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여전히 영화를 보는 게 좋은가?

지겨울 때가 많지만 좋은 영화를 하나 또 발견할 때, 그 기쁨이 나머지를 상쇄한다. 스무 편 보면 그중 하나가 걸린다. 그러면 계속할 수 있다. 바로 이 맛이야 하면서.

기자명 부산·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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