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스물여섯 살의 배창호는 아프리카 케냐 몸바사의 한 해변을 찾았다. 야자나무 밑에 1실링짜리 동전을 묻으며 ‘영화감독이 되어 다시 오면 찾아보리라’ 다짐했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였다. 케냐 지사로 발령이 나 참치잡이 어선 두 척을 케냐 국영기업에 판매하기도 했던 그는 이장호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귀국해 사직서를 냈다. 15년 뒤 몸바사 해변을 다시 찾았다. 10편 넘는 작품을 만든 뒤였다. 동전은 찾을 수 없었지만 감독이 되기를 갈망하던 젊은 날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의 청년이 감독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마침 그가 1995년 연출한 〈젊은 남자〉도 9월 재개봉한다. 배우 이정재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모델 지망생인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꼭 유명해질 거예요.” 지금의 이정재 배우는 물론이고, 데뷔 전 충무로를 걸으며 ‘유명해지고 싶냐’는 김승옥 작가의 질문에 냉큼 “네”라고 답하던 청년 배창호와도 겹친다. 그는 1982년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첫 장편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을 시작으로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 같은 흥행작을 잇달아 연출했다.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며 날로 ‘유명해졌고’ 미장센이 돋보이는 〈황진이〉로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994년 프로덕션을 설립해 〈젊은 남자〉 〈러브스토리〉 등을 만들었다. 총 18편, 자신의 색깔을 추구하면서도 관객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폈다.

〈배창호 감독 특별전〉을 하루 앞둔 9월14일 서울 신문로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바로 앞 건물이 공사 중이라 인터뷰 내내 쇠를 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엔 거슬리던 소음이 어느 순간 사라진 (거라 착각한) 건 그의 40년 영화 인생 이야기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만큼 몰입감이 있었다. 9월28일까지 CGV에서 그의 대표작 일곱 편을 만나볼 수 있다.

ⓒ시사IN 조남진

40주년의 소회와 특별전을 앞둔 소감은?

데뷔 50, 60주년을 맞이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분도 계신데,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시점에 작품을 한번 복기하고 그동안 내 영화를 사랑해주신 분들과 잠시나마 소통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마침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을 정리한 대담집(〈배창호의 영화의 길〉)을 내기도 해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젊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1982년에 데뷔해서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까지 관객들을 쭉 지켜봤다. 요즘 관객들은 영화를 더 세밀하고 민감하게 본다. 예전 관객들은 그렇게 민감하게 보진 않아도 더 깊이 있게 보는 면이 있다. 느낌이 다 달라서 관객들의 반응이 참 유익하다. 작년에 〈젊은 남자〉 상영회를 했는데 MZ 세대라고 하나, 젊은 세대가 많이 왔다. 28년 된 영화인데 시대가 지나 더 거리감이 생겨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이 있었다.

최근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고 각종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감독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때가 좀 늦었지만, 이제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같은 K콘텐츠를 주목하는 시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서양의 기준에 맞게 끌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있는 그대로 한국의 정서를 이해하고 고유의 개성을 인정하는 것 같다. 물론 기라성 같은 선배 감독들이 있었다. 신상옥·유현목·김수용·이만희·임권택 감독, 또 1980~90년대 이장호 감독과 나, 그리고 많은 감독들이 하나씩 쌓아 올렸고 이제 월등한 경쟁력을 갖췄다.

자신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점에서 봉준호·박찬욱 감독의 선배 격이라고, 한 칼럼니스트가 말했다.

영화는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예술 행위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생각하면 대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흥행을 말하는 게 아니라 대중과 함께 자신이 가진 세계나 인생에 대한 비유 같은 걸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한 두 감독 외에도 많은 감독들이 있다. 관객에게 좋은 위안거리를 제공하고 동시에 투자자를 만족시키고 감독 개인도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조화를 갖춘 감독일 것이다. 다만 영화가 관객들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좀 더 성찰해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내가 영화를 왜 하는지, 영화가 무엇인지 나도 뒤늦게 질문을 던졌다. 〈고래사냥 2〉를 찍고 정체돼 있다는 걸 느낀 다음, 지도를 펴고 영화의 목적지를 재정립했다. 영화에는 관객을 향한 위안, 투자자의 영리성을 뛰어넘는 문화적인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걸 또 너무 가지고 있으면 안 되겠지만(웃음).

잔혹한 걸 못 본다고 했는데 〈오징어 게임〉도 못 봤겠다.

듬성듬성이긴 하지만 대부분 봤다.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왜 이렇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나 생각해봤다. (과거에)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할 때 보편성을 많이 얘기했다. 한국적인 외양을 띠더라도 보편적인 것이 들어가 있으면 세계에서 통한다고. 이제는 외양적인 것도 새롭고 신기하면 세계의 눈에 띄는 것 같다. 또 드라마의 설정이 공감을 얻는 것 같다. 어느 세계나 양극화되어 있으니까 세계인이 공감하고 꿈꾸는 바를 잘 맞춘 것 같다. 더불어 의상과 세트 디자인에 놀랐다. 어느새 수준이 저렇게 높아졌구나….

어린 시절 영화를 많이 봤다고. 극장에 사람이 많아 기도(문지기)가 관객을 정리할 정도였다던데.

1950년대니까 전후의 가난했던 시기다. 그때는 위안거리가 영화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이 없을 때였고 나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이 보러 나왔다. 개봉관에 재개봉관, 재재개봉관도 동네에 하나씩 있었다. 좌석이 500~600석 이상 되었다. 한국 영화가 양적으로 전성기였다. 한 해 200편씩 나왔으니까.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나.

어릴 때부터 영화배우가 하고 싶었다. 조금씩 바뀌더라. 대학에 가서는 과연 한국에서 내가 배우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뭐랄까 몸짱은 아니었다(웃음). 그때만 해도 배우는 아주 개성이 있든가 주연배우는 특히 잘생겨야 하고 이런 고정관념이 있을 때다. 연극 동아리는 있어도 영화 동아리는 없었다. 8㎜ 카메라가 비싸고 대학생들 중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나도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어 카메라를 샀다.

당장 회사를 그만둘 정도의 패기가 있었으면서 막상 첫 장편 연출 때 이번에 잘 안 되면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청춘이 그렇다. 현실을 모를 때는 갈망하는데 막상 영화계에 들어와서 보면 또 다르다.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을 했고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도 했다. 나름 감독으로 가는 빠른 길이었는데 현실을 봤다. 영세한 자본과 열악한 기자재, 그리고 정부의 이중 검열,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한번 기회를 얻었는데,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보고 능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국대에서 4년 정도 학생에게 영화를 가르쳤는데 교수를 그만두며 마지막 강의에서도 얘기했다. 너희들이 힘들어질 때 영화보다 인생을 더 생각하라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는 아주 소수의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거를 샘플로 ‘오징어 게임’을 할 수는 없잖나.

〈배창호 감독 특별전〉이 CGV에서 열린다. ⓒ스튜디오보난자 제공

열악한 제작 환경이 아쉬웠을 것 같다.

1980~90년대 한국 영화에 그런 말이 있었다. ‘비슷하면 가자.’ 감독이 뭔가 막 몰두하고 있으면 뒤에서 ‘비슷하면 가지(그만 찍지), 뭐 〈벤허〉 찍어?’ 이런다. 첫 작품을 찍을 때도 한 신인 감독이 나타나서 〈벤허〉 찍는다는 소문이 났다. (공들이면) 제작비가 조금씩 올라가니까. 난 상과대학(경영학과)을 나왔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제품을 만드는데 슬렁슬렁 만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 그게 확 박혀서 오히려 좀 넘어가도 될 문제를 붙들고 있기도 했다.

이장호 감독이 민중영화를 하자고 했을 때 영화 앞에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던데.

민중문학이 역할을 하던 시기다. 나는 지금도 예술영화, 상업영화처럼 영화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게 싫다. 영화 자체에 예술성과 상업성이 있는 거니까.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인지, 혹은 귀족주의에 빠진 영화인지 그런 게 문제이지, 구분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영화는 관객을 위한 것인데, 그것이 민중으로 불리든 대중으로 불리든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에 대한 재량권이 감독에게 전적으로 있던 시절을 지나왔다.

대체적 인식이 그랬다. 제작자가 고집을 부리다가도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 낭만적이랄까,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제작자 중심의 영화로 돌아가기 시작한 게 1990년대 중반 투자회사가 들어오면서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고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제작자 중심인 미국 영화 시스템의 영향이다. 제작자들도 본인 작품이라는 생각에 입김을 더 넣고 싶어 했고 투자자도 안심이 안 되는 부분을 충족시켜야겠다 싶고. 배의 선장이 많아졌다. 영화 만들기가 아주 힘들어진 거다.

누구보다 변화를 체감했을 것 같다.

타이밍도 그랬다. (이후 만든) 〈러브스토리〉 〈정〉 〈길〉 등이 독립영화로 불렸다. 투자자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시대적인 흐름이고 그 사람들의 목적의식을 뭐라 할 수 없다. 다만 그 사람들이 이 소재를 원치 않는다고 해서 영화를 포기할 순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독립영화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어느 시기까지 여성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식의 비판이 있었다. 지금 관객에게는 낯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분명히 있을 거다.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 그 시대는 그랬구나. 그리고 감독에게 진짜 비하할 의도가 있었느냐, 차별적인 시선이 있었느냐가 문제인데…(그건 아니다). 우리도 시대에 젖어 사니까 그게 자기도 모르게 반영된다. 어떤 사람은 여성을 너무 이상화했다는 지적도 했다. 영화에 여성 주인공이 많은 편이다. 첫 작품도 그렇고 삶을 헤쳐 나가는 여성들이 나온다. 그런 내면적인 걸 봤으면 좋겠다.

흥행 감독의 대명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예술영화 감독으로 불렸다.

〈황진이〉 때문인 것 같다. ‘감독이 무엇이고 영화 언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졌고 이 영화를 통해 관념적으로 구현했다. 생각이 체화되지 못하고 살이 부족한 채 알맹이만 추출했다. 그러나 내가 밟아야 할 지점 같았다. 영화는 그때 그 시점, 감독이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투영된다. 감독이 자기 스타일을 취하느라 흥행과 멀어졌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흥행을 도외시한 적은 없다.

관객이나 영화계를 원망하진 않았나.

그런 마음도 있었다. 내가 성숙하지 못했던 거지. 자기를 먼저 돌아봐야 되는데 저 사람들이 영화를 몰라줘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받아들였어야 한다. 그런데 (다음 작품인) 〈기쁜 우리 젊은 날〉로 관객의 마음을 재확인했다. 〈황진이〉의 만듦새 문제가 아니라 대중성은 일단 스토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래사냥 2〉를 실패작으로 꼽는데.

스스로 생각할 때 게을렀다. 시나리오도 빨리 썼고 모든 게 성급했다. 당시 어떤 여학생이 아주 해맑게 웃으면서 약간 실망했다는 듯이 더 열심히 하라는 표현을 했는데 뜨끔했다. 실패했구나. 그런데 또 어릴 때 그 영화를 재밌게 봤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실패작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거지 내가 붙이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가장 아픈 손가락은 굳이 따지자면 〈흑수선〉이다.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영화다. 나나 스태프나 제작자가 굉장히 애를 썼다. 지금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1996년 작품 〈러브스토리〉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책에서도 ‘감독의 겸손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한, 이지훈 당시 〈스크린〉 기자의 평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서구의 영화제들이 좋아하는 한국형 소재가 있다. 사회를 정면으로 고발한다든지 극사실적으로 현실을 묘사한다든지, 아니면 관념적이든지. 이 영화는 평범한 이야기를 당사자들이 꾸밈없이 연기했다. 나로서도 이 얘기를 이렇게 하면 멋있겠지, 영화제에서 좋아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그걸 버리고 하고 싶은 대로 갈 때가 있다. 내가 버린 것에 대해 알아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고래사냥 2〉 〈기쁜 우리 젊은 날〉〈젊은 남자〉 〈러브스토리〉(왼쪽부터)는 배창호 감독의 주요 작품이다.

〈젊은 남자〉가 재개봉한다. 당시와 지금의 이정재 배우는 좀 다를 것 같다.

20대보다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때 연기하고는 좀 다르겠지. 당시엔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과 외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 캐릭터를 잘 이해하길래 연출을 많이 안 했다. 그런데 중간쯤 불안했는지 물어보더라. 듣기로 굉장히 까다롭게 연출하는 걸로 아는데 잘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잘하고 있다고 얘기했다(웃음). 〈흑수선〉에서는 형사로 나왔는데, 대사가 별로 없기도 하고 연기하는 데 좀 답답했을 거다.

몇 년 전 지하철에 투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차기작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나?

짧게 얘기하면 엄청난 두려움에 꽁꽁 매여 있어서 정신과 육체가 피폐했다. 석 달간 거의 못 잤고 많이 자면 하루 2시간 정도였다. 예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걸 만들 자격이 있는지, 두려움과 강박이 상당히 심했다. 일을 겪으며 스스로 믿음을 가지면 되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겨서 편해졌고 지금 다시 준비하고 있다.

휴대전화로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웃음) 나도 많이 본다. 유튜브도 많이 보고 장점이 많다. 전에는 오페라를 정장 입고 보듯 (영화는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언젠가 마주친 사람이 핸드폰으로 내 작품을 몰입해서 보기에 ‘이 시대는 그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더 잘 보려면 극장에서 보는 게 좋고 그러지 않더라도 소품 배치, 건축 요소, 음향 같은 것을 잘 볼 수 있는 조건을 좀 만들어서 보면 어떨까 싶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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