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보장을 촉구하며 갈아엎은 논에서 한 농민이 주저앉아 안타까워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트랙터가 논으로 들어갔다. 농부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봤다. 올봄에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한 논이었다. 전날까지 농부는 이곳을 찾아 허리 숙여 잡초를 뽑았다. 갈아엎기로 결심한 논인데 왜 잡초를 솎았느냐고 묻자 농부 오섭씨(36)는 “그래도 깨끗하게 보내주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트랙터에는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 대신 로터리가 달려 있었다. 논밭의 흙을 다질 때 쓰는 로터리는 앞으로 나아가며 벼를 뿌리째 뽑아 잘게 다졌다. 벼가 부러지고 쓰러지는 소리는 트랙터 엔진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논바닥에 널브러진 벼는 더 이상 낟알이 달린 황금 나락이 아니었다. 오씨는 점점 진흙 밭으로 바뀌는 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9월27일 익산시 오산면 영산리에 농민 200여 명이 모였다. 이틀 전 정부가 쌀값 폭락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쌀 45만t을 사들이겠다고 발표했으나 농민들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전국 각지에서 논을 갈아엎기로 한 일정은 변함없이 진행됐다. 마이크를 잡은 한 농부가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가을마다 논을 갈아엎어야만 정부가 쌀을 사주겠다고 선심 쓰듯 나서는 게 벌써 몇 년째인가. 근본적인 대책 하나 없이 ‘올해만, 올해만’ 하다가 결국 올해에도, 내년에도 논을 갈아엎어야 했던 게 벌써 몇 번째인가.”

2022년 ‘올해에도’ 농민들은 쌀값 때문에 논을 뒤집어엎었다. 특히 올해는 45년 만에 가격 하락 폭이 가장 크다. 통계청이 최근에 발표한 산지 쌀값은 20㎏에 4만393원이다(9월25일). 지난해 같은 시기 5만3816원에 비해 24.9% 하락한 가격이다. 반면 쌀을 생산하는 비용은 크게 늘었다. 전국쌀생산자협회에서 집계한 쌀 생산비는 200평(약 661㎡)당 지난해 52만9500원에서 올해 67만9750원으로 28.4% 증가했다. 1년 사이에 쌀값은 4분의 1 가까이 떨어진 반면 쌀 생산비용은 4분의 1이 넘게 올랐다.

농민들은 사태가 심각해질 때까지 손을 놓고 있었던 정부의 대응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원래 정부는 양곡관리법에 따라 매년 10월15일까지 ‘수급안정 대책’을 세워야 한다. 수급안정 대책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시장 격리’다. 정부가 쌀을 사들여서(해당 쌀을 시장으로부터 격리해서) 물량을 조정해 쌀값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식이다. 초과생산량이 생산량의 3% 이상이거나, 쌀값이 전년보다 5% 이상 하락한 경우 정부는 시장 격리를 할 수 있다.

문제는 법에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양곡관리법 제16조 4항). 이 조항에 따르면 정부는 ‘수요량을 초과하는 생산량 이상 또는 이하를 매입하게 할 수 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강제성이 없는 이 조항 때문에 올해 쌀값이 폭락했다고 주장한다.

쌀 소비량 30년 만에 절반 줄어

다시 작년으로 돌아가보자. 쌀값이 곧 떨어질 거라고 예상한 농민들은 정부에 미리 시장 격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급안정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기한이 가까워지자 농림축산식품부(농림부)는 2021년 10월12일 보도자료를 통해 ‘한 달 뒤 발표될 쌀 최종 생산량에 따라 시장 격리 조치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농림부 식량정책과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당시 초과생산량이 일부 발생할 거라고 예상했던 건 맞다. 그래도 쌀값이 평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시장 격리가 시행된 건 해가 바뀐 뒤였다. 정부는 올해 2월(20만t), 5월(12만6000t), 7월(10만t)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시장 격리를 시행했지만 쌀값이 떨어지는 건 막지 못했다. 지난 9월25일 발표된 45만t 시장 격리는 벌써 네 번째 추가 조치다. 정부는 ‘역대급 물량’을 강조하지만 농민들의 반응이 차가운 이유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은 시장 격리 제도를 보완하겠다고 나섰다. 신정훈 민주당 의원은 8월31일 양곡관리법 제16조 4항을 개정하자는 안을 대표 발의했다. 해당 조항의 ‘할 수 있다’라는 문구를 ‘하여야 한다’라는 강제적인 문구로 바꾸고, 최저가가 아닌 시장가로 매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올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는 ‘7대 민생법안’ 중 하나로 꼽았다.

국민의힘은 반발한다. 정부가 남아도는 쌀을 사들여서 가격을 맞춰주면, 농민들은 손해 볼 리 없는 쌀농사를 계속 지을 것이라는 논리다. 쌀 소비량은 떨어지고 있는데 쌀 공급량은 오히려 늘어날 거라는 계산이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1년 116.3㎏이었던 일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21년 56.9㎏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국민의힘은 정부가 남는 쌀을 의무적으로 사들이기보다 농민들이 벼 대신 콩·마늘·양파와 같은 대체 작물을 키우도록 유도하는 편이 더 낫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농촌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작물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농촌에서는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낫기 때문이다. 농림부에서 발표한 ‘농업기계 보유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벼농사 기계화율은 98.6%에 달하는 데 비해 밭농사 기계화율은 61.9%에 불과하다. 게다가 농민 입장에서는 품종을 넘어 작물 자체를 바꾸기로 결심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써오던 비료나 농기계 같은 밑천은 물론이고 재배법이나 병충해 예방법 등 자신이 오랜 시간을 들여 축적해온 노하우까지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농가를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마저 안정적이지 못하다. 대표적인 예시가 2018~2020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논 타작물 재배 지원사업’이다. 논에 벼 대신 콩이나 마늘 등 대체 작물을 키우는 농가에 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실제 해당 기간에 전년 대비 쌀 재배면적(18년 -2.3%, 19년 -1.1%, 20년 -0.5%)과 쌀 생산량(18년 -2.6%, 19년 -3.2%, 20년 -6.4%)은 줄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북도연맹 소속 농민들이 9월15일 전북도청 앞에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2020년부터 이 사업의 예산이 대폭 깎인 뒤 2021년에는 지원사업이 끝나버렸다. 농민들은 다시 벼농사로 돌아섰다. 그 결과 전년 대비 2021년 쌀 재배면적은 0.8% 확대되고 쌀 생산량 역시 10.7% 증가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는 “정부 정책이 꾸준하지 못하면 농민은 다시 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가장 자신 있게 지을 수 있는 게 벼농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농민들은 수시로 바뀌는 농업정책을 신뢰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익산에서 만난 농부 최정규씨(53)는 “솔직히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되어도 불안하다. 정부가 한번 약속했으면 뚝심 있게 쭉 밀고 나가야 하는데 정권이 바뀌면 법도 다시 바뀌는 게 아닌가”라며 걱정했다.

농민들 입장에서 정부가 한 약속 중 가장 크게 후퇴한 부분은 쌀 수입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쌀 시장 개방은 없다고 단언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쌀 관세화(국내산 가격과 차이 나는 만큼 관세를 내는 조건으로 쌀 수입을 허용하는 것)를 10년 유예하는 대신, 평균 국내 소비량의 1~4%까지 수입 쌀을 의무적으로 들여오기로 했다. 당시 전면적인 관세화를 통해 수입이 완전히 개방된 농작물과는 다른 특별대우이기도 했다.

“정말 농민이 잘못한 것인가”

‘쌀 예외주의’는 10년 뒤 다시 한번 연장됐다. 하지만 2014년 9월 정부는 결국 쌀 관세화를 선언하고 2021년 수입 관세율을 513%로 확정했다. 다만 이전에 두 차례 관세화를 유예한 점을 고려해 해마다 5%의 낮은 관세율로 쌀 40만8700t을 들여오기로 했다. 이 물량이 바로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이다. 한마디로 TRQ를 넘어서는 수입 물량만 관세 513%를 적용할 수 있는 셈이다.

농민들은 가뜩이나 줄어든 국내 소비량을 TRQ에 빼앗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즉석밥 점유율 1위 기업인 CJ제일제당은 지난해 4월 새롭게 내놓은 컵밥 제품 7개에 미국산 쌀 23%를 섞어 쓰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지난 9월23일 CJ제일제당 본사 앞에 모여 수입 쌀 사용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날 한 참가자는 “정부는 국민들 쌀 소비가 줄어 쌀이 남아돈다면서 농민들에게 쌀농사를 포기하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국내산 쌀로 이미지를 얻은 기업은 슬그머니 수입산 쌀로 바꾸고 있다. 정말 농민이 잘못한 것인가”라고 말했다.

농업 전문가들은 정부가 쌀 소비자와 쌀 생산자 간 싸움을 부추기지 말고 일관성 있는 장기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소비자가 쌀을 안 먹기 시작한 지 20~30년이 됐는데 언제까지 소비자 탓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쌀농사를 짓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국내 식량자급률 수치만 봐도 우리에게 남은 건 쌀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모든 물가가 오르고 ‘밥상대란’이 일어나도 정작 밥값만은 그대로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가 말했다.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의는 단순하지 않다. 쌀값 폭락에 대한 대책을 넘어서, 다가오는 식량 위기 시대에 대한민국 사회가 주식을 안정적으로 수급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비용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한 국가가 해외에 의존하지 않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지표로 흔히 언급되는 식량자급률은 1999년 54.2%에서 2019년 45.8%로 하락했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 중 쌀 자급률은 92.1%로 유일하게 국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이다. 밀(0.7%)이나 옥수수(3.5%), 콩(26.7%)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기자명 익산·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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