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뿌리 깊은 노조 혐오는 그들이 금이야 옥이야 여기는 ‘사실 보도’도 내던지게 만든다. 이런 태도는 ‘기사를 삭제할 순 있어도 사과하거나 기록으로는 남겨놓지 못하겠다’는 적반하장식 대응으로까지 이어진다.
지난 6월30일 〈한국경제〉는 “[단독] 쿠팡 노조, 본사 점거하고 대낮부터 술판 벌였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쿠팡물류센터지회 조합원들이 6월23일부터 물류센터 폭염 대책 마련 등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서울 잠실 쿠팡 본사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국경제〉가 ‘노조가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한 것이다. 〈한국경제〉 기사에는 노조원들이 둘러앉아 캔 음료를 마시는 해상도 낮은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사진 속 캔 음료는 커피로 밝혀졌다. 보도 당일 쿠팡물류센터지회는 해상도 높은 당시 현장 사진을 공개했다. 캔에 담긴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 함께 곁들일 추러스가 놓여 있는 사진이었다. 쿠팡물류센터지회는 “〈한국경제〉 기사에 실린 사진의 화질이 흐려 기사를 읽는 사람이 직접 캔의 정체를 판단하지 못하게 한 점은 기사의 의도가 노조 투쟁 음해임을 알 수 있게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다음 〈한국경제〉가 취할 수 있는 액션은 다양했다. 맥주라고 믿었던 근거와 취재 내용을 밝히는 일, 노조와 협의해 가능한 데까지 기사를 수정하는 일, 사실이 아님을 알고 사과하는 일. 하지만 그들은 침묵했고 결국 소송까지 갔다. 공공운수노조가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해 기사 삭제와 정정 보도문 게재를 요구했으나 〈한국경제〉는 ‘기사 삭제는 가능하지만 정정 보도문은 게재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합의가 안 되자 언론중재위원회는 ‘기사 삭제’ 직권조정 결정을 내렸는데, 공공운수노조에서 이의 신청을 했다.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절차상 이의 신청이 접수되면 법원에 자동으로 소가 제기된 것으로 본다.
정정보도 인색한 언론이 신뢰도 갉아먹어
정정보도를 하느니 아예 기사를 삭제하겠다는 그들의 자존심이 허탈할 뿐이다. 오보를 내고도 아무런 사과나 해명도 없이 스윽 삭제해버리는 일이야 하루이틀 된 게 아니지만, 이런 몇몇 언론의 태도가 한국 언론 전체의 신뢰도를 갉아먹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목표가 ‘노조 흠집 내기’라면 기사가 나오자마자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이를 바로잡기는 매우 어렵다. 언론 보도 피해 당사자는 몇 배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오보를 낸 당사자는 당당하게 나온다.
오보를 내면 발생 원인을 밝히고 사과하도록 의무로 규정하면 해결될까. 정정보도 요청을 받으면 바로 ‘정정보도 청구받은 기사’라고 표시할 수 있도록 의무로 규정하면 해결될까. 언론 자유를 생각하면 쉽게 도입할 수 없다. 지난해 언론중재법 국면에서 논란이 된 내용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한국 언론이 틀린 점을 인정하고 정정보도를 내는 데 인색했기에, 무언가 하지 않으면 재발될 게 뻔하다. ‘삭제는 하지만 사과는 못한다’는 적반하장에 유효타를 날릴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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