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내권 전 기후변화대사는 정부와 기업 비판을 넘어, ‘탄소 가격 지불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시사IN 조남진

정내권. 평생 외교관으로 살았다. 그를 설명하자면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필요하다. 그의 이력은 1991년 당시 외무부에 처음으로 생긴 과학환경과 초대 과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 시작한다. 대미외교와 통상외교가 주류이던 시절 ‘출셋길이 막힐 텐데’라는 소리를 들으며 부처 내 유일한 환경 외교관이 되었다. 이후 1992년 리우부터 2015년 파리까지 기후위기 국제회의 현장을 누볐다. 전 세계가 직면한 기후위기 앞에서 한국이 어떤 경로를 거쳐왔는지 그보다 잘 꿰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의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해 그가 남긴 ‘성과’는 하나하나 모두 중요하다. 좀 길지만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보자. 2000년 헤이그 기후변화협약에서 그는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개도국)도 ‘탄소배출권’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펼쳐 5년 뒤 국제사회가 이를 채택하도록 했다. 탄소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상품처럼 매매하는 이 제도는, 기업과 국가로 하여금 탄소 배출을 줄이도록 압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15년 한국에도 거래시장이 개설되었다.

공적 예산을 투입해 만든 환경기술을 국가 간 장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제공하게끔 하는 ‘공공소유기술 이전’ 제도도 그가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보고서 작성 팀에 합류하기도 했다. 보고서 작성에 기여한 공로로 2007년 IPCC가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개인 사본을 수령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2008년에는 외교부의 초대 기후변화대사가 되었다.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을 유엔에서 처음 공론화한 것도 그다.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총회를 앞두고는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놓고 전쟁이 벌어졌다. 선진국은 개도국을 향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자신들 수준으로 맞추라고 요구했고, 개도국은 “기후위기에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선진국이다”라며 반발했다. 그해 4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주요 경제국 기후변화포럼’에서 정내권 대사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각 나라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스스로 감축 목표치를 설정하는 ‘자발적 온실가스 감축 국제등록부’를 설치하자고 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있던 한국의 외교관이 내놓은 이 제안은 여러 나라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이 채택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가 바로 이 아이디어를 기초로 했다.

현재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 재단’ 이사를 맡고 있는 정내권 전 대사는 최근 자신의 환경외교 기록을 정리한 〈기후담판〉이라는 책을 펴냈다. 기후 의제를 두고 지난 30여 년 동안 선진국과 개도국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어떻게 파고를 헤쳐왔는지 생생하게 기록했다(39쪽 상자 기사 참조).

그와의 대화는 지하철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자가용을 거의 타지 않는다. ‘BMW(Bus·Metro·Walking)’를 이용한다. 주요 지하철역에 에스컬레이터와 승강기가 얼마나 설치돼 있는지, 계단은 몇 개인지 훤히 꿰고 있다. 인터뷰 날에도 지하철역에서 〈시사IN〉 편집국까지 걸어온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지금 지하철이 적자라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왜 지하철 때문에 줄어드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계산 안 하나요? 한국거래소에서 거래되는 탄소배출권 가격이 지금 t당 2만9000원이에요. 이걸 계산하면 지하철은 흑자예요. 이익 본 만큼 투자해서 에스컬레이터와 승강기를 역마다 전부 설치해야죠. 싸이 열풍의 상징인 강남역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이 유모차를 들고 42개 계단을 올라가는 걸 직접 봤어요. 광화문역에는 155개짜리 계단이 있어요. 반면 도쿄는 완벽해요. 공항에서 호텔 입구까지 트렁크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이런 데 투자하는 게 탄소중립에 투자하는 거예요.”

기후위기의 눈으로 지하철 문제를 보셨네요.

지금 우리나라 교통혼잡비용이 연간 68조원입니다(2018년 기준). 국방예산보다도 많아요. 저는 수도권과 강원도 구석구석까지 GTX와 KTX가 연결되면 탄소중립이 실현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못하냐. 예비타당성조사 때문에 그렇죠. 거기에는 탄소 배출 관련 가격이 포함되지 않았거든요. 탄소 배출량을 계산하면 KTX는 어디든 다 흑자일 겁니다.

독일 고속열차에서는 이용자들이 탄소 가격을 따로 지불할 수 있다고요?

티켓의 원래 가격이 50유로라면 60유로, 70유로를 내고 ‘클린에너지’ 티켓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돈을 모아서 재생에너지를 구입하는 겁니다. 우리도 이런 아이디어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기를 먹을 때 정상 가격이 2만원이라면, 2만5000원짜리 탄소 가격을 제시하는 거예요. 원하는 이가 그 고기를 사 먹으면 이게 전산 시스템에 등록되게 하는 거죠. 그럼 한전이 재생에너지를 구매하는 비용으로 쓰입니다.

2007년 정내권 전 기후변화대사가 받은 노벨평화상 개인 사본. IPCC 보고서 작성에 참여해 IPCC의 노벨상 수상에 기여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탄소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레타 툰베리 같은 환경운동가들이 그동안 정부와 산업의 책임을 추궁해왔잖아요. 그런데 왜 세상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바로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후위기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잖아요. 정부와 기업을 비판하는 걸 넘어 이제는 자발적으로 탄소 가격을 지불할 테니 깨끗한 전기를 달라는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이런 이들이 늘고 있다고 봅니다. 〈시사IN〉의 올해 초 여론조사에서도 ‘재생에너지 도입으로 전기료가 두 배 이상 올라도 감수할 수 있다’라는 응답층이 절반 가까이 있었잖아요(〈시사IN〉 제747호 ‘2022 대한민국 기후위기 보고서를 공개합니다’ 기사 참조). 기후위기에 관심이 많은 BTS의 팬덤 아미 같은 이들이 이런 운동에 참여하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요?

앞으로 ‘자유시장’ 체제가 아니라 ‘지속가능 시장’ 체제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자유시장’은 물과 공기를 공짜, 즉 자유재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탄소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죠. 시장가격을 결정하는 데 탄소 배출, 삶의 질 등 환경적 요소를 반영한 시장이 ‘지속가능 시장’입니다.

지속가능 시장 체제에서는 여러 기준이 바뀌어야겠군요.

국가별 탄소 배출량 계산도 그래요. 지금은 생산을 기준으로 합니다. 즉, 어느 나라가 얼마나 탄소를 배출했는지만 따지죠. 그런데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모두 중국에서 소비되나요? 아니죠. 다른 나라로 수출하잖아요. 중국 제품을 미국과 한국이 샀다면 그건 소비한 쪽에서 탄소를 배출한 걸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유럽이 탄소 배출을 많이 줄였다고 하지만 소비 기준으로 보면 줄인 게 별로 없어요. 공장만 내보냈죠. ‘탄소 유출’을 한 거예요. 이 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도 제철소·조선소를 중국으로 보내버리면 된다는 논리가 되는 거예요.

“탄소 있는 곳에 세금 있다”라면서 탄소세 도입도 주장했습니다.

석유 같은 화석연료에 탄소세를 부과해 가격을 올리면 재생에너지 수요가 늘어나면서 에너지 전환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조세저항 때문에 세계 어느 정치지도자도 손을 못 대는 문제죠. 그런데 OECD에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생태세제개혁(Ecological Tax Reform)을 통해 탄소세를 논의했어요. 탄소세를 내는 만큼 소득세(기업은 법인세)를 줄여준다는 게 핵심입니다. 같은 총량의 세금을 걷는데 왜 굳이 세제개편을 하느냐? 사람들이 생산과 소비를 저탄소 패턴으로 바꾸게끔 유도하는 거죠.

책을 보면서 가장 놀란 건 기후위기 관련 국제 협의체의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게 제일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치적 구속력은 있을지 몰라도 법적 구속력은 없어요. 2015년 파리기후협정 제15조가 ‘목표치 이행이 용이하도록 지원하고 투명하며 비적대적이고 비처벌적으로 운영한다’예요. 어떤 처벌이나 범칙금 조항도 없어요.

지난 7월 시베리아 기후관측소를 방문한 정내권 전 기후변화대사.ⓒ정내권 제공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를 직역하면 ‘각국이 스스로 결정한 기여’예요. 서약도 아니고 ‘기여’입니다. 제가 2009년 4월 미국 주요 경제국 기후변화포럼에서 제안한 ‘자발적 온실가스 감축 국제등록부’ 아이디어는 원래 개도국만을 대상으로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참여하게 된 거죠. 결국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하향평준화됐어요. 아쉬운 일입니다.

환경 외교관으로서 한계를 느꼈겠습니다.

제가 결국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각국 정부와 산업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탄소 가격을 지불하는 지속가능한 시장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NDC 말고 ‘PDC(Pers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라는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개인의 자발적 탄소 가격 지불 운동’을 뜻합니다.

과소비 문화도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큰 자가용을 타고, 대형 가전제품을 쓰는 나라입니다. 소비 부문에서 1인당 생태발자국(한 사람의 일상생활이 자연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수치화한 것)이 일본이나 유럽을 추월한 지 오래예요.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어독문학과)가 독일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뜨개질을 한다더군요. 내가 입을 옷은 내가 만든다, 소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즘 기후위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탈성장’을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제가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가 환경운동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습니다. 경제성장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기후위기를 풀어가면 성장하고 고용도 창출된다’고 말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이었습니다. 탈성장 담론에 관심 있는 분들은 그쪽을 연구하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성장하고 고용을 창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신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성장을 하자는 겁니다.

최근에 시베리아에 다녀오셨다고요?

시베리아 온도가 과거에 비해 4℃ 올랐어요. 동토가 녹으면서 땅속에 있던 메탄가스가 나오고 있어요. 라이터를 땅에 대고 켜면 메탄가스 때문에 불이 붙어요. 심각해요. 이산화탄소보다 메탄가스가 훨씬 온난화를 가속화하거든요. 이제는 정말 미래를 위한 담판이 시급합니다. 생활방식을 바꾸고, 경제체제를 바꿔야 합니다.

 

진짜 ‘기후악당’은 누구인가

‘버드-헤이글(Byrd-Hagel) 결의안’이라는 게 있다. 1997년 교토의정서 협상을 앞두고 미국 상원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중국, 인도 등 주요 개도국이 미국과 동등한 법적 의무를 수락하지 않는 한 미국 정부는 기후협약의 어떤 의무도 지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정내권 전 기후변화대사는 저서 〈기후담판〉에서 “1991년 이래 기후변화 협상이란 한마디로 전 세계가 미국 상원의 ‘버드-헤이글 결의안’ 하나와 싸운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강력한 기후체제를 염원했던 국제사회가 결국 각국의 ‘자발적 감축’으로 타협하게 된 데에는 이처럼 미국의 책임이 컸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 총회가 개막한 2009년 12월7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환경단체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총회는 구속력 있는 체제를 구축할 마지막 기회였다. 2004년 러시아가 교토의정서를 비준한 것을 계기로 선진국에 대한 의무감축체제 출범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2007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기후위기를 ‘우리 시대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도 기후협상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높은 기대감 속에 코펜하겐 기후변화총회에는 참가자 5만명이 운집했다.

코펜하겐에서는 미국과 중국, 양대 강국이 세게 맞붙었다. 당시 중국은 2020년까지 2005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 40~45% 감축 목표치를 발표하는 등 협조적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중국의 목표치를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나서면서 협상이 삐그덕거렸다. 중국은 개도국의 감축 목표치가 자발적인 만큼 이는 주권 침해라고 반발했다. 당시 미국 의회를 주도하는 공화당은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승인해주지 않고 있었다. 감축 목표치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미국이 오히려 중국에 검증 공세를 취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정내권 대사는 당시 코펜하겐에서 중국의 기후변화 장관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검증을 거부하기보다는 조건부로 수용 의사를 밝히면 어떨까요? 미국이 IPCC의 제시대로 1990년 대비 25% 감축 목표치를 수락하면 중국도 검증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입니다.” 중국 장관은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며 좋아했지만, 실제 제안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중국공산당이 ‘수용 불가’ 원칙을 못 박았기 때문이다. 결국 코펜하겐 총회는 중국에 대한 비난으로 뚜렷한 성과 없이 마무리되었다.

정내권 대사는 “기후협상 역사에서 코펜하겐의 이 장면이 두고두고 가장 아쉽다”라고 말했다. 중국이 미국의 감축 목표치 수락을 지렛대로 삼았다면 이후 협상의 흐름이 변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대해서는 법적 구속력 있는 감축을, 개도국에 대해서는 국제적 검증을 받는 기후체제 구축으로 협상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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