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원으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김귀삼씨. 그는 광주 치평동에서 나고 자랐다. ⓒ시사IN 이명익

소심한 성격을 바꾸고 싶었다. 1975년 6월, 스물두 살이던 김귀삼씨(69)가 특전사에 지원한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특전사 대원들이 베레모를 쓰고 다니는 모습도 부러웠다. “멋있잖아, 젊은 시절에.” 김씨가 베레모를 쓰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의 옆머리는 여전히 군인처럼 바짝 짧았다.

제3공수특전여단(3공수여단)으로 배치된 김씨가 처음 참여한 작전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었다. 1공수여단이 결사대를 꾸려 판문점에 들어가고 그가 속한 3공수여단은 후방에서 대기했다. “손톱이랑 머리카락을 잘라서 봉투에 넣었어요. 만약 내가 죽으면 그걸로 장례를 치르는 거야. 그때 다들 ‘우리가 전쟁 나면 이런 존재구나’라는 걸 실감했죠. 한번 쓰고 나면 없어질 용병이라는 걸.” 그는 1979년 10월 부마항쟁, 10·26 사건, 12·12 군사반란까지 굵직한 현대사마다 현장에 투입됐다.

당시 공수부대원은 최소 4년 동안 복무해야 했다. 여기에 교육 기간 7개월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때는 하사관을 뽑으면 늘 모집 미달이었거든. 4년7개월이 지나도 복무 기간을 연장하라고 압박을 많이 줬죠.” 원래대로라면 김씨도 1980년 1월에 군을 떠날 수 있었지만 복무 기간을 연장했다. 잠시 침묵하던 김씨가 말했다. “그래서 5·18을 보게 됐지.”

1980년 5월 당시 김씨가 속한 3공수여단 12대대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지키고 있었다. 광주로 투입된다는 말을 들은 건 5월19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7개월 전 부마항쟁이 스쳤다. “부산처럼 시위가 났구나, 이거 큰일났다 싶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부마항쟁에 가서 진압을 했잖아요. 광주에서도 똑같이 할 텐데, 그곳에서 형이나 동생을 마주치면 어쩌나, 마음이 굉장히 무겁더라고요.” 광주 치평동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집 앞 운천저수지 풍경을 떠올렸다. 여름에 물이 빠지면 바지를 걷고 들어가 우럭을 잡고 겨울에 수면이 얼면 썰매를 탈 수 있는 곳이었다. 저수지에서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의 얼굴도 차례로 떠올랐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야간열차가 5월20일 새벽 광주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광주 가까이에 있는 전남 담양에도 11공수여단이 있어요. 전북 익산에도 7공수여단이 있고. 그런데 왜 우리 3공수여단까지 보내는 걸까. 답은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초기 진압에 실패했구나.”

3공수여단은 전남대학교로 이동해 야영지를 마련했다. 오후에 광주역 오거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낮에는 조용하던 거리가 밤이 되자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5월18~19일 날 시민들이 무지하게 당했던 거예요. 가족이나 친구가 공수부대한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악에 받칠 수밖에 없지. 대체 누가 백주대낮부터 몽둥이질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까요. 군인은 국가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인데.”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계엄군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전남도청으로 연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민군은 ‘폭도’, 붙잡혀온 시민은 ‘포로’

시위대 쪽에서 날아오는 돌멩이 속에서 그는 형과 동생의 얼굴을 찾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시간이 갈수록 대치는 격렬해졌다. “잡히면 죽겠구나 싶었어요. 시민군이 우리한테 잡혀도 죽고 거꾸로 우리가 시민군한테 잡혀도 죽고.” 동료 시민이 군인에게 폭행을 당해 처참해진 모습을 본 시위대는 물러설 수 없었다.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도 물러설 수 없었다. “우리가 늘 외치는 구호가 ‘일기당천 초전박살’이었어요. 한 명이 1000명을 당해내려면 단기간에 박살을 내버려야 한다는 거야. 그런 훈련을 받은 군인들한테 시위 진압을 시킨다? 발상 자체부터 잘못됐지. 공수부대의 적은 북한군이지, 시민들이 아니잖아요. 전투경찰하고 지역 향토사단만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커질 일은 아니었어.”

당시 공수부대원은 시민군을 ‘폭도’, 붙잡혀온 시민을 ‘포로’라고 불렀다. 김씨가 속한 특공중대 12명은 ‘포로’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공수부대원은 끌려온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리쳤다. 당시 선임 하사관(중사)이던 김씨가 “어차피 도망 못 가니 때리지 말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이미 흥분한 부대원들에게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시민들의 얼굴은 피범벅이 됐다. 구타를 말리던 그의 입에서 어느 순간 고함이 튀어나왔다. “차라리 죽여라 이 새끼들아, 그렇게 때릴 거면 다 죽여버려.” 그래도 여전히 곤봉은 멈추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던 김씨는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시 입을 열기 전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리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일종의 극적인 연출을 하더라도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꿔서 내 눈앞에서만은, 우리 중대 안에서만은 폭행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서….”

그는 자신의 총에 대검을 꽂았다. 그 칼로 쓰러져 있던 한 시민군을 찔렀다. “소심한 녀석이 성격 좀 바꿔보겠다고 군대에 들어왔던 건데. 아직도 못 잊고 살아, 칼이 살에 쑥 들어가는 그 느낌. 만약 우리 형제들이, 친구들이 광주에 없었다면 그런 행동도 안 했을 거야. 어떻게든 분위기를 반전시켜서 더 이상 몽둥이질을 안 보고 싶었던 거였는데….” 칼을 빼니 피가 흘렀다. “군인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데 국민이나 찔러야 되고. 북한군을 향해서 찌르면 또 모르겠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항상 궁금하지. 그분이 살았을까 죽었을까. 5월이 되면 그 생각을 자주 하지.”

‘포로’ 중에는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도 있었다. 김씨가 그들을 불렀다. “너네 왜 잡혀왔어?” “진짜 모르겠어요.” “그럼 왜 나와 있었어?”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오니까 구경하러 따라 나왔어요.” 죄 없는 학생들이었다. 그는 학생 세 명을 담 너머로 몰래 내보내주었다. 그중 한 명에게 광주 집 전화번호를 휘갈겨 적어주면서 “여기다 전화해서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학생은 풀려난 그날 밤 김씨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튿날 김씨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전남대학교를 찾아왔다. “와서 보니까 전남대 정문 앞에 피가 낭자하더래. 어머니가 맥이 탁 풀려서 거기 주저앉아버리셨어요. 계엄군 나간 놈도 내 아들이고 시민군 나간 놈도 내 아들인데 이게 누구의 피인지, 아주 통곡을 하셨다더라고.” 김씨의 어머니는 스물아홉 살에 남편을 잃고 홀로 5남매를 키웠다. ‘귀한 셋째’라는 뜻에서 이름을 ‘귀삼’이라고 지은 셋째 아들은 계엄군에, 나머지 첫째·둘째·넷째 아들은 시민군에 가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민군에 참여한 김씨의 동생은 전남도청이 진압되기 직전 빠져나왔지만 헌병대에 붙잡혔다. 상무대 영창으로 넘겨진 김씨의 동생은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가 한동안 실종자로 분류돼 있었다. “집에 와서 보니까 동생이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저 폭행도 내 전우들이 한 거 아니야. 동생한테 참 미안하지. 나한테 그러더라고. ‘형, 내가 삼청교육대에서 미친 척하면 병원에라도 보내줄까 싶어서 똥도 먹어봤다’고.”

5월21일 오후 3공수여단 12대대는 광주교도소로 이동했다. 김씨는 전날 끌려온 ‘포로’ 중 숨진 사람들을 전남대학교 뒷산에 묻고, 나머지 생존한 이들을 군용 트럭에 태웠다고 기억했다. 보통 양쪽으로 5명씩 총 10명이 앉아 타는 트럭인데, 70~80명씩 밀어 넣고 천으로 입구를 덮었다. “그 안에 최루탄을 한 발씩 던져 넣었어요. 이동하는 중에 뛰어내려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고. 도착해서 사람들을 내리는데 시신이 여럿 나왔대요. 출발할 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인데. 그때 트럭에서 시신을 내리던 전우들은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려. 아주 잔인한 모습이었다고 하더라고. 그때 딱 이 생각이 들었어요. 이 나라 정권은 말 그대로 피를 먹어야지만 세워지는구나.”

광주교도소에서 실탄을 지급받고 경계근무를 서던 3공수여단 12대대는 5월24일 광주 송정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저도 전우들도 이런 시위 진압작전에 동원될 때마다 ‘빨리 진압하고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동안에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국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국가를 위해 명령에 따랐던 군인들을 이렇게 이용한 거야.” 수송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는 이번 작전은 실패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1981년 3월 김씨는 제대했다. “군대 생활 잘 마치고 왔다는 건 내 생각이야. 소식을 들은 마을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으로 쫓아왔어. 내 멱살이며 허리춤을 막 잡으시는 거야. 그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턱을 앙다문 김씨가 잇새로 한 토막씩 끊어 말했다. “니가, 고향 사람들을, 죽이러 왔었다매?” 그는 마을에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나마 그의 숨통을 틔워준 건 5월20일 밤 광주역에서 살려준 고등학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학생이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나 봐요. 내가 돌아왔는지 확인하려고. 알고 보니 학생이 광주로 유학을 온 귀한 아들이야. 그 부모님이 내가 생명의 은인이니 꼭 모시고 와야 한다고 아들한테 신신당부를 했대요.” 학생의 고향은 전남 완도에서 배로 한 시간 걸리는, 백일도라는 작은 섬이었다.

“1981년 여름이었어요. 7월인가, 섬 선착장에 내리니까 웅성웅성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라고. 학생 부모님이 정말이지 극진하게 대접을 해주셨어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고. 그날 섬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배를 타고 나오는데, 5월에 있었던 일이 마치 필름 돌아가듯 생각이 나요. 그때 내 정체성은 뭐였을까. 계엄군이었나 시민군이었나.”

제3공수특전여단에서 복무했던 김귀삼씨의 모습. ⓒ김귀삼씨 제공

광주에서도, 서울에서도 배척받는 신세

그러나 그는 여전히 광주에서 ‘계엄군’이었다.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보이지 않자 큰형이 그에게 서울에 가서 살라고 권했다. 스물여덟, 그는 고향에서 쫓겨났다. “누군가 나에게 광주에 대한 심정을 묻는다면 거꾸로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 고향을 잃어본 적 있냐고. 제가 여느 젊은이처럼 ‘출세해서 돌아올게요’ 하고 제 발로 고향을 떠난 게 아니잖아요.” 서울에서는 거꾸로 광주 출신이라고 갖은 모욕을 당했다. 고향을 밝히면 “당신 빨갱이야?”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고향에서도, 타지에서도 배척받는 혼란스러운 삶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2021년 10월26일 노태우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해 11월23일에는 전두환씨가 숨졌다. 끝까지 5·18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김씨는 실망했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대신 사과하는 게 예의잖아요. 마찬가지로 자기 부하들이 광주에서 무리하게 시위 진압을 했다면 상관이 사과하는 게 옳은 일이에요. 자신이 명령을 내렸든 안 내렸든 어쨌든 자신의 책임이니까. 이런 사과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목숨을 바쳐 충성했었나, 좀 창피하더라고요. 판결은 판결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용서를 구했다면 우리 대원들도 용서를 빌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냥 방치해버린 거죠.”

지난 3월 김씨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당시 상황을 증언해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거절했지만 차차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살아왔잖아요. 후배들이라도 좀 더 밝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특전사 후배들은 아직도 광주에서 베레모를 못 써요. 진정한 가해자는 5·18을 이용해서 출세하고 권력을 잡은 신군부 지휘자들인데.” 그는 조사위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5월 중순에는 최면 기법을 이용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조사가 끝난 뒤 조사관이 두 시간 내내 휴지로 그의 눈물을 닦아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김씨는 언론 인터뷰에도 응했다. 3공수여단 12대대 동료들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대화방에 자신이 나간 방송 영상 링크를 올리기도 했다. 응원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아픈 상처를 왜 굳이 건드리냐’라는 반응도 있었다.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하는 지만원씨를 추종하는 후배도 있었다. “그 후배가 ‘우리는 광주에 가서 북한군과 전쟁을 하고 온 거지 시위 진압하러 간 게 아닙니다’라고 하는데 저는 광주 현장에 있으면서 무장한 북한 군인을 본 적도 없고 교전해본 일도 없어요. 그건 사실과 다르지. 차라리 광주에서 북한군하고 총격전이라도 했으면 속 시원하게 당당하기라도 했을 텐데.”

5월19일 김씨를 비롯한 당시 계엄군 2명과 5·18 피해자 가족 10명이 만났다. 김씨는 피해자 가족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늦었지만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당시 너무 심했습니다.” 그는 한 어머니가 용서를 구하는 자신을 끌어안아주면서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분께서 ‘용서해주고 싶어도 용서할 상대가 없었다, 당신도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내려와서 고생했는데 우리도 피해자이지만 당신도 또 다른 피해자라는 걸 알고 있다’ 하시더라고요. 완전히 충격이었어요.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42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기당천 초전박살’을 외치던 공수부대가 이렇게 용기가 없었다니….”

그러나 그에게도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 있다. “제가 대검으로 찔렀던 분이 안 돌아가셨다면 만나야 할까, 만날 수 있을까 결정을 못 내리겠더라고요. 조사위에서 만약 나중에 그분을 찾으면 만나실 거냐고 묻는데 대답을 못했어요.” 조사위 측은 당시 병원 자료 등을 활용해 해당 피해자의 행방을 찾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민하던 김씨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건데… 먹먹하죠.”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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