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24일 은 누적 관객 수 1000만명을 넘었다.  ⓒ연합뉴스
2023년 12월24일 〈서울의 봄〉은 누적 관객 수 1000만명을 넘었다. ⓒ연합뉴스

군복 입은 사람들이 모인다. 영문을 모르는 군인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무슨 일인지 묻는다. 누군가 들어와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1979년 12월12일, “그날 밤 철저히 감춰진 9시간의 이야기”라는 자막이 뜬다. 낮게 술렁이며 동요하는 장성들과 함께 영화 〈서울의 봄〉은 시작한다.

영화관에 모인 관객 역시 곧 당황한다. 대부분 12·12 군사 반란의 결말만 알았지, 그 과정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쿠데타를 막을 결정적 기회가 한 인간의 욕망 혹은 두려움 때문에 차례차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답답함을 느낀다. 원작이나 다름없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실제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마트 워치에 찍힌 혈압 수치나 심박수를 공개하는 챌린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일지라도 ‘과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탄탄한 ‘원작’은,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전에 12·12 군사 반란을 조명한 콘텐츠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95년 MBC에서 만든 특별기획 드라마 〈제4공화국〉과 같은 해 방영된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도 12·12 군사 반란을 다뤘다. 하지만 드라마가 아닌 영화로 담아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12·12 군사 반란의 계기인 10·26 사태를 다룬 영화는 있지만,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명예훼손을 이유로 영화 상영금지 소송을 내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12·12 군사 반란은 콘텐츠로 다루기에 비교적 ‘안전한’ 소재다. 이미 사법적 판결이 끝난 데다(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씨에게 반란수괴·상관살해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함), 해당 사건이 의심할 여지 없는 쿠데타라는 대중의 인식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왜 군인이 국가보다 개인에게 충성했는지를 보여준다. 전두광(전두환, 황정민 분)이 노태건(노태우, 박해준 분)에게 웃으며 던진 한마디는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안 있나,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길 바란다니까.” 영화를 찍은 김성수 감독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꼽는 말이기도 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그의 태도에 이태신(장태완, 정우성 분)은 이렇게 일갈한다. “넌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다.” 정우성 배우가 이 영화에서 첫손에 꼽은 대사다.

하나회는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운영됐지만 그들이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은 적나라했다. 전두광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며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여기에는 중간이 없다. 실패 아니면 성공, 반역 아니면 혁명이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두 갈래로 명확하게 나뉜다. 반란군 아니면 진압군, 선 아니면 악.

〈서울의 봄〉의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의 봄〉의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MZ 세대는 왜 호응했을까

영화에서 악(전두광)은 오히려 선(이태신)보다 입체적이다. 전두광이 이런저런 구상을 하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실행에 옮기면, 이태신은 그 계략을 저지하기 위해 전화기를 붙들고 고함을 지른다. 손발 묶인 ‘선’보다 날뛰는 ‘악’이 영화를 끌고 간다. 단순하고 평범한 악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캐릭터가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여기에 〈서울의 봄〉이 흥행한 두 번째 요소가 있다.

관람객 추이를 살펴보면, 20대(22%)와 30대(36%)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4050은 직간접적으로 12·12를 경험한 세대라서 ‘안타깝다’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지만 2030은 선과 악의 싸움으로, 마치 하나의 게임처럼 관람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전두광과 이태신이 바둑을 두듯 서로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시시각각 보여주는 연출이 몰입감을 높였다는 설명이다.

2023년 11월9일 언론 라운드 인터뷰에서 김성수 감독 역시 이렇게 말한다. “44년 묵은 제 낡은 호기심과 지금 극장에서 나오시는 젊은 분들의 호기심이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1979년 당시 김 감독은 사건이 발생한 서울 한남동에 살고 있었다. “1979년도, 열아홉 살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어둠 속에서 계속 들려오던 총소리가 제 인생의 의혹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서 거대한 욕망의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었나.” 영화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8)로 이름을 알리고 〈아수라〉(2016)로 호평을 받은 그는 소년 시절 품었던 의문을 스크린으로 풀어놓으며 다시 한번 화려하게 복귀했다.

김 감독은 ‘요즘 관객들’이 영화를 보게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관객들이 1979년 12월12일로 와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 1979년 12월의 그 을씨년스러운 공기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촬영했다).” 실제로 영화의 특수 시각효과를 총괄한 스튜디오하이의 정재훈 대표이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스모그로 덮인 서울 상공의 대기감도 사실감 있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늘의 톤과 구름 모양, 조경 밀도 등에 대해서도 많은 의견을 나눴다”라고 말했다. 철저한 고증 역시 영화 흥행 요소 중 하나다.

〈서울의 봄〉은 지난 5월 개봉한 〈범죄도시 3〉에 이어 2023년 두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다. 성수기인 여름에도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지 못한 한국 영화계는 〈서울의 봄〉을 ‘극장의 봄’으로 여기고 있다. 2023년 12월20일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에 밀려 예매율이 2위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김성수 감독은 오히려 〈노량〉 관객과의 대화(GV)에 참석해 함께 홍보를 하는 등 오랜만에 맞은 한국 영화계의 호재를 이어가려 하고 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전국 각지에서 무대인사를 하며 1000만 관객을 모았다. 황정민 배우는 12월17일 광주광역시의 한 영화관에서 203번째 무대 인사를 하는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한 관객이 ‘서울의 봄이 광주에 오길 4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정이 북받쳤다고 한다. ‘1979년 12월 그날 전두환을 막았다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영화 〈서울의 봄〉은 바꿀 수 없는 역사의 문이 닫히는 순간을 보여주며 모든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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