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시사IN 신선영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남을 돕고 살리라 다짐했다. 성공해서 ‘재단 같은 것’을 만드는 상상을 하며 이름도 ‘아이재단’으로 정해둘 정도였다. 정우성 배우가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원더박스)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런 그에게 유엔난민기구(UNHCR)가 명예사절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2014년 5월이었다. 더 미룰 필요가 없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과거 〈시사IN〉 인터뷰에서 정우성 배우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느낀 미안함이 유엔난민기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명예사절이 된 후 매년 수천만 명이 전쟁과 폭력으로 집을 떠나는 현실을 마주하고 깜짝 놀랐다.

유엔난민기구와 함께한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2015년부터는 공식 직책인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다. 배우로서 필모그래피가 쌓이는 만큼, ‘난민 활동가’ 경력도 그만큼 쌓이는 시간이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40명 가운데 오래된 멤버 중 한 명이자 유일한 한국인. 지난 10년간 네팔·남수단·레바논·이라크·방글라데시·지부티·말레시이아·폴란드 등 현장을 다니며 자신이 ‘본 것’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난민에 대한 관심을 호소해왔다. 정우성 친선대사가 전하는 이야기에는 난민이란 지칭 대신 이름을 가진 구체적인 사람이 등장했고, 매번 정확한 수치와 통계가 더해졌다.

하지만 ‘좋은 일’은 2018년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민감한 일’의 범주에 들어갔다.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들어오면서 한국 사회는 전례없이 들끓었다. 난민에 대한 가짜뉴스와 혐오가 퍼지던 그 순간에 정우성 친선대사는 “우리도 한때 난민이었다”라며 환대의 목소리를 촉구했다. 정우성에게 악플이 쏟아졌다. 동시에 정우성 덕분에 한국 사회는 난민에 관해 좀 더 성숙한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유엔난민기구 활동으로 달라진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세상을 보는 관점?” 조금씩 바꾸고, 조금씩 바뀌면서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의 지정학적 불안이 커졌고, 대내적으론 난민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나타났다. 어쨌거나 난민은 점점 더 뜨거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안 들어도 될 말”을 들으면서 이 활동을 지속하고 있을까. 정우성 친선대사가 3월6일 〈시사IN〉을 찾았다. 2월18일부터 2월23일까지 콜롬비아와 에콰도르를 다녀온 뒤였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서 열 번째 현장 방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얼굴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이주민과 공존하기 위한 사회통합 프로그램 덕분에 희망을 갖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 사회에도 필요하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시차 때문에 잠을 많이 못 잤다면서도 인터뷰하는 90분 내내 막힘이 없었다(〈시사IN〉 유튜브에 출연한 이후 지면 기사를 위해 추가 인터뷰를 했다).

2019년 3월6일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로 건너가는 타치라강에서 자원봉사자가 베네수엘라 어린이를 업고 강을 건너고 있다. ⓒAP Photo
2019년 3월6일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로 건너가는 타치라강에서 자원봉사자가 베네수엘라 어린이를 업고 강을 건너고 있다. ⓒAP Photo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된 후로 중남미 지역을 방문한 건 처음입니다.

첫 번째 후보지로는 방글라데시를 떠올렸어요. 로힝야 난민 문제가 장기화되고 있어서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했거든요(그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로힝야 난민촌을 2017년과 2019년 두 차례 다녀왔다). 현장에 갔을 때 시각적 충격이 컸어요. 거의 90만명인 로힝야 난민들이 쿠투팔롱 지역에 임시 거주촌을 만들었으니까요. 사태가 장기화되었을 때 발생하는 어려움은 더 복합적이에요. 한 번 더 가서 상황이 어떤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콜롬비아와 에콰도르를 방문하게 된 건가요?

서울 사무소(유엔난민기구)의 제안이었어요.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중남미 지역의 난민과 강제 실향민 수는 2140만명이에요.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한 난민과 이주민이 770만명인데, 이 중 84%가 중남미 지역에 머물고 있고요. 대다수의 라틴아메리카 출신 난민이 북미를 희망한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북미로 향하는 루트가 굉장히 큰 고난과 역경이 따르는 길이에요. 몇 개월에 걸쳐서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는 국내 상황이 불안정함에도 베네수엘라 출신 난민과 국내 실향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19세기에는 에콰도르·콜롬비아·베네수엘라가 한 나라였어요. 그렇다 보니 역사적으로 연대의식이 깔려 있더라고요. 1964년 콜롬비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이 베네수엘라로 넘어갔을 때도 베네수엘라가 그들을 잘 보호해주었어요. 지금 베네수엘라에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강제 이주민이 발생하자 자연스럽게 콜롬비아가 보호해줄 수 있는 관계가 되었고요. 실제로 콜롬비아 정부는 베네수엘라에서 넘어온 난민에게 임시 거주증을 발급해주고 있습니다. 지역사회 차원에서 이주민과 공존하기 위한 사회통합 프로그램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목격할 수 있었죠.

뜻깊은 만남도 있었나요?
콜롬비아 보고타시에서 운영하는 버스 회사를 방문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유엔난민기구의 지원을 받아 난민, 이주민,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여성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이름이 ‘라 롤리타(La Rolita)’인데, 여기서 운전기사로 일하는 다니엘라와 아드리아나를 만났어요. 베네수엘라에서 온 다니엘라는 3개월 전만 해도 운전을 할 수 없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다고 해요. 아드리아나 역시 베네수엘라 출신인데 남편과 함께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고요. 제가 그동안 많은 난민을 만났는데, 두 분을 보면서 새로운 기회에 대한 희망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다니엘라는 아기의 기저귀를 살 돈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베네수엘라를 떠나와 일용직을 전전했다고 해요. 안정적인 직장이 없다 보니 삶을 계획할 수 없었던 거죠. 지금은 표정부터 정말 자신 있어 보였어요.

친선대사로서 이전에 간 현장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지역사회가 포용의 마음을 조금만 열어준다면 이주민이 그 지역사회의 경제적 일원으로서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 유엔난민가구, OECD의 공동 조사를 보면 난민과 이주민에게 통합의 기회가 주어지면 GDP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지역사회의 경제적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하거든요. 라 롤리타 프로그램이 좋은 게 면허 취득부터 연수까지 제공하더라고요. ‘이거 굉장히 좋다, 한국 사회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회에도 던지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난민에 관한 큰 오해 중 하나가,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면 국가가 난민의 생활 전반을 모두 책임져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렇지는 않거든요. 취업의 기회, 이동의 자유,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자기의 삶을 지탱하고 또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늘 직접 만난 난민들의 이야기를 한 명 한 명 구체적으로 해주는데, 이유가 있나요?

난민이라는 단어를 한국 사회가 정당한 ‘보호 대상자’로 바라보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가끔 있어요. 전 세계 1억명이 넘는 난민이 있거든요. 그 큰 숫자를 채우고 있는 건 모두 개개인이에요. 개개인이 살아온 이야기들은 다 다르고요. 하지만 또 비슷하기도 하죠. 그래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콜롬비아 보고타 버스 회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는 다니엘라(왼쪽)와 아드리아나 씨. ⓒ유엔난민기구 제공
콜롬비아 보고타 버스 회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는 다니엘라(왼쪽)와 아드리아나 씨. ⓒ유엔난민기구 제공

그의 말처럼 2023년 기준 1억13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본래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그중 절반가량은 18세 미만이다. 전 세계 인구 73명 중 1명이 난민이거나 강제 실향민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정우성 친선대사는 “2014년 처음 활동할 때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늘었다”라고 우려했다.

유엔난민기구 활동을 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어요.

그러게요. 10년이 금방 갔어요(웃음).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유엔난민기구가 저에게 요청을 해왔죠. 어느 시점이 되면 나도 사회에 도움되는 좋은 일을 해야지 생각해왔는데, 배우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 생각만 가지고 시간이 흘렀더라고요. 유엔난민기구의 제안을 받고 더 미룰 필요가 없을 것 같았어요. 이런 제안이 왔을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할 것 같다 싶은 게 가장 컸어요.

유엔난민기구에 ‘왜 하필 나인지’ 물어봤다고요. 그때 답을 들으셨나요?

명확한 답은 못 받았어요. 유엔난민기구에 맞는 성향일 것 같다는 짐작으로 제안한 것 같은데, 사람을 잘 본 것 같아요(웃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무덤덤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저의 성향이 이 기구의 미션과 맞았던 게 아닐까 싶어요.

지난 10년간 유엔난민기구 활동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달라진 것도 있나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인류의 역사는 파괴의 역사인가 하는 의문도 들고요. 그럼에도 현장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인간으로서 삶을 지탱하고 미래를 꿈꾸는 의지가 굉장히 아름답게 빛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왜 다수로 섞이면 충돌하는 상황이 빚어지는지 생각하게 되죠. 결국 정치적 불안정 때문이거든요. 제국주의나 냉전 시대에 만들어져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후유증’을 각 국가들이 겪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우크라이나부터 팔레스타인까지 전쟁으로 인해 국제 정세가 더 불안해지고 있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다들 ‘21세기에 전쟁이?’ 하며 놀랐잖아요.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어요. 국가 간의 이해 충돌은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어요. 한반도에서 위기 사태는 있어서는 안 되지만, 지정학적 특성을 봤을 때 과연 없을 거라는 보장은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죠. 국제적 정세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잖아요. 한국은 동북아시아 맨끝의 아주 작은 땅인데 그조차도 절반으로 나뉘어 있어요. 삼면이 바다이고 위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이 대립 중인 국경이 있는 국가잖아요. 고립되어 있거든요. 혹시 만약 한국에 위기 사태가 발생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지난 2월 방문한 콜롬비아의 한 학교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지난 2월 방문한 콜롬비아의 한 학교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우리도 언제든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이 서로를 더 연결시키는 것 같습니다.

난민이라고 하면 다들 멀게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처럼 평범한 삶을 살다가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곧바로 난민이나 실향민이 되는 것이거든요. 삶의 기본 가치가 다 흔들리고 생존을 위한 방법을 택하게 되죠. 에콰도르에서 14살짜리 발렌티나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엄마와 함께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를 거쳐 에콰도르까지 걸어오는 여정 속에서 느낀 게 있대요. ‘아, 삶이 쉽지는 않구나’ 하는. 아이의 순진무구함과 현실에서 비롯한 고민이 양립하고 있는 모습이 저에게는 좀 슬프게 다가왔어요. 현장에서 만나는 어린 친구들 중에 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내적 성장을 빨리 하는 모습을 봐요.

난민에게 우호적인 사람도 자칫 난민을 ‘불쌍한 사람’으로 대하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당사자들을 직접 만날 때 마음가짐이 있다면요?

그들이 겪고 있는 삶의 위기를 듣고, 같이 나누고 있다는 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도와줘서 고맙다’보다 ‘우리 얘기를 들어줘서, 관심 갖고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까요. 난민은 절대 누군가의 동정과 시혜를 바라지 않아요. 단순히 물질적인 나눔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난민을 경제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 정도로 대상화할 수 있어요. 이미 그 시선 자체가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 거죠. 당사자 입장에서는 누군가는 우리에게 눈과 귀를 열고 있다는 사실이 희망의 끈일 거예요.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난민 인권도 중요하지만 내국인도 먹고살기 힘들다는 주장이 제기되는데요.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라는 이분법적 논리예요.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어떻게 보면 폭력과 맞닿아 있죠. 한국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굉장히 중요해요. 저도 현장을 다녀올 때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여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분위기일까 가장 먼저 눈치를 보게 되거든요.

그런데 ‘내국인 먼저, 난민은 나중에’ 이렇게 나눌 수는 없다고 봐요. 에콰도르에서 난민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센터를 찾아갔는데 거기에서 만난 친구들이 다 케이팝, 케이드라마를 이야기해요. 한 친구는 제 영화 〈증인〉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고, 또 다른 친구는 블랙핑크를 좋아해서 블랙핑크가 입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대한민국의 위상은 지금 나라 안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청나요. 자고 나니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잖아요. 한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한 건 그만큼 국제사회의 도움과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이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 포지션이 되었어요. 저는 그걸 ‘국격’이라고 말하는데요. 국격을 지키기 위해선 내부의 문제도 세심하게 살펴야 하고, 외부 문제 중에서 가장 시급한 난민과 강제 실향민 문제에 관해 세계 각국과 동반자적 노력을 해나갈 수밖에 없어요.

이주 인권 단체는 차별받지 않고 공정하게 난민 심사를 받을 권리를 요구한다. ⓒ시사IN 신선영
이주 인권 단체는 차별받지 않고 공정하게 난민 심사를 받을 권리를 요구한다. ⓒ시사IN 신선영

정우성 배우가 쓴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은 어린 시절의 일화로 시작한다. 왜 유엔난민기구의 제안을 곧바로 수락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중학생이던 1986년, 서울의 사당동 달동네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포클레인이 아랫동네부터 집을 하나하나 부수며 올라왔다. 나중에 들으니 그것을 경관 정화 사업이라 불렀다고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흉하다며 판잣집들을 깨끗하게 밀어버렸던 것이다. 우리 동네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아랫동네에서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지만, 그나마 싸울 힘이 있는 사람들의 일이었다.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높은 곳에 살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고 10대 시절에 일을 시작했다. 1994년 CF 모델로 데뷔했고 영화 〈구미호〉로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배우가 된 후로 드문드문 그 시절 기억이 떠오르면서 ‘성공하면 남들을 도와야지’ 생각했다고 한다.

소수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 같은데, 배우라서 그런 걸까요?

물론 배우라는 직업이 캐릭터에 몰입하고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죠. 그러면서 인간을 더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고요. 어떻게 보면 제도권 안에서 보내지 못한 저의 성장과정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싶어요. 워낙 일찍 사회에 나와, 혼자 맞닥뜨렸으니까요.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나, 그런 생각이 결국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배우로서 ‘난민’이라는 이슈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부담감이나 내적 갈등은 없나요?

하다 보니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로 대두되었죠. 처음에는 유엔난민기구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유니세프랑 헷갈렸어요(웃음). 2018년 예멘 난민 이슈가 계기였죠. 그 당시 굉장히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는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이들이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었잖아요. 그때는 별의별 극단적인 주장이 많았어요. 예멘 난민이 들어와서 한국을 이슬람화할 것이다, 밤에 돌아다니면서 성폭력을 일으킬 거다. 단순 논리의 대상화는 한 인간을 대할 때의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게 차별을 만들고, 혐오를 만들고, 증오를 만들죠. 그러다 결국 홀로코스트로 이어진 역사가 있잖아요.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3월6일 〈시사IN〉과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3월6일 〈시사IN〉과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과거 〈시사IN〉 인터뷰에서 난민에 대한 태도를 “자선이 아니라 책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지역에서 내전이 장기화되고 있어서 물질적 지원은 필요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죠. 하지만 무조건 난민에 대한 후원을 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고, 제가 던지는 말을 듣고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여기는 분들이 나눌 때, 받는 사람도 편해지니까요. 그때 제가 ‘책임’을 말씀드린 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거대한 위기 사태를 외면하면 안 된다는 의미였어요. 개인에게는 책임 의식으로 나눔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같은 책에서 그는 자신에게 달린 수많은 댓글을 읽는다고 말한다. 난민 문제는 단순하지 않고,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필요가 있어서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사람들의 난민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난민 그 자체를 향해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은 난민 그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최근 법무부는 난민 심사를 강화하는 등 ‘강력한 이민자 관리’를 주요 정책 과제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난민 정책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이번에 다녀온 라 롤리타의 비전이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고용된 버스 기사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지 차별 없이 채용한다.’ 단순히 난민에 국한된 말이 아니라서 더 좋아요. 대한민국 헌법에는 ‘법 앞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라고 규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여러 국제기구는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우거든요. 법으로 국적에 대한 차등이나 차별을 두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보장하는 거죠.

얼마 전에도 공식 석상에서 ‘민주국가라면 이 정도 목소리는 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난민은 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 보호받을 권리와 지위를 부여하는 단어잖아요. 그런데 그 단어를 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지정학적 특성으로 난민이 유럽만큼 한국에 들어오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더 심정적 거리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한편으론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족적인 고통을 겪은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온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민간 후원금이 거의 전 세계 상위에 올라가 있는 것만 봐도 그래요. 하지만 온라인상에서는 사실 찬성이건 반대건 극단적 목소리가 더 크게 외쳐질 수밖에 없잖아요.

실제로 유럽에서는 반이민·반난민 정서를 부추기는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럽이 가진 지정학적 특성으로 정략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거죠. 어떻게 이 문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할 것인지가 중요할 것 같아요. 이주민이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만들어내는 긍정적 요소들도 있잖아요. 그들이 들어와서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현지인이 기피하는 것들이죠. 그런 고용효과부터 그들이 창출해내는 수익으로 인한 소비 효과, 임금을 받아서 낼 세금까지 다양해요. 이런 것들은 다 차치하고 개인의 일탈에 주목해 ‘모든 난민은 저런 문제를 일으켜’라며 일반화하는 게 문제죠.

이주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양성에 대해 더욱 배타적인 분위기도 형성되고요.

다양성은 인류가 선택한 하나의 생활 방식이었어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자원과 인력이 오고 가고, 그로 인해 부가 형성되었어요. 부가 형성될 때는 다양성이 좋은데, 부가 축소되니 다양성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고 해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국가들은 한국보다 자원이 월등히 많거든요. 앞으로 발전할 여지도 한국보다 많죠. 한국은 이제 고도성장의 시대가 끝났고 어떻게 이 성장을 유지하느냐가 숙제인데요.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외부 문제에 고개를 돌리고 반토막짜리 반도국가에 머물려고 하는 자세는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난민 문제는 유기적으로 꼬리를 물고 돌고 돌 겁니다. 수치가 증명해주고 있잖아요. 앞으로 더 늘어나게 될 거고요.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무기력할 때는 없나요?
현장에서 만난 15~20년 차 유엔난민기구 직원들이 본인들의 꿈은 난민들의 귀환을 보는 것이고, 유엔난민기구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사실 사라질 수 있을까 싶어요. 인류는 위대한 부분도 있지만 어리석음으로 폭력을 자행하기도 하잖아요. 그게 인류라면, 위기에 처한 인류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겠지요.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기반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개인이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실생활에서 난민을 만날 기회는 잘 없을 거예요. 다만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을 인종과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선입견을 갖고 대하지 않는 자세가 어떨까요. 내 친구의 나라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일지 헤아릴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거죠. 에콰도르에서 방문한 학교가 있어요. 그 학교에서는 난민과 이주민 학생이 함께 교육을 받더라고요. 거기서 아이들이 주사위 게임을 하는데 주사위판에 놓인 단어의 의미를 나누는 거예요. 이런 단어들이 쭉 나열돼 있어요. 차별, 혐오, 정체성, 연대…. 이런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저들은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걸 배울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프로그램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정우성 배우가 유엔난민기구와 함께한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시사IN 신선영
정우성 배우가 유엔난민기구와 함께한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시사IN 신선영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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