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전, 광주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 최 아무개씨가 당시 현장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41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광주의 진실’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다. 2019년 출범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다. 이 전에도 국가 차원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그 학살의 진상을 9차례에 걸쳐 조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쿠데타 이후 집권한 전두환씨는 생전에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사과 한 마디 없이 사망했다. 

조사위는 최초로 여야 합의를 거쳐 탄생한, 정부로부터 독립된 조사 기구다. 지금도 조사위는 광주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그해 광주에 투입됐던 부대원들을 한 명씩 만나고 있다. 〈시사IN〉이 그 ‘만남’에 동행했다. 독재자는 떠났지만, 진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출장지를 향해 떠난 차가 10분 만에 멈춰 섰다. 세탁소 앞에 차를 댄 류시연 조사지원단 조사팀원이 양해를 구하고 잠깐 차에서 내렸다. “원래 타려고 했던 차를 다른 조사팀이 타고 가버리는 바람에….” 조수석에 앉은 황준연 조사관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 조사팀이 수시로 출장을 가다 보니 이런 일이 종종 생겨요. 차에 미리 짐을 실어놨는데 그 잠깐 사이에 다른 팀이 타고 가는 거예요. 각자 갈 길이 바쁘다 보니까.”

세탁소로 뛰어간 류 조사팀원이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를 여러 벌 찾아 나왔다. “이제 진짜 출발합니다.” 최종 목적지는 울산 울주군에 위치한 한 식당. 41년 전인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 소속 부대원 최 아무개씨를 만나기로 한 장소다.

황준연 조사관과 류시연 조사팀원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사위는 2019년 12월에 공식 출범했다. 조사위가 설립될 수 있었던 법적 근거는 2018년 2월28일 임시국회 마지막 날 가까스로 통과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5·18진상규명법)’이다. 이 법 제1조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시기에 국가권력에 의한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따른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암매장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규명함’이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국가 차원의 5·18민주화운동 조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까지 총 9차례 진행됐다. 하지만 매번 최종 책임자들을 밝혀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88년 국회에서 꾸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1995년 시작된 검찰 수사는 1997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법원 판결로 이어졌으나, 결국 발포 책임자를 명확하게 지목하지 못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헬기 사격 의혹 등을 조사했지만, 직접 가담한 인물의 진술을 받아내지 못했다.

박진언 조사위 대외협력과장은 “40년 동안 9번이나 조사했으면 더 나올 게 없는 거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40년 동안 연속성 있게 조사를 해오지 못했어요. 국회, 검찰, 국방부, 여성가족부 등 각 기관이 그때마다 국민들의 관심을 받는 세부 이슈를 중심으로 띄엄띄엄 조사해왔으니까요. 그런 식으로는 전반적인 진상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던 거죠.” 이번 조사위는 최초로 여야 합의를 거쳐 탄생한, 정부로부터 독립된 조사 기구다.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국방부, 여성가족부, 경찰청, 인사혁신처, 방송통신위원회, 국가기록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상근하며 협력하고 있다.

한 공수부대원의 집을 찾아간 황준연 조사관(왼쪽)과 류시연 조사팀원이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이번 조사위는 그동안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략’을 바꿨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조사 방식이 아닌,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다. “지금까지는 고위급 인사들에게 진술을 받아내는 방식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40년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당시 광주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했던 장병들은 어떨까요. 국가는 여태까지 한 번도 그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박진언 대외협력과장이 말했다.

조사위는 지난 40년 동안 입을 열 기회가 없었던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증언을 모아 ‘위’로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일병의 증언을 따라 올라가 병장에게 묻고, 병장의 증언을 따라 올라가 지대장(당시 공수부대는 10명씩 한 ‘지대’로 움직이며 작전을 수행함)에게 묻는 방식이다. 이 피라미드의 끝에는 결국 책임을 져야 할 인물들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국가가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있었던 군인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그들의 증언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18 당시 광주에는 흔히 ‘공수부대’라고 불렸던 3·7·11공수여단만 있지 않았다. 기계화보병사단인 제20사단과 향토사단인 제31사단 등도 투입됐다. 모두 합치면 총 2만353명에 달한다. 조사위가 운영되는 2년 동안(이후 1년씩 두 번 연장 가능), 50여 명에 불과한 조사위가(실제 조사관은 34명), 당시 광주에 있었던 군인 2만여 명을 모두 만나야 한다. 전례 없는 시도다.

조사위는 팀을 3개로 나눴다. 조사1과는 집단 발포, 헬기 사격, 인권침해, 사망자와 관련된 조사를 맡았다. 조사2과는 암매장, 행방불명자, 집단학살과 관련된 사건을 주로 들여다본다. 조사3과는 북한군 개입 혹은 침투와 관련된 조작 사건과 성폭행 사건 등을 조사한다. 황준연 조사관과 류시연 조사팀원은 조사2과에 속한다.

두 사람은 벌써 1년째 함께 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을 한 명씩 만나고 있다. 열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보통 직접 차를 몰고 움직인다. 증언자들이 사는 집집마다 들르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갈 때, 한 번에 바로 광주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경기, 충남, 대전, 전북 등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의 집을 최대한 많이 들르면서 내려간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는 1년 사이에 주행거리 10만㎞를 돌파했다.

2000명 중 200명만 대화에 응해

진실은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40여 년 전 진실을 찾는 길은 멀고도 고되다. 조사팀은 지금까지 2000여 명과 만남을 시도했다. 이 중 대화에 응해준 사람은 200여 명이다. “쉽게 안 만나주십니다. 40년이 흐르는 동안 어디 말할 곳이 없었잖아요. ‘잊자’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닫고 살아온 분들인데 어느 날 저희가 찾아간다고 해서 갑자기 이야기를 해주실 리가 없죠.” 황준연 조사관이 말했다.

당시 군인이었던 이들의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는 행정안전부와 통신사에 조회를 요청해 받고 있다. 5·18진상규명법에 명시된 조사위의 법적 권한이지만,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고함을 지르며 문전박대하는 경우가 많다. 당사자가 외출 중일 때 문을 열어준 가족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사관의 명함을 들여다본다. 대부분 자신의 남편 혹은 아버지가 5·18 때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조사관들이 선 현관문은 그 순간 ‘진실의 문’이 된다. 그 문이 열려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퍼즐 한 조각을 맞출 수 있다. 막히면 다시 시도해야 한다. 온갖 경계와 불신을 뚫고 그들에게 말을 붙이는 건 오롯이 그 순간 현관에 서 있는 조사관들의 몫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명함이 구겨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갑자기 집 안에서 튀어나온 개에게 물린 적도 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명함을 주고, 명함을 받지 않으면 문틈에라도 끼워 넣고 ‘꼭 한번 연락 주시라’며 간곡하게 부탁한다. 그런 다음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다리던 중 간혹 한밤중에 전화가 오는 경우도 있다. 모르는 번호가 떠서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택배인데요”라는 말에 맥이 탁 풀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5·18 당시 계엄군의 이름과 주소, 휴대전화 번호 등이 적힌 목록. ⓒ시사IN 신선영

4월26일 울산 울주군의 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한 11공수여단 소속 최 아무개씨와의 첫 만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경계를 많이 하셨죠. 댁을 찾아갔는데 안 계셔서 전화를 드리니까 주저하시다가 다음에 한번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다음에 한번 보자’는 기약 없는 말은 그나마 희망적이다. ‘할 말 없다’며 툭 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전화를 안 받을 가능성이 크다. 황 조사관과 류 조사팀원은 ‘다음에 한번 보자’는 최씨의 말을 잊지 않고 울산까지 먼 길을 두 번, 세 번 찾아갔다.

이날은 벌써 네 번째 만남이었다. 서울에서 회의 중이던 허연식 조사2과 과장도 약속 시간에 맞춰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 중요한 인물일 경우 담당 조사팀과, 조사팀을 총괄하는 과장이 함께 만나기도 한다. 필요하면 영상이나 글로 기록을 남기는 전문위원을 대동하기도 한다. 최씨는 5·18 당시 광주에서 벌어졌던 한 사건과 관련된 주요 인물이다.

최씨와 같은 사건 관련 주요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혹은 당사자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당시 총을 쏜 사람과 총을 맞은 사람이 정확히 ‘매칭’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월16일, 조사위는 1980년 5월23일 광주 남구의 노대남제 저수지를 지나다 사살된 민간인 고 박병현씨(당시 25세) 유가족과, 박씨에게 총을 발사했던 제7공수부대 소속 계엄군 한 명의 만남을 주선했다. 계엄군 출신인 그는 엎드려 울며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제라도 유가족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유가족은 “용기 있게 나서줘 참 다행이고 고맙다. 이제 떳떳하게 마음 편히 살아달라”라며 그를 안아줬다. 박진언 대외협력과장은 “그동안 계엄군들이 자신이 목격한 사건에 대해 증언한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가해자가 자신이 직접 특정인에게 총을 쐈다며 유족에게 사죄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군인 한 명 한 명을 찾아가는 조사위의 방식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이날 식당에서 만난 최씨는 “보고 싶었다”라고 먼저 반갑게 인사하며 조사관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조사관들과 여러 차례 만나며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식사 자리에 반주가 곁들여졌다. “40년 전 일이지만 맨정신으로는 이야기하기 힘든 일들이잖아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류시연 조사팀원이 말했다.

이날 조사팀은 주로 최씨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꼭 필요한 질문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조사관들은 조사도 조사지만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라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몇 번 만난 뒤에야 “(처음 만났을 때) 내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질문부터 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올 생각이었다”라고 말한 공수부대원도 있다.

조사팀은 최씨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음식에 거의 손대지 못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황준연 조사관이 챙겨온 자료 사진을 꺼냈다. 사진을 본 최씨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최씨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40년 만에 보는 장면인데…. 내 기억이랑 똑같네. 잊히지가 않아.” 최씨는 “잊고 싶어도 잊히지가 않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내내 눈물을 흘렸다.

늦은 밤 숙소로 돌아온 조사팀은 허연식 과장의 방에 모여 그날 식사 자리에서 나온 대화를 복기했다. 허연식 과장은 조사팀에게 “내일 바로 광주 ○○로 가서 최씨의 발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다. 누가 만나줄지, 누구의 입에서 어떤 증언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조사팀의 일정은 변동이 심하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증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계엄군(.ⓒ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역사의 한 획 시작되는  점

계속된 출장과 장거리 운전, 식사 자리, 불규칙한 일정 탓에 조사관들은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루 대여섯 알씩 먹는 비타민 일주일치와 영양제를 개인 약통에 채우고, 각종 피로회복제를 챙겨 출장을 떠난다. 류시연 조사팀원은 1년 사이에 몸무게가 10㎏ 이상 불었다. “하다못해 걷기라도 좀 해야 되는데, 그럴 틈이 없어요.”

이들이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직접 찾아가 일대일로 만나는 방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황준연 조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공수부대원은 직접 만나지 못해도 알 수 있어요. 아내분이 ‘우리 남편 지금도 술에 찌들어서 살고 있다’라거나 ‘그 사람 겨우 종교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라고 말할 때 딱 느껴요. 이 사람이 정말 중요한 인물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좁혀 나가는 게 맞구나 하고요. 그분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어지는 거죠. 우리 작업이 역사의 한 획을 완성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획이 시작되는 점 하나를 찍을 수는 있잖아요.”

류시연 조사팀원은 이 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계엄군들도 광주에서 몇 명이 죽었다는 걸 정확히 몰라요. 제가 ‘165명(1980년 6월 광주지검 발표)입니다’라고 말하면, 다들 깜짝 놀라서 되물어요. 그렇게 많이 죽었느냐고. 정말 몰랐다고. 그러니까 이분들도 자신이 광주에서 직접 보고 겪은 장면만 알지 큰 흐름은 모르셨던 거예요. 바꿔 말하면, 이분들은 ‘내가 지금 와서 입을 연들 뭐가 달라지냐’고 하시지만 그 기억 하나하나를 모아보면 큰 그림이 그려지는 거죠.”

지난 35년 동안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등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던 허연식 과장은 이렇게 고백한다. “오랫동안 공수부대원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다행이다’라고요.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가책 그 이상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국가는 이 트라우마를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고요. 조사위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이들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라도 귀담아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이 사람들도 억눌린 부담과 증오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요. 진정한 화해와 회복적인 정의로 가는 단계인 거죠.”

5·18 당시 민간인 고 박병현씨를 총으로 쐈던 계엄군이 피해자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물론 이들의 증언을 듣는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 40년이나 지난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본인이 직접 총을 쏜 가해자일 경우 자신도 모르게 기억을 왜곡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사람의 증언을 교차검증하는 과정에서 오류나 거짓증언을 발견하기도 한다. 조사팀은 그래서 더더욱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사람의 증언을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여러 번 확인함으로써 ‘부정하거나 왜곡할 수 없는 진실’로 객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씨를 만난 다음 날 오전 조사팀은 울산 일대에 거주하는 11공수여단 부대원 세 명을 찾아갔다. 첫 번째로 들른 ㄱ씨의 집에는 그의 노모와 아내만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조사관이 어디 소속인지 여러 차례 되물은 아내는 조사관의 명함을 받아들며 “그이가 퇴근하면 전해주겠다”라고 말했다.

1980년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은 당시 22~23세, 주로 1958~1959년생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경우 아직 퇴직 전인 경우가 많다. 조사관들은 이들의 출퇴근 시간과 겹치지 않으면서도 너무 일찍 가거나 너무 늦게 집을 방문하지 않도록 신경 쓴다. 식사 시간대도 피한다. 공수부대원 대신 집에 있는 가족을 마주쳤을 때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가족이 놀라지 않도록 충분히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공수부대원이 평생 감춰온 과거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잘 매듭지어야 한다.

두 번째로 들른 ㄴ씨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아파트 공동출입문 밖에서 한참 서성이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ㄴ씨는 휴대전화 번호도 조회되지 않아 달리 연락할 길이 없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죠”라고 말하며 몸을 돌리는 조사관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어 방문한 ㄷ씨의 집 마당에는 차가 세워져 있었다. 두 조사관이 문을 열어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명함을 드려도 될까요?”라고 묻자 집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 남성이 소리쳤다. “됐다 해라!” 어쩔 수 없었다. 조사관들은 뒤돌아 나오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차 유리창에 명함을 살짝 끼워놓았다. “할 말 없다고 하시는 거 보니까 분명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황준연 조사관이 중얼거렸다. 주차한 차로 돌아와서도 조사관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 동안 집 쪽을 바라보았다.

조사팀이 5·18 당시 광주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차를 돌린 조사관들은 창원시 진해구로 향했다. 이번 주 경남 지역에서 소화해야 할 마지막 일정이다. 어제 만난 공수부대원 최씨와 같은 팀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부대원을 만나는 일이다. 최씨의 증언을 교차검증해줄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지난주에도 이분 댁을 찾아갔었어요. 그때는 안 계시던데 오늘은 계셨으면 좋겠네요.” 일부러 그때와 다른 시간대를 골라 방문했지만 오늘도 집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주차장을 서성이던 조사팀은 “문에 명함을 꽂아놓고 왔으니 한번이라도 연락이 오면 좋겠다”라며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봤다.

기사 읽고 한 명이라도 마음 열기를

다시 차에 탄 조사관들은 내비게이션 목적지에 전남 광양시를 입력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 내내 달려서 오늘 밤은 광양이고요, 내일 수요일 오전은 광주예요.” 두 조사관은 이번 주도 금요일에야 서울 사무실로 복귀할 것 같다며 노을 앞에서 웃음을 지었다. 밤에 광양에서 만날 군인들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며 류시연 조사팀원이 말했다. “사람들은 ‘진상규명’이라는 일이 이런 막노동이라는 걸 잘 몰라요. 처음에는 가족들도 제가 왜 이렇게 출장을 많이 가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원래 공사판 노동자들의 이름이 벽에 새겨지지는 않잖아요. 이 작업도 역사에 이름 없는 벽돌 한 장 쌓는 거라고 생각해요.”

조사팀은 이번 취재에 응한 이유가 단 하나라고 말했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군인이 이 기사를 읽고 단 한 명이라도 마음을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5·18은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다른 국가폭력 사건과 달리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유가족) 양쪽 모두 아직 생존해 있고요. 아직 응어리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있거든요. 저희는 그 가능성을 봤어요.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보고 싶어요.” 황준연 조사관이 다시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내비게이션에는 다음 증언자에게로 가는 길 123㎞를 안내하는 지도가 떴다.

기자명 울산·진해/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