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가 스마트폰처럼 흔해진 어떤 미래. 제이크(콜린 패럴)네 가족도 양(저스틴 H. 민)을 구매한다. 다행히 딸은 양을 좋아했다. 양도 동생을 아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한 4인 가족이었다. 양이 고장 나기 전까지는.
다시 깨어나긴 힘들 거라고 했다. 양을 기증해달라고도 했다. 안드로이드의 기억 저장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싶단다. 하루에 몇 초씩, 어떤 ‘순간’을 저장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데 그 ‘순간’을 선택하는 기준이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각해보겠노라, 제이크는 말했고, 양의 메모리 장치를 건네받았다.
눈앞에 양의 기억이 펼쳐진다. 방대한 파일이 마치 우주공간의 별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다. 하나씩 불러내 재생을 해본다. 너무 사소해서 특별한 의미를 찾기 힘든 기억의 파편들 가운데 한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는 영상도 있다. 누굴까? 왜일까? 무슨 이유로 그녀는, 양의 기억 속에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아 있게 된 걸까?
“인간의 ‘기억’과 기계장치에 저장된 ‘기록’의 차이점을 탐구해보고 싶었다”라고 감독 코고나다는 말한다. ‘하루에 몇 초씩, 어떤 ‘순간’을 매일 저장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설정 때문에, 양이 간직한 영상은 마치 인스타그램 릴스나 틱톡 같은, 요즘 유행하는 쇼트폼 콘텐츠를 닮았다. 거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거의 모든 순간을 강박적으로 ‘기록’하는 시대에 우리 모두는, 어쩌면, 이미, 어느 정도는 ‘양’의 시간을 살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이 학교 무대에서 공연할 때마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촬영하는 습관”이 있던 감독은 어느 날, “이제는 내 기억 속에만 그 순간들을 담아두겠다고 결심”했다. 기록되지 않은 순간이 잊힐까 봐 두렵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기억 속의 어떤 사건이 달라지고 어렴풋해지는 과정 또한 사랑스럽다”라는 믿음을 이 영화에 담았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부모의 인생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 처음 듣던 순간”의 느낌도 영화에 더했다. 안드로이드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제이크처럼, 그 역시 부모님 인생의 어떤 시간은 미처 상상해본 적이 없으므로. 당신들께서 기억을 꺼내줄 때 감독에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양의 기억이 우주의 형상으로 제이크 앞에 펼쳐지듯이.
전작 〈콜럼버스〉에서 ‘눈에 보이는 건축의 보이지 않는 의미’를 이야기한 코고나다는, 새 영화 〈애프터 양〉에서 ‘눈에 보이는 기록의 보이지 않는 기억’을 이야기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기억할 방법이 없는, 그래서 오직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나도 상상하고 싶어졌다. 기록되지 못한, 그래서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내 인생의 어떤 순간을, 나도 떠올리고 싶어졌다. 나는 제이크가 되고 싶고 또한 양이 되고 싶다. 이 섬세하고 사려 깊은 영화 속에, 가능하면 오래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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