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산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신을 확인하러 온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가 말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마침내? 한국말이 서툴러 잘못 고른 부사일까, 아니면 방심한 사이에 튀어나온 오래된 진심일까. 경찰 해준(박해일)의 의심이 시작된다.
왜 남편과 함께 산에 가지 않았는지 묻는 해준에게 서래는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전 바다가 좋아요. 전 인자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때 해준이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 “나도.” 비슷한 취향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래의 이야기마다 나도, 나도, 하며 속으로 맞장구치는 순간이 늘어간다. 의심이, 관심으로 바뀌었다.
해준의 수사는 곧 서래의 서사를 알아가는 과정. 신문(訊問)은 대화가 되고, 면회는 밀회가 되고, 감시는 응시가 되고, 잠복은 행복이 된다. 이제 해준의 목표는 혐의를 입증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서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영화 〈헤어질 결심〉은 그렇게 시작한다. 형사가 용의자에게 빠져드는, 그 많고 많은 〈원초적 본능〉 유의 이야기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박찬욱. 평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관객이 영화라는 열차에 탔을 때 그 종착역이 어딘지 몰라야 좋다고 생각해요. 또는 종착역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려보니까 다른 곳이든가요. 부산으로 가는 줄 알고 탔는데 내려보니 광주더라, 뭐 이런 영화라고 할까요?”(〈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시간〉)
해준의 수사극에 올라탄 관객은 이내 멜로영화의 터널을 지난다. 터널 끝에 또 다른 수사극이 기다리고 있고, ‘분명 사랑 이야기지만 결코 사랑 이야기만은 아닌’ 다리를 건너 영화는 어느새 안갯속을 내달린다. 그러다 이야기가 멈춘 뒤에야 관객은 깨닫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타고 있던 게 열차가 아니라 배였다는 걸. 바다엔 처음부터 종착역이 없고, 어디에도 항구는 보이지 않고, 그래서 관객이 내릴 곳 또한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마는 것이다.
‘미결(未決).’ 서래에게 중요했던 이 단어가 관객 마음에도 깊이 새겨지는 엔딩. 모든 게 끝났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파도와 일몰과 만조의 이미지로 사랑과 상실과 회한의 모래 산을 무너뜨리는, 너무나 황홀하고 매혹적인 그 라스트신 때문에라도 나는, 영화 〈헤어질 결심〉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가 어렵다. 이 영화의 바다를 본 뒤로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바다를 잊었다.
방송에서 나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봉준호 감독은 우리가 ‘보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고, 박찬욱 감독은 우리가 ‘보지 못한’ 이야기를 만든다”라고. 이번에는 박찬욱 감독이, 우리 모두 보고 싶어 할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가 보지 못한 방식으로. 가장 영화적인 영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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