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덟 살 대학교수 레다(올리비아 콜먼)가 혼자 휴가를 왔다. 그리스 바닷가 호젓한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한동안 머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조용했던 해변이 별안간 시끌벅적하다. 대가족이 휴가를 온 모양이다. 젊고 예쁜 엄마 니나(다코타 존슨)와 엄마에게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귀여운 딸 엘레나도 그 무리에 섞여 있다. 힐끔힐끔 다정한 모녀를 훔쳐보는 레다.

니나의 시누이가 다가와 말을 건다.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당신도 아이들이 있느냐고 묻는다. “딸이 둘 있어요. 비앙카는 스물다섯, 마사는 스물셋이요.” 그러고는 조금 뒤, 이렇게 덧붙이는 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자식들이란 정말 끔찍한 부담이에요.”

이 서늘한 한마디가 영화 〈로스트 도터〉의 진짜 출발점이다. 곧 아이 낳을 여자에게 덕담 대신 악담을 건넨 주인공. 도망치듯 해변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레다와 얼마 뒤 자취를 감춘 엘레나. 패닉에 빠진 니나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레다. 그때부터 하나씩 드러나는 과거. ‘젊고 예쁜 엄마’였던 레다(제시 버클리)가 오랫동안 숨겨왔던 이야기.

배우 매기 질렌할이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잃어버린 사랑〉(엘레나 페란테 지음)에서 느낀 건 동질감이었다. “레다 같은 경험과 생각을 나도 했고, 레다와 같은 감정과 욕망을 나도 가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엄마의 역할을 버거워하다가 결국 세상이 용납하기 힘든 선택을 한 그녀를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말했다. 첫 연출 데뷔작이 〈로스트 도터〉가 된 까닭이다.

느슨한 스릴러물이면서 팽팽한 심리드라마로 완성된 이 영화에서 내가 떠올린 건, 최근에 본 다른 영화 〈컴온 컴온〉이었다. 여동생의 아이를 잠시 맡아 돌보면서 그동안 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뒤늦게 깨달은 주인공이 우리에게 읽어주던 책의 바로 이 대목이었다.

“(세상 모든 결함과 잘못을 바로잡는) 불가능한 임무가 어머니에게 주어진다. 우리 사회의 가장 무거운 짐을 떠넘기면서 우리는 어머니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세상을 밝고 투명하고 안전하게 채색할 책임이 왜 그들에게(만) 주어진 걸까?(〈어머니:사랑과 잔인함에 대한 에세이〉 재클린 로즈 지음)”

‘내 아이의 삶에서 중요한 시기’를 혼자 책임지느라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다 써버려야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너무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동시에 너무 끔찍한 부담이 되기도 하는 엄마들의 은밀한 고백. 〈로스트 도터〉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

숙소에 도착한 첫날, 레다는 테이블 위 바구니에서 예쁜 과일 하나를 집어 든다. 다 썩어버린 과일의 밑바닥이 그제야 보인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으론 썩어 문드러진 것들의 바구니. 레다의 삶이, 모성의 책임이, 그리고 여성의 시간이 그 바구니에 함께 담겨 있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