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들리지 않는 건 내 장애가 아니야. 그건 내 정체성이야.”
영화 〈미라클 벨리에〉(2014)에서 이 대사를 처음 만났을 때, 줄곧 닫혀 있던 문 하나가 내 안에서 열리는 느낌이었다. 들리지 않는 건 청각장애, 보이지 않는 건 시각장애. 그래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 이 단단하고 확고한 정의가, 열린 문틈으로 황급히 줄행랑쳤다.
내가 살아온 문 안쪽의 세상에서 장애는, 이겨내야 할 ‘역경’이자 뛰어넘어야 하는 ‘한계’였다. 그렇게 ‘인간승리 드라마’를 써낸 장애인만 발언권을 얻었다. ‘장애를 딛고 일어서지’ 못한 사람은 운명 앞에 맥없이 주저앉은 패배자로 취급되었다.
문 너머 세상에 사는 벨리에 패밀리는 달랐다. 장애가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왼손잡이가 굳이 오른손잡이가 되려고 애쓰지 않듯이, 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긍정하고 듣지 않는 삶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딸 폴라(루안 에머라)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빠가 당황한다. 집을 떠나 오디션에 참가하겠다는 딸이 엄마는 서운하다.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듣는 일은 자신이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성소수자 자녀의 커밍아웃 앞에서 허둥대는 부모처럼, 자신들과 다른 청인 자녀의 정체성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다. 청력이 권력이 되는 바깥세상과 달리, 이 집에서는 청력이 오히려 핸디캡이었다는 걸 그제야 눈치 챈다.
농인 배우가 수어로 전한 수상소감
이 영화는 그래서 특별했다. 비장애인 자녀의 앞날을 무조건 응원하는 장애인 부모를 그려내지 않았다. 나와 다른 타인의 정체성을 차츰 이해하고 수긍하는 어른의 성장 서사를 가족 이야기로 짜고 엮는 시나리오 뜨개질이 참 꼼꼼해서 멋졌다. 이 영화를 본 뒤로 나는,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따위 무신경한 표현을 쓰지 않게 되었다. ‘들리지 않는’ ‘농인으로 태어난’ 같은 좀 더 중립적인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그거가 아니라는 걸 이 영화로 배웠기 때문이다.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할리우드에서 다시 만든 영화 〈코다〉(사진)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주요 대사, 주요 장면, 주요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청인 배우에게 농인 배역을 맡겨 비판받은 원작의 실수는 가져오지 않았다. 주인공의 아버지를 연기한 농인 배우 트로이 코처가 남우조연상을 받고 수어로 전한 수상소감은 단연 올해 시상식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가 입으로 말하지 않는 건 장애가 아니었다. 손으로 말하는 게 그의 정체성일 뿐.
〈미라클 벨리에〉의 좋은 이야기가 더 완벽하게 좋은 이야기로 손질돼 담긴 영화 〈코다〉. 두 영화 모두 보길 바라지만, 둘 중 한 편이라도 꼭 보면 좋겠다. 무엇을 고르든 눈물은 피할 수 없을 테니 각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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