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8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민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EPA

스위스가 장고 끝에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제재를 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스위스는 중립국임을 내세우며 유럽연합(EU)의 러시아 제재안에 며칠 동안 동참 의사를 밝히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뒤늦게나마 서구 세계와 한 배에 올라탔다. 2월28일 이냐치오 카시스 스위스 대통령은 EU가 현재 러시아에 부과 중인 제재에 동참하겠다고 밝히며 “우리는 예외적 조치가 취해져야만 하는 예외적 상황에 처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예외란 중립을 포기하고 한쪽 편을 들게 된 상황을 뜻한다. 스위스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할 당시 EU의 제재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번 선택은 예외적이다. 카시스 대통령은 “스위스의 중립성은 변함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의 가치를 지지한다”라고 했다. 이날 발표와 동시에 스위스 정부는 러시아 항공기의 스위스 영공 통과를 막았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 5명의 스위스 입국을 금지했다. 스위스의 제재안 동참은 EU에 큰 힘을 실어줬다.

스위스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기로 한 결정은 다행이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에도 며칠 동안 미온적 태도를 보인 점은 아쉽다. 피터 스타노 EU 외무 수석대변인은 2월25일 스위스의 이 같은 태도를 비판하면서 “(전쟁은) 우크라이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유럽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스위스는 유럽의 일부다. 우리의 파트너이자 이웃, 동맹이 우리 사회의 기본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같은 패를 내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비난은 스위스 내부에서도 쏟아졌다.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인 욘 풀트는 “푸틴은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 국제법 위반 앞에 중립이란 없다. 스위스는 제재에 동참해야 한다. 정부의 망설임은 용납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다.

시위도 이어졌다. 2월23일 베른의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민 1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2월26일 토요일에는 베른 도심에 2만여 명이 모였다. 이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열린 최대 규모의 평화 집회다. 정부가 제재 동참을 발표한 2월28일 저녁에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대성당)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 1만여 명이 참여했다. 취리히 시청과 그로스뮌스터 건물 벽은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노랑과 파랑 조명으로 물들었다.

긴박했던 지난 며칠 사이, 스위스에서는 ‘중립’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중립은 스위스 외교정책의 핵심일 뿐 아니라, 많은 스위스인들에게는 종교나 마찬가지다. 중립 정책 덕에 이 나라가 여기까지 발전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대체 스위스에서 중립이란 무엇인가.

중립 정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일부는 1515년 마리냐노 전투를 출발점으로 본다. 이는 이탈리아 전쟁 당시 프랑스와 구 스위스 연방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여기서 스위스가 크게 패한 이후 다른 나라와의 무력 충돌을 피했다는 것이다. 또 스위스가 처음 독립체로 인정받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중립 정책의 시초로 보는 의견도 많다. 1815년 파리 조약 때 유럽 강대국들이 스위스의 중립성을 받아들인 이후 스위스가 실질적인 중립 국가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스위스의 중립 정책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갑자기 수립된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진화해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게 형성된 중립국 정신을, 스위스는 연방 통일 후 헌법에 못 박았다. 연방헌법 제173조와 제185조에는 각각 연방의회와 연방내각이 “스위스의 안보, 독립 그리고 중립성을 수호하는 조치를 취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중립의 의도와 실행이 의심스럽다

중립은 단순히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자의적 태도 이상의 것이다. 중립을 지킬 권리는 국제법에 의해 보호받는다. 1907년 헤이그 조약을 통해 중립국의 권리와 의무가 처음으로 문서화됐다.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권리, 자국 영토를 침범당하지 않을 권리,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 등이 여기 포함된다. 그렇다고 이 권리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명백히 일방적으로 국제법을 위반한 공격’에 대해서는 이 내용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에 해당한다. 스위스 정부가 제재 동참을 결정하는 데 며칠이 걸린 것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중립국의 권리’와 ‘명백한 국제법 위반’ 사이에서 고민했기 때문이다.

고민의 결과가 늘 같지는 않다. 2018년 반(反)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성향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에서 피살될 당시, EU 국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수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서를 냈다. 스위스는 여기에서 빠졌다. EU 소속이 아닌 중립국이라는 이유다. 반정부 성향 기자가 살해된 사건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 아닌가? 절대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중립국 스위스의 결정에는 국제법 외에도 다른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스위스에 정치적·경제적으로 가져다줄 이익이 그것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는 어떤 점이 스위스를 망설이게 했을까. 우선 스위스 은행에 들어오는 러시아 자금이다. 매년 스위스 은행에는 러시아인 개인 자본이 적게는 50억 달러, 많게는 100억 달러씩 들어온다(스위스 국립은행). 경제제재에 동참하면 이 돈을 포기해야 한다. 또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큰 스위스 원자재 시장도 고려했을 것이다. 스위스에는 원자재 거래 관련 기업 약 900곳의 본사가 모여 있다. 글렌코어, 베일, 카길, 비톨, 트라피구라 등 거대 다국적 기업의 본사가 다 스위스에 있다. 대단한 자원 보유국도 아니고 내륙 국가라 수송의 약점을 안고 있는 스위스에 원자재 기업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뭘까. 세금 혜택 때문이다. 제네바 칸톤(州)의 경우 매출의 80% 이상을 해외에서 내는 기업에 부과하는 법인세가 약 11%에 불과하다. 이 작은 나라에서 전 세계 면화의 65%, 철강과 곡물의 60%, 커피의 55%, 설탕의 45%가 거래되고, 이들 원자재 기업의 매출이 스위스 GDP의 약 4%를 차지한다(2019년 기준). 자원 강국인 러시아의 경우 원자재 거래의 약 80%가 스위스를 거쳐 이뤄진다. 심지어 러시아의 해저 천연가스 수송 프로젝트인 노르트스트림 2의 본사도 스위스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에 동참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다. 중립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나라가 먹고사는 일을 결정짓는 카드다. 그러면 스위스는 이번에 자국 경제를 망칠 각오를 하고 중립이라는 카드를 거둬들였을까? 아닐 것이다. 우크라이나 역시 자원 강국이며 스위스와 긴밀한 거래를 하고 있다는 점이 작용했을 수 있다. 오는 7월 스위스는 연간 우크라이나 개혁 콘퍼런스를 주관하기로 예정돼 있다. 이머징 마켓에서 사업을 따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전쟁으로 이 콘퍼런스가 예정대로 열릴지는 알 수 없으나, 스위스는 러시아 제재에 동참함으로써 미래의 우크라이나에 투자한 셈이다.

스위스의 보안업체인 크립토 AG 본사. CIA는 2018년까지 이 회사를 단독으로 소유하며 전 세계의 기밀 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했다. ⓒEPA

여기까지는 중립의 의도에 대한 의심이다. 또 하나 짚을 것은 중립의 실행에 대한 의심이다. 2020년 초 터진 ‘크립토 AG’ 사태는 스위스의 중립성에 국제사회가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 크립토 AG는 1952년 설립된 스위스의 보안업체로 암호장비를 만들어 판매한다. 수십 년 동안 세계 각국 정부가 이 회사의 장비를 구입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스위스의 뛰어난 기술력, 다른 하나는 스위스가 중립국이라는 점이다. 다른 나라와 이해관계가 없으니 암호장비에 대한 신뢰도가 더 컸다. 그런데 실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서독 시절 만들어진 독일 연방정보국(BND)이 오래전에 크립토 AG를 사들였다는 점이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독일 방송사 ZDF에 의해 밝혀졌다. BND가 1993년 손을 뗀 뒤로도 CIA는 2018년까지 이 회사를 단독으로 소유했다. CIA는 크립토 AG의 장비를 통해 70년 가까이 세계 120개국의 기밀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했다. 스위스 일부 정치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던 점까지 보도로 드러났다. 중립국에서 생산된 암호장비를 구입했던 국가들의 배신감을 짐작할 만하다.

“중립성은 스위스 평생의 거짓말”

당시 스위스 일간 〈데어분트(Der Bund)〉가 이 사건과 관련해 쓴 논평의 제목은 ‘중립성은 스위스 평생의 거짓말’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스위스인들이 신성시하는 중립성이라는 가치가 종종 위선적이라는 점을 이 사건이 드러냈다. 미국과 독일 정보국은 우리의 중립적 이미지로부터 직접적인 이익을 취했다. 중립성 때문에 우리의 암호장비가 그렇게나 많이 팔렸다. 스위스의 중립성은 토속신앙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 중립성을 이용하고, 사람들은 그 거짓말을 들어서 행복하다.” 의문이 생긴다. 정치인들은 그렇다 치고, 보통의 스위스인들은 정부의 중립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로 그 어떤 이해관계에도 영향받지 않고 객관적 자리를 지킨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을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애국심이나 오해일까, 아니면 순진함일까.

스위스는 중립국 타이틀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다. 2018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위스인의 95%가 자국의 중립 정책을 지지한다(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 연간 안보 보고서). 그러나 갈수록 양극화되는 세계정치와 계속 거리를 둔 채 중립이라는 주문만 달달 외울 수는 없다. 스위스 중립 정책에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변화가 필요하다. 미슐린 칼미레이 스위스 전 외무장관의 2020년 저서 〈중립성:신화에서 모델로〉가 힌트가 될 수 있겠다. 칼미레이 전 장관은 이 책에서 ‘적극적 중립성(active neutr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침묵한 채로 분쟁 현장에서 거리를 두는 것은 소극적 중립성이며, 사안의 맥락을 판단하고 국제법에 근거해 입장을 정하는 것은 적극적 중립성이다. 그는 “반정부 사우디아라비아 기자의 피살 사건을 수사하라는 요구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중립인가? 그 같은 중립으로 스위스가 이익을 얻을 수 있나?”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중립은 우리의 신뢰도와 설득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중립성은 법의 지지를 받는다. 국제법을 위반한 사안은 침묵하지 말고 비판해야 한다”라고 답한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중립이 아니라는 비판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데즈먼드 투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내 인종차별 반대 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남아공 성공회 대주교다. 그는 “부당한 상황에서 중립을 취한다면 압제자의 편을 들기로 선택한 것이다. 코끼리가 생쥐의 꼬리 위에 발을 올리고 있는데 당신이 중립이라고 말한다면, 그 생쥐는 당신의 중립성을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립은 불간섭이 아니다. 진정한 중립은 갈등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