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 점곡면 농촌마을. 의성은 전남 고흥, 경북 상주 등과 함께 귀농인이 많이 몰리는 지역이다. ⓒ시사IN 이명익

세상에 두 가지 커다란 거짓말이 있다. 하나가 ‘농자천하지대본’이다. 까마득한 옛 문헌부터 나온다. 또 하나는 ‘경자유전의 원칙’이다. 우리 헌법 제9장에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농민이 천하의 근본이었던 적이 없고, 농사짓는 사람만이 농지를 소유하는 세상도 없었다. 농민이 세상의 으뜸이라면, 이토록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질 리 없다.

2020년 기준 231만7000명.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농민의 이야기는 기억 속에 박제된 풍경이나 미디어 속 겉모습으로만 남아 있다. 조용한 농촌 마을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졌거나, 선산으로 가는 장례식 행렬을 농민들이 막아서고 통행료를 요구했거나, 혹은 농민들이 서울 여의도에서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만이 도시민의 관심을 끈다. 농촌에 대한 도시민의 태도는 무관심 혹은 혐오에 가깝다.

농촌의 현실은 밖으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 할 질문은 농촌 안에서만 맴돌다 마침내 농촌 안에서도 사라질지 모른다. 농민은 모두 가난할까? 귀농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농촌 소멸’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현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보고 들은 농민의 이야기를 작은 기록으로 남긴다.

“정 안 되면 또 농공단지에 나가야죠 뭐”

윤병화씨는 충북 보은읍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다. 도시에서 IT 프로그래머로 살다가 2014년 귀농했다. 그가 한창 일하던 시절 IT 노동자는 저녁도 주말도 없는 삶이었다. 귀농학교의 문을 두드렸다가 ‘코가 꿰였다’. 친환경과 생명농업을 배우고 귀농을 결심했다. 아파트를 처분하고 아내, 자녀 둘과 함께 보은으로 왔다.

농사는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1년에 150만원을 주고 땅 1000평을 임차해 사과 농사를 지었다. 농사는 초보 농사꾼의 생각대로 지어지지 않았다. 농사도 농사지만, 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땅을 사기는커녕 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왜 땅을 구하기 쉽지 않은지 그 이유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신통한 수입 없이 3~4년 동안 도시에서 번 돈을 까먹었다. 농촌이어도 4인 가족이 살려면 월 200만원은 필요했다. 결국 인근 농공단지로 출퇴근했다. 화장품 원료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고 월 200만원쯤 벌었다. 그렇게 생활비를 모은 뒤에야 다시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역시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 3000평 땅에 사과 농사를 지어 지난해 1000만원쯤 매출을 올렸다. 주로 도시 소비자와 직거래를 통해서였다.

그의 집 인근 과수원으로 갔다. 과수원 이름 ‘단이네 사과농장’은 자녀 이름에서 따왔다. 이 과수원에는 세 가지가 없다. 우선 제초제가 없다. 풀이 땅을 덮게 함으로써 자연 그대로 건강한 흙 상태를 유지하려는 ‘초생재배법’을 고집한다. 인위적으로 색깔을 예쁘게 하고, 과실을 크게 하는 착색제나 비대제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 은박지가 없다. 가을께 수확을 앞둔 상당수 과수원 바닥에는 은박지가 일제히 깔린다. 햇빛 반사를 통해 사과의 아랫부분까지 빨갛게 만들기 위한 시설이다. 수확이 끝나고 나면 이 은박지들은 농촌 쓰레기가 된다.

2014년 충북 보은으로 귀농해 사과 농사를 짓는 윤병화씨(왼쪽). 보은군 마로면에서 벼농사, 대추 농사를 짓는 윤태억씨(오른쪽). ⓒ시사IN 이명익

그런데 윤병화씨는 올해 은박지를 구입할 생각이다. 억지로 예쁘게 물들인 사과를 출하해 경매장에 보낼까 싶다. 소비자 직거래에만 의존해서는 수입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경매장에서 어떤 사과는 20㎏ 한 박스가 1만~2만원 헐값에 거래되는 반면, 예쁜 제수용 사과는 한 박스가 25만원에 거래되는 걸 목격했다. 농촌의 현실은 귀농 전 배운 농업 철학을 고집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정 안 되면 또 농공단지에 나가야죠 뭐”라고 그가 푸념하듯 말했다.

보은읍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마로면에서 농사를 짓는 윤태억씨는 지난해 2억원가량 매출을 올렸다. 유기농 벼로만 5000만원이 넘었다. 1953년생인 그는 이 마을 토박이다. 1975년 부모에게 땅 2000평을 물려받아 농사를 시작했다. 이후 차츰차츰 땅을 늘려가 지금은 본인 소유 2만 평에서 유기농 벼농사를 짓고, 비닐하우스 7개 동에서 대추를 키운다. 추석 전 이미 대추 1300㎏을 수확해 팔았다.

벌이의 절반은 한우 사육에서 나온다. 젊은 시절 시장에서 돼지 두 마리를 사서 키우기 시작한 돼지가 100마리까지 불어났고, 1985년부터 한우 사육으로 바꿔 지금은 한우 250마리 규모로 커졌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귀향해 한우 사육을 전담한다. 시설유지비, 비료·사료값 등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고 나면 지난해 매출액의 절반인 1억원쯤 순수익을 올렸다고 윤씨는 말했다. 온 가족이 부지런히 일한 끝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농촌이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말한다. 도로, 환경, 경제 상황 등 모든 면에서 그렇다. 힘든 농사의 상징이던 벼농사는 기계화 덕에 가장 손쉬운 농사가 됐다. 트랙터·이앙기·콤바인 등만 있으면 남의 손 빌리지 않고도 가능하다.

가장 큰 걱정은 농촌의 인구 소멸이다. 인구 소멸을 막기 위해 정부가 돈을 잘 써야 하는데, 기초생활수급자나 고령 노인 등에게 가는 돈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저런 지원금을 다 없애고 농촌 출산장려금을 대폭 늘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농촌에 빈부격차가 있다면,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농민’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과 농사를 짓는 윤병화씨는 지금 농촌에 전통적 의미의 ‘가난한 농민’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지금 농촌에는 웬만큼 버틸 수 있는 사람들만 남았다. ‘웬만큼 버티는’ 사람들이란,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토박이, 부모의 농사를 물려받은 승계농, 도시로 나갔다가 돌아온 귀향인 정도다. 이들의 공통점은 농촌에 물려받은 땅을 가졌다는 점이다. 차 없는 집을 찾기 어렵고, 대형 TV가 있고, 농한기에는 해외여행을 떠난다.

윤병화씨가 보기에 지금 가난한 농민은 일하기 어려운 고령자, 그리고 대체로 귀농인이다. 고령 농민은 그렇다 치고, 귀농인이 대체로 가난하다고? 귀농인은 50~60대가 주류다. 농촌 사회에서 한창 나이인 이들 귀농인이 마음먹고 일하면 잘살게 되는 것 아니었나?

의문을 품은 채 차를 돌려 경북 의성으로 향했다. 경북 의성은 전남 고흥, 경북 상주 등과 함께 귀농인이 많이 몰리는 지역이다.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에 사는 전민철씨는 18년 차 귀농인이다. 대학 시절인 1988년 농촌활동을 했던 의성으로 귀농했다. 현재 땅 7000평을 임차해 고추·마늘·홍화 등을 지어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에 납품한다. 2012년 한살림 소비자 조합원이었던 현영숙씨와 결혼해 함께 농사를 짓는다.

귀농인은 점점 산으로 간다

대개 귀농인이 그렇듯 전민철씨도 농사지을 땅을 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3년 전 밭작물을 키우기 위해 어느 과수원 땅을 5년 동안 빌렸다. 과수를 뽑고 시설을 정리하는 대신 2년 동안 임차료를 내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썼다. 그런데 땅 주인이 갑자기 임차료를 두 배로 올려달라고 했다. 계약서를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꼬치꼬치 따져봐야 이로울 게 없었다. 결국 임차료를 올려줬다. 전민철씨는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겠지만 이런 일이 농촌에서는 흔히 벌어진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귀농인의 어려움이 있다. 요즘은 계약서라도 쓰지만 과거엔 구두로만 합의하고 땅을 빌렸다. 주인이 변심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충북 보은에서 만난 한 귀농인도 이런 사례를 들려줬다. 그는 친환경 농업에 뜻을 두고 있었다. 1년에 60만원을 내고 땅 3000평을 빌려 감나무를 키웠다. 황폐한 땅을 건강한 땅으로 바꾸는 게 급선무였다. 직접 만든 녹비(녹색 작물로 만든 퇴비)를 뿌려가며 기름진 땅으로 바꿨다. 그런데 감 수확을 앞둔 시점에 주인은 풀이 너무 많이 자란다는 이유로 땅을 비우라고 했다. 억울했지만, 그 역시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귀농인은 점점 산으로 간다. 평지에 농사짓기 좋은 땅은 상당수가 토박이 농민의 차지다. 산비탈 등 열악한 땅을 구매해 농사를 짓는 이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곳은 멧돼지·고라니와의 전쟁터다. 평지에 땅을 구하지 못해 산으로 간 귀농인은 이중고를 겪는다.

경북 의성에서 고추·마늘·홍화 등 농사를 짓는 전민철·현영숙씨 부부. ⓒ시사IN 이명익

물론 귀농인 대다수가 가난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성공적으로 농촌에 정착한 사례도 셀 수 없이 많다. 대체로 귀농인은 영농 기술에 어두운 정착 초기에 어려움을 겪다가 농업 종사 기간이 길어지면서 소득이 늘어나는 경향도 있다.

문제는 땅이다. 농지 확보 문제가 늘 발목을 잡는다. 농사짓지 않는 땅을 농어촌공사에 수탁해 이를 빌려주는 농지은행 제도가 있지만, 큰 도움이 안 된다. 상당수가 논이어서, 소농이 원하는 밭은 드물다. 일방적인 계약 파기에도 임차료 일부를 돌려받는 것 말고는 구제책이 없다.

왜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땅을 구하기 어려울까. 우선 농지 가격이 높다. 2020년 농지 공시지가를 보면 전국 평균 농짓값은 ㎡당 3만7637원이었다. 평(3.3㎡)당 약 12만4000원이다. 경기도가 평당 약 34만2000원으로 가장 높았고, 전남이 평당 약 4만2000원으로 가장 낮았다.

그러나 이건 그야말로 공시지가 통계일 뿐이다. 실제 농촌에서 체감하는 농짓값은 이런 통계를 비웃는다. 도시 인근 농지는 평당 100만원을 넘는 곳이 흔하다. 농촌 마을에서도 평당 10만원 이하는 찾기 어렵다. 평당 10만원이라 쳐도 1000평을 사려면 1억원이 든다.

근본적인 문제는 농지 매물 자체가 흔치 않다는 점이다. 우선 무분별한 농지 전용(농지를 농업 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허가로 매년 전체 농지의 0.5% 이상이 사라지고 있다. 2012년 173만㏊(1㏊=1만㎡)였던 전체 농지는 2020년 156만㏊로 줄었다. 공장 및 건물 건축, 공공시설 조성 등의 영향이었다.

농촌에서 땅은 곧 생명줄이다. 웬만해선 잘 내놓지 않을뿐더러, 같은 마을 토박이나 문중 사람에게 판다. 대대로 물려온 땅을 외지인에게 팔지 않으려 한다. 십수 년을 함께 살아온 마을 귀농인에게 팔지 않던 땅을 수십 년 만에 귀향한 친인척에게는 판다. 외지인에게 판다 해도 시세보다 높은 값을 부른다.

이를 토박이 농민들의 욕심 탓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LH 직원들의 농지 투기 사건에서 보듯 농지를 투기의 대상으로 만들어 값을 올린 건 도시민이었다. 국회의원부터 장삼이사까지,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농지를 소유한 ‘부재지주’들이 땅값을 올렸다. 전민철씨 마을만 해도 절반이 부재지주의 땅이다.

부재지주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도 없다. LH 사건 이후 지엽적으로 관련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경기도 여주 한 마을의 경우 부재지주가 땅을 소유한 비율이 91%에 달한다는 조사도 나왔다. 고령 농민이 사망할 경우 외지에 사는 자식이 상속받는 현실을 볼 때 15년 안에 부재지주가 전체 농지의 84%를 소유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더욱이 상당수 부재지주는 땅 자체로 돈을 번다. 직불금 때문이다. 직불금은 쌀시장 개방 이후 농가소득 보전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데, 2020년부터 ‘공익형 직불금’ 제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소농에 대한 직불금 지급 등 약자에 대한 배려가 늘었지만, 골자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농지 면적에 따라 돈을 지급한다’는 게 핵심이다.

농지 규모에 따라 지급액에 차등을 두었으나 가장 높은 구간(6~30㏊)의 소유자도 1㏊(약 3000평)당 189만원을 받는다(농업진흥지역). 흔치는 않지만, 지급 상한선인 30㏊를 소유한 농민의 경우 매년 5670만원(30㏊×189만원)을 받을 수 있다. 농업법인 소유 땅의 지급 상한선은 50㏊까지 늘어난다. 1억원 가까운 금액이다. 2020년에 이렇게 지급된 직불금 규모가 약 2.3조원이었다.

잠깐, 직불금의 대전제는 ‘농사를 짓는 농민’이다. 그런데 어떻게 부재지주가 직불금을 받을까. 오래된 꼼수가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 농업특보였던 김영하씨는 저서 〈제2의 농지개혁〉에서 부재지주들의 직불금 부당 수령법을 고발한다. 이들은 과수 묘목을 심어두거나 벌통 10개를 가지는 등의 방법으로 농업인의 지위를 획득한다. 농사는 지역민에게 맡기고, 관련 서류는 자신이 관리하면서 직불금 등을 챙긴다.

경북 의성에서 농사를 짓는 권영섭(오른쪽)·김미령씨 부부. ⓒ시사IN 이명익

특히 농·축협 조합장 선거 때가 되면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농민이 아닌 유권자의 투표권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출마자들이 유권자에게 벌통 10개를 나눠줬다가 선거가 끝난 뒤 다시 팔아버리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농지를 둘러싼 이런 현실이 농촌 내부의 양극화를 부채질한다는 점이다. 땅의 격차가 곧 소득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농 기술이나 재배 작목 또는 판로 확보에 따른 차이도 크지만,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땅은 그렇지 않다.

도시보다 더한 소득격차

독자들께 한 가지 자료를 보여드리고자 한다. 충청북도 어느 마을의 살림살이 지표다(오른쪽 〈그림 3〉 참조). 이 마을에서는 전체 농가 가운데 열다섯 가구가 한 생활협동조합에 농산물을 출하한다. 2019년과 2020년에 이들 열다섯 농가가 각각 매출을 얼마나 기록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다만 이 자료는 하나의 표본일 뿐이다. 미미할지라도 이것 외에 다른 판로를 통한 농산물 거래가 있을 수 있어 여기의 수치가 해당 가구의 전체 매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지표는 우리 농촌의 중요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격차 그 자체다. 이 마을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40대 토박이 H씨는 2020년 1억5100만원을 번 반면 가장 적게 번 G씨는 530만원을 벌었다. 28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토록 커다란 차이의 원인은 결국 영농 규모다. H씨의 재배면적은 정확히 집계되지 않지만 마을에서 가장 큰 대농으로 불린다. 그에 비해 G씨는 약 3300평에 불과하다. H씨는 한우 사육으로도 큰 수입을 올렸다.

귀농인은 세 명인데 모두 연소득이 1000만원 이하다. 귀농 12년 차 F씨의 경우 재배면적은 제법 되지만, 철저한 친환경농업을 고집하는 탓에 수입이 적다. 50대 귀농인 M씨는 귀농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곳저곳을 떠도느라 아직 농촌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수입 ‘없음’은 두 명이다. 70대 토박이 N씨는 농작물에 문제가 생겨 출하를 하지 못했고, 40대 귀농인 O씨의 경우 개인 사정으로 타지에서 생활하느라 수입이 없었다.

두 번째 주목할 점은 들쭉날쭉한 한 해 수입이다. 2019년에 비해 2020년에 수입이 큰 폭으로 떨어진 사람이 많다. B씨와 E씨 등은 아예 반토막이 났다. 이것이 날씨와 자연환경 등에 좌우되는 농사의 직업적 특성이다. 2020년은 여름철 최장 장마 기록을 세운 해였다. 상당수 농작물에 치명적이었다. 소농이나 영세농으로서는 생존에 위협을 느낀 한 해였다.

이제 좀 더 광범위한 통계를 보자. 아래 〈그림 1〉은 경지 규모에 따른 농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경지 규모가 1㏊ 미만인 영세농과 소농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1~3㏊를 경작하는 중농은 21.5%다. 3㏊ 이상 농사를 짓는 대농은 전체 7.6%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농민의 90% 이상이 1만 평 이하 농사를 짓는 소농과 중농이다.

〈그림 2〉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도시 내부의 소득격차보다 농촌 내부의 소득격차가 심각하다고 말하는 자료다. 도시의 임금노동자 가운데에서는 가장 적게 버는 소득 1분위 집단이 월평균 132만원을 벌고, 가장 많이 버는 5분위 집단이 965만원을 벌었다. 농촌에서는 1분위 집단이 77만원을 번 반면, 5분위 집단은 842만원을 벌었다. 2019년 기준 상위 20% 농가의 소득이 하위 20% 농가보다 10.9배 높다는 뜻이다.

농사를 짓기 힘든 1인 고령 농가가 많은 농촌 특성상 이런 소득격차가 당연하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농가소득에서 정작 농업소득(농업 총수입에서 농업 경영비를 뺀 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뜻밖에 미미하다. 2019년 기준 24.9%에 불과하다. 상당수 농민이 부업 등 ‘농업 외 소득’에 의지해 살아간다. 앞서 윤병화씨처럼 농공단지 같은 곳에 나가 돈을 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27.3%를 차지하는 ‘이전(移轉)소득’이다. 이전소득은 직불금, 각종 보조금, 수당 등을 합친 것이다. 전체 농가소득에서 이전소득의 비중은 나날이 늘어가는 추세다. 직불금 등이 포함된 이전소득액은 대농일수록 높다. 여기에 더해 생산시설 현대화, 농식품 안전관리 등 이른바 ‘농업체질 강화’와 관련한 정부 예산(2021년 기준 3조4746억원)도 규모를 갖춘 소수 대농에게 집중된다.

이런 양극화를 초래한 것은 농민들이 아니다. 농산물 시장 개방 이후 동아시아적 소농 구조로는 농업에 미래가 없다며 대농 육성 정책을 펼쳐온 결과다. ‘농업 경쟁력 강화’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메아리는 도시보다 더한 소득격차로 되돌아왔다. 이런 격차는 농촌인구 소멸을 더욱 앞당길 수밖에 없다.

다시 농촌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농민들 역시 이런 양극화를 실감하고 있을까. 의성군 점곡면 토박이로 1만 평 규모 농사를 짓는 권영섭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부자 농민이라고 해도 속은 다 곯았다”라고 말했다. 농장 시설, 농기계 등에 잡힌 농협 대출금 때문이다. 빚내서 농사짓고, 빚 갚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젊은 사람이 가난하고, 나이 많은 사람이 부자인 현실은 맞다. 매출이 1억원 이하면 농사로 먹고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김병준씨는 의성군 단촌면에서 마늘과 벼농사를 짓는다. 대구에서 살다가 2008년 의성으로 귀농했다. 농촌살이에 재미를 붙여 지금은 ‘콩세알 농장’이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도 운영한다. 그 역시 자기 소유 땅은 없다. 2000평을 임차해 지난해 5000만원 정도 매출을 올렸다. 경비를 빼면 절반 정도가 실제 수익이다.

김병준씨는 소득격차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농사만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농업소득 외 나머지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농가가 대다수다. 겨울이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농민이 없다. 겨우내 현금을 마련해놔야 이듬해 봄부터 외국인 노동자 등 일손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산물 값은 제자리걸음이다. 김씨가 처음 마늘을 수확했던 2011년 마늘 1㎏에 1만원을 받았다. 올해도 마늘 1㎏은 1만원이다. 반면 인건비는 껑충 뛰었다. 10년 전 인건비가 하루 3만5000원이었는데 올해는 15만원까지 치솟았다. 코로나19 이후 외국인 인력 공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귀해지면서 봄부터 예약을 걸어둬야 가을걷이 때 겨우 일손을 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개별 농가를 넘어 한국 농업의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다.

청년 농부에게 희망을 찾으려던 시도는…

지난 3월 더불어민주당 외곽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에서 꽤 놀랄 만한 보고서가 나왔다. 〈농가 지원 재정, 조세지출의 농민기본소득으로의 전환에 관한 정책보고서〉다. 요약하면 이렇다. 현재 농민에게 가는 각종 소득지원금, 조세감면 항목 등을 ‘리셋’해서 농민 1인당 월 50만원씩 농민기본소득을 주자는 제안이다. 목표는 뚜렷하다. 농촌 내 소득격차를 해소하고, 귀농을 활성화해 농촌인구 소멸을 막자는 취지다. 2인 가구라면 월 100만원을 받는 만큼 유인 효과는 크다.

문제는 일부 농민들의 반발이다. 직불금, 각종 보조금 등에서 혜택을 입었던 대농의 반발이 뻔하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소장은 “농산물 시장 개방 이후 천문학적인 돈이 농촌에 투입됐지만 양극화만 심화했다. 기본소득을 받는 절대다수 농민이 지지할 것이다”라고 확신했다. 농민기본소득을 추진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됨에 따라 관련 논의도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있다(43쪽 기사 참조).

이제 글을 마무리할 때다. 취재의 마지막 여정은 전북 남원으로 잡았다. 젊은 여성 농민을 만나기 위해서다. 1992년생 권태경씨는 남원시 보절면 ‘시골딸내미’ 농장에서 유기농 쌀, 잡곡 등을 생산한다. 30년 전 일찌감치 귀농한 아버지 권승룡씨와 함께 농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했다. 청년 농업인을 길러낼 목적으로 1997년 설립한 한국농수산대학은 학비가 전액 무료인 대신 졸업 후 6년 동안 농사를 지어야 한다.

2008년 경북 의성으로 귀농해 벼농사, 마늘 농사를 짓는 김병준씨(왼쪽). 전북 남원에서 벼농사, 잡곡 농사를 짓는 권태경씨와 그의 아버지 권승룡씨(오른쪽). ⓒ시사IN 이명익

당사자인 만큼 권태경씨는 청년 농업인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농사짓는 청년 가운데 ‘탈농(농촌을 떠나는 것)’하는 이들 대다수가 부모의 농사를 이어받은 승계농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엔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내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라며 농업에서 손을 뗀다. 개중에는 영농 후계자 지원자금을 반납하면서까지 농촌을 뜨는 이들도 있다. 그는 “결국 농촌이 청년들에게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농촌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권태경씨는 “잘 모르겠다” “어려운 문제다”라는 말을 했다. 농업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는 결국 소농은 다 사라지고 마는 것 아니냐는 말도 했다. 취재 막바지 청년 농부와의 대화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한 것 같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그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보려는 청년 농업인이 정말 많아요. 그분들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의지가 꺾이지 않게끔 좋은 정책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ㅜㅜ.”

기자명 보은·의성·남원/글 이오성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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