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8일 농업·농촌 적폐 청산, 농정 대개혁을 촉구하는 시민농성단이 청와대 앞에서 29일째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시사IN 조남진

대통령 선거 말고 국회의원 이야기부터 해보자. 2020년 21대 총선은 농민들에게 충격적인 선거였다. 농민 출신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유례를 찾기 힘든 선거였다. 17~18대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나 20대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처럼 농민운동 출신의 상징적 인물은 아닐지라도, 농촌과 농업을 대변할 국회의원이 아무도 없다는 현실. 이것이 지금 우리 농업·농촌의 현주소다.

청와대와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청와대 농업비서관을 3개월 동안 공석으로 내버려뒀고, 지방선거와 총선 출마를 위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줄줄이 사퇴하는 바람에 최장 5개월 동안이나 장관 공백 상태를 맞기도 했다. 급기야 2018년 하반기 이 같은 농업 홀대에 실망한 농민들이 청와대 앞에서 한 달 동안 대규모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3월9일 대통령 선거는 이처럼 농촌·농업의 위상이 역대 어느 때보다 초라한 가운데 치러진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여야 양강 후보가 농촌·농업 공약을 발표한 것도 대선을 겨우 4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여러 분야 공약 가운데 가장 늦은 편에 속했다. 설 연휴 전인 1월25일 양 후보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 농촌·농업 공약을 발표했다.

이재명 후보는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대국 대한민국에는 농업인의 눈물과 희생이 함께하고 있다”라는 일성으로 공약을 발표했다. 이 후보의 공약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과일 바구니’다. 농어촌 기본소득, 농업 예산 비중 5%로 확대(현행 2.8%), 농지 소유 실태 전수조사, 식량자급률 목표 상향 조정, 유전자 변형식품(GMO) 완전표시제 등 쟁점이 됐던 이슈들을 모조리 바구니에 담았다.

농업 예산 5% 확충, 농지 전수조사, 여성 농업인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개정, GMO 완전표시제 등은 농민단체에서도 환영하는 공약이다. 특히 LH 사건에서 드러난 비농민의 농지 투기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농지 전수조사는 농민운동 진영에서 꾸준히 제기해왔던 정책이다. 이 후보는 공약 발표 현장에서 ‘부동산 감독원’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내놓았다. 농지 전수조사를 통해 부재지주를 적발하고, 임차농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강력한 농지 전수조사를 통해, 농촌 인구는 소멸하는데 정작 농사지을 땅은 부족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을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반면 이재명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본소득 공약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농민 1인당 연간 1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농어촌 기본소득은 이재명 후보가 경기도지사 시절 추진한 경기도 농민기본소득을 모델로 한다. 현재 소멸 위험지역 경기도 농민에게 1인당 월 15만원씩 연간 18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농어촌 기본소득 공약은 액수로 보면 경기도보다 후퇴한 데다, 제도 도입 여부는 각 지방정부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지방정부가 하겠다고 하면 중앙정부가 예산을 절반 정도 대준다는 식이다. 이미 각 지자체가 가구당 또는 1인당 지급하고 있는 농민수당(지자체별로 연간 약 30만~120만원 수준)과 비교해도 현격한 차이가 없다. 전 국민 기본소득 도입 이전에 농어촌에서 일종의 ‘기본소득 실험’을 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하다. 이 정도 제도로 인구를 농촌으로 유입시키고, 농촌 소멸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농촌을 재생에너지 산업의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공약 역시 솔깃하기는 하지만, 현장 체감도는 다르다. 마을공동체가 주도하는 태양광과 풍력 재생에너지 사업으로 ‘돈 버는 에너지 마을’을 조성해 농민에게 햇빛·바람·바이오에너지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이 공약의 골자다. 그런데 지금 농촌 현장에서는 재생에너지 산업 시설을 반대하는 투쟁위원회의 목소리가 높다. 외부에서 온 재생에너지 시설 업자가 땅 주인과 계약을 맺으면서 정작 농사지을 땅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을 기후위기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 아니냐는 피해의식마저 생기고 있다. 농민들의 우려를 살피지 않은 재생에너지 공약은 자칫 기후위기 대응과 농심, 둘 다 놓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윤석열 후보는 ‘튼튼한 농업, 활기찬 농촌, 잘사는 농민’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윤 후보의 농촌·농업 공약을 한마디로 줄이면 ‘백지수표’다. 수표에는 ‘직불금’이라는 세 글자가 적혔다. 청년농업인 직불금, 식량안보 직불금, 탄소중립 직불금, 조건 불리 지역 직불금 등 상당수 공약이 직불금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윤 후보의 공약 첫머리도 ‘농업 직불금 규모 2배 확대’이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직불금 제도는 쌀시장 개방 이후 농가소득 보전을 위해 만들어졌다.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농지 면적에 따라 돈을 지급한다’는 제도다. 문재인 정부에서 ‘공익형 직불금’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소농에 대한 지원책이 늘었지만, 골자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넓은 땅에서 농사짓는 농민일수록 더 많은 직불금을 받는다. 농지 규모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나 최소 1㏊(약 3000평)당 189만원을 받는다(농업진흥지역). 흔치 않지만, 지급 상한선인 30㏊를 소유한 농민의 경우 매년 5670만원(30㏊×189만원)을 받을 수 있다. 2020년 직불금 규모가 약 2.3조원이었는데, 윤석열 후보의 공약은 이를 약 5조원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직불금 제도가 농촌 내 소득격차를 더욱 부채질한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점이다.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일수록 수확한 농산물로 인한 농가소득이 많은데, 여기에 직불금까지 땅 크기에 비례해 받게 된다. 이런 직불금 수령자 가운데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직불금만 타가는 부재지주도 많다(〈시사IN〉 제737호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2021 농촌 리포트’ 기사 참조).

윤석열 후보의 공약 발표 기자회견에서도 직불금 확대가 농촌 내 소득격차를 심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다. 윤석열 후보는 “일반론을 말씀드린 것이다. 농가 소득보장을 위해 (직불금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라고만 답했다. 진전된 답변은 윤석열 후보 곁에 배석한 한두봉 고려대 교수(식품자원경제학과, 윤석열 캠프 농림해양수산정책분과위원장)로부터 나왔다. 한 교수는 “경지 면적이 적은 농민에게 더 많은 직불금이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윤석열 후보의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농지 면적과 정비례 구조인 현행 직불금 지급 방법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것인지, 그럴 경우 기존 농민의 반발은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2ha(약 6000평) 이하 농사를 지어온 70세 이상 고령 농민이 은퇴하고 자신의 땅을 농지은행에 맡기면 10년 동안 월 50만원을 주겠다는 ‘농지이양 직불금’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농지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 청년 농업인이 고령농이 내놓은 농지를 사용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취지인데, 이는 사실 새로운 공약이 아니다. 이 제도는 ‘경영이양 직불금’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1997년부터 실시된 정책이다. 고령 농민이 자신의 땅을 50세 이하 농업인에게 매도하거나 임대하는 경우 매월 25만원(ha당)을 지급해왔다.

그런데 경영이양 직불금을 수령한 농민이 영농에 복귀하는 사례가 꾸준히 늘면서 문제가 됐다. 영농 활동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가치고 연간 몇백만 원 수준의 돈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017년부터는 영농에 복귀한 농민에게 그동안 지급했던 직불금 전액을 환수하는 등 각종 규제조치까지 시행하다 결국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한 제도다. 윤석열 후보는 은퇴 후에도 1000㎡(약 300평) 이하 땅에서는 자급을 위해 농사를 짓도록 하겠다고 부연했지만, 농지이양 직불금 공약 자체가 이미 한물간 제도의 재탕이라는 비판은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5년 전 야심찼던 공약을 돌이켜보면

가장 일찍 농촌·농업 공약을 낸 이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다. 지난해 11월11일 농민의날을 맞아 심 후보는 ‘농·산·어촌 녹색대전환’ 공약을 발표했다. 심 후보가 가장 무게를 둔 대목은 ‘식량주권’이었다. 기후위기와 감염병 시대 요소수 대란을 뛰어넘는 지구촌 식량대란에 대비해 국내 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심상정 후보는 현재 21% 수준인 곡물 자급률을 30%까지 끌어올리고, 식량자급률 목표를 법으로 정해 매년 자급률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들고나온 제도가 ‘농지총량제’다. 스위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농지총량제는 일정 비율의 농지를 건축 등 다른 용도로 전용하지 못하게끔 못박아두는 정책이다.

1인당 월 30만원씩 농어민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도 들고나왔다. 이재명 후보의 연간 100만원과는 차이가 있다. 정의당은 “1인당 연간 100만원, 월 8만원 정도의 기본소득으로는 농어촌 주민의 삶을 개선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나마 여건이 허락하는 지자체부터 시행하겠다는 것은 지역차별을 심화시키고 지방 농정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며 이재명 후보의 공약을 비판했다. 한편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2월3일 현재까지 농촌·농업 공약을 따로 발표하지 않았다.

지금 농촌의 최대 화두를 말하라면 ‘농촌 소멸’이다. 기본소득부터 직불금까지 모든 공약이 농촌 소멸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 역시 ‘사람이 돌아오는 농·산·어촌’이었다. 소농에 대한 직불금 지급 등 몇몇 유의미한 정책이 실현되기는 했지만, 5년 전 야심찼던 공약을 돌이켜보면 농민들의 심정은 공허하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는 농민들의 공허한 가슴에 못을 박는 결정을 내렸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지난해 12월 공식 선언했다. CPTPP는 일본·오스트레일리아·멕시코 등 11개 국가가 참여한 초대형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중국 등도 가입을 신청하면서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

관세 철폐율이 96%에 이르고 수입국의 검역 조건을 완화하는 CPTPP는 한국 농업에 비극이다.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칠레 등 농업 강국이 한국 시장의 추가 개방을 압박할 것이다. 식량주권이나 자급률 상승 같은 공약들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조만간 농민들은 ‘CPTPP 가입은 농업 포기 선언’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설 것이다. 농촌 소멸을 막겠다는 공약과 농업 포기 선언이라는 반발이 어지럽게 휘날리는 대통령 선거의 계절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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