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정약전·이청 지음
정명현 옮김
서해문집 펴냄

사실에 갈증이 날 때가 있다. 의견들에 지겨워졌을 때다.

내 생각은 이렇소, 네 생각은 틀렸소 싸우는 글들을 보다가 사실로만 꽉 들어찬 글을 만나면 뻣뻣하던 뒷목에 긴장이 풀린다. 사실이 주는 안식을 얻고 싶을 때 집어 드는 책이 있다. 〈자산어보〉이다.

해양생물 226종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고 모양과 성질을 설명한 책 〈자산어보〉는 소설과 영화로도 각색되었다. 그만큼 실학자 정약전과 그의 아우 정약용, 그들을 둘러싼 조선 후기 정치와 시대상을 여러 버전으로 읽어내기 좋은 재료이다.

하지만 나는 〈자산어보〉를 텍스트 그 자체로 더 좋아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이다. “껍데기가 돌처럼 단단하며, 밖은 거칠고 속은 매끄럽다. 꼬리의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서너 바퀴의 골을 만드는데, 크기가 줄어든 골이 돌아 나가면서 점점 더 커진다(153쪽, 고동류).” 또 이런 문장은 어떤가. “몸통은 정해진 법식이 없이 조각구름 같기도 하다. 껍데기는 매우 두터운데 종이를 겹쳐서 바른 것처럼 첩첩이 붙어 있다(148쪽, 굴).” 이런 문장들도 재미있다. “형상은 오래 설사한 사람의 삐져나온 항문과 같다(151쪽, 말미잘)” “강항어(참돔)가 해파리를 만나면 두부 먹듯이 먹어버린다(122쪽, 해파리).”

정약전은 바다생물이 물속에 있을 때의 본모습과 생태를 묘사하고 물 밖에서 그것을 해부해본 결과를 설명하며 인간 삶에서의 쓰임을 꼭 덧붙였다. 식용으로 쓸 수 없는 생물도 보리밭 거름으로 쓴다든가, 가죽이 단단해서 살림살이를 쌀 수도 있다든가, 하다못해 “쓰이는 곳은 아직 듣지 못했다”라는 말이라도 적어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먹어보고 그 맛을 기록했다. 그게 식용 생물이든 아니든.

그 사실의 문장들을 읽으며 실학자 정약전이 아닌 저널리스트 정약전을 떠올렸다. 감히 ‘정약전 선배’라고 불러보고 싶어졌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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