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병동의 모습을 수성펜으로 기록한 황성정 작가의 작품. ⓒ스페셜아트 제공

2021년 상반기에 개최된 많은 전시 중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는 가히 인상적이었다. 전시는 발달장애 작가 16인, 정신장애 작가 6인의 예술 세계를 작품과 영상, 아카이브 형식으로 조명했다. 예술성은 물론이고 전시의 공공성과 시의성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었다. 전시 제목은 참여 작가 김동현의 말에서 나왔다. 종이를 덧대어가며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가 답했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이에요.” 지면의 한계를 넘어서며 길을 내가는 방식에서 엿보이는 담담함에 먹먹해지는 건 장애 미술이 처한 현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미술’함을 위한 현실도 만만치 않으니 현실에서 통용되는 ‘장애 미술’함은 더욱 열악하다. 미술계 진입 문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그 문턱이 어디인지조차 불확실하다. 작가비 산정, 작품가 산정, 작품 대여비 산정조차 기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준을 직접 소명하라는 요청에 직면하기도 한다. 한국장애인미술협회에 장애미술가로 가입할 수 있지만, 미대 학위가 없는 경우 한국미술협회에 가입하기는 요원하다. ‘예술이 가장 편견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과거형으로 말을 맺는 발달장애 작가 부모의 말은 현재형으로 마주하는 편견을 함축한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기초자치단체 산하 문화재단의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지원사업 등을 통한 창작 지원이 있으나 장애와 비장애의 빗장을 가볍게 넘나들기 어렵다.

이처럼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똑같은 조건이 삶과 미술에 이중으로 내려앉은 작가가 있다. 조소를 전공한 황성정은 불의의 사고로 단기기억상실 진단을 받았다. 폐쇄병동에서 생활하는 그에게 허용된 도구는 종이와 수성펜 정도다. 안전을 이유로 침대가 아닌 매트리스를 쓰는 병동 사람들의 하루가 종이에 담긴다. 하루라고 하지만 드로잉에는 잠든 이들의 모습이 대다수다. 충실한 기록이 병동의 현실을 대변한다. 드로잉 뒷면에는 그림을 그리다가 떠오르는 생각, 하고 싶었던 말들을 잊지 않기 위한 글을 남긴다. 글에는 하루의 분·초를 기록하고 몇 분 후, 며칠 후, 다가올 전시를, 5년 후를 상술하고 담담히 계획한다. 기록과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 똑같다”라고 쓴다.

균열을 내려 분투하는 이들

그만의 특수함을 넘어서 이 시대 폐쇄병동의 상황을 그의 작업에서 보고 느낀다. 좁혀보면 코로나19 시대 병동의 단면이지만 정신병동의 역사화이자 정물화·초상화에 가깝다. 그러나 어제·오늘·내일이 지독하게 닮아 있음에 균열을 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정책이나 제도가 견인하지 못한 빈틈을 여러 장애 미술 단체와 기관이 분주하게 메운다. 황성정은 장애예술인 고용 지원을 위한 기업 사회공헌활동(CSR)의 일환으로 고용되어 작가로 활동 중이다. 시선의 자리를 묻는 지면을 빌려 시선의 자리에 우선순위를 매겨온 관습에 질문을 던져본다.

기자명 김현주 (독립 큐레이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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