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7일 카불 파키스탄 대사관 인근에서 무장한 탈레반 병사가 반파키스탄 시위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AP Photo

9월7일 아프간 탈레반은 차일피일 발표를 미뤄오던 탈레반 2기 정부 인선을 공표했다. 장관 19명, 차관 7명, 정보국장, 군 총사령관 등을 모두 합쳐 총 34명으로 구성된 ‘과도정부’가 일단 출범했다. 여성은 전무했다. 탈레반 스스로 강조하던 “다양하고 포괄적인 정부” 구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대신 철저한 코드 인사를 보였다. 이날 카불 미디어 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연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히드는 이번 인선이 “과도정부”임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또 장관직은 정치적 포지션으로 두고, 추후 임명할 차관직을 전문가 중심으로 인선할 것이라 덧붙였다.

이번 발표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군 총사령관을 맡은 카리 파시후딘 바다샤니다. 그는 탈레반 주류를 구성하는 파슈툰족이 아니라 타지크계 탈레반으로 북부 바다흐샨 지방 출신이다. 9월6일 ‘반(反)탈레반’ 세력으로 규합된 국민저항전선의 마지막 저항지였던 판지시르가 작전 4일 만에 탈레반으로 넘어가기까지, 이 판지시르 작전을 이끈 이도 바로 파시후딘 사령관이다. 이번 작전 직후 그의 사망설이 돌았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2019년 9월6일에도 아슈라프 가니 정부 아래 국방부 트위터 계정은 그가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자랑스럽게 알린 바 있다. 가짜뉴스였다. 파시후딘 사령관을 죽였다는 발표한 공습에서 도대체 누가 이들을 대신해 죽었는지 아프간 언론인과 시민들은 묻고 또 묻는다. 비단 파시후딘 사령관 만이 아니다. 탈레반 강경분파로 통하는 하카니 네트워크의 여러 인물들도 공습으로 한번씩은 사망 보도가 나온 이들이다. 탈레반 강경 분파로 통하는 ‘하카니 네트워크’의 여러 인물들도 공습으로 한 번씩은 사망 보도가 나왔다. 그들이 지금 모두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 정부가 됐다.

탈레반 정권이 파시후딘을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건 가볍지 않은 의미다. 우선, 전통적으로 탈레반 강성 지역이 아닌 북부 일대의 ‘전략적 확장성’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더 나아가 북부를 장악하지 못했던 탈레반 정권 1기(1996~2001) 때와 달리, 이번 2기 정부에선 아프간 전역이 탈레반 통치 아래 놓여 있다는 자신감도 담고 있다.

20년 만에 카불에 재입성한 탈레반은 1990년대 말 1기 집권 때와 달리 파슈툰족뿐 아니라 타지크계, 우즈벡계 등 여러 아프간 종족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북부 바다흐샨 출신 타지크계가 많다. 아프간 이슈를 치밀하게 분석해온 카불 소재 싱크탱크 ‘아프간 분석 네트워크’는 2017년 1월 보고서에서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지난 2년간 ‘타지크 탈레반’이라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아프간 보안군에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아프간 분석 네트워크는 그 비결을 병사 모집 전략의 변화라고 분석했다. 1990년대와 달리, 반군 시절 탈레반은 ‘비(非)파슈툰’ 탈레반 모집을 선호했고, 이들을 각 지방의 탈레반 정부 요직에 앉혔다. 같은 전술은 우즈벡계가 많이 거주하는 아프간 북부 파르야브, 사르에풀 지방 등에도 적용됐다. 여러 해 동안 현지 우즈벡계로 탈레반 사병과 특수부대를 채우고, 아프간 북부와 국경 넘어 파키스탄에서 우즈벡계 아프간인들이 다니는 파키스탄 내 마드라사(종교학교)를 적극 활용했다. 아프간 정부에 위협이 된 건 물론이고 악명 높은 우즈벡계 군벌인 압둘 도스툼(전직 아프간 제1부통령)에게도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지역과 종족이 다양한 아프간 지형을 비교적 잘 활용한 전략을 펼친 것이다. 아프간 침공 결정 문제부터 전쟁 기간 내내 아프간 현지의 복잡하고 다이내믹한 문화 지형을 이해하지 못했던 미국의 실패가 더욱 뼈저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어찌 보면 탈레반은 과도정부에 반영하지 못한 ‘포괄성’을 자기 조직에는 유연하게 활용하며 진화해온 셈이다.

탈레반 군 총사령관 카리 파시후딘 바다샤니. ⓒSAMAA

미국이 존재하지 않는 적과 전쟁하던 시기

지난 20년간 탈레반이 몸집을 불리고 성장하는 데 동력이 된 요인은 더 있다. 바로 공습에 의존한 미군의 전쟁 방식이다. 아프간의 대(對)탈레반 작전은 공습에 상당히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 공습은 주로 미군에 의존했다. 공습이 민간인 살상을 피하기 어려운 전쟁 방식이라는 데 치명적 약점이 있다. 민간인 살상을 두고 공습 당사자들과 일부 언론은 “부차적 피해(collateral damage, 공격 대상 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주변부 민간인 살상을 일컬을 때 주로 쓰는 표현)”라는 표현을 자주 써왔다. 그 부차적 피해를 당한 이들이 탈레반 병사 모집에 큰 동력이 됐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국 소재 NGO ‘무장 분쟁 행동’이 유엔 자료 분석을 토대로 올해 5월6일 발표한 공습 현황을 보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 동안 아프간 사상자 3977명 중 40%에 달하는 2122명이 민간인이다. 이 가운데 40%(1598명)가 어린이다.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 62%가 미국과 그 동맹국에 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습을 포함한 모든 전쟁 행위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로 봤을 때는 50% (3977명 중 2000명)가 외국 군대에 의해 야기됐다.

이러한 공습은 탈레반이 무서운 속도로 영토를 장악해 들어가던 전쟁 막바지에도 계속됐다. 전세가 급격히 기울자 다급해진 아프간군과 미군은 전략폭격기 B52기까지 띄워 칸다하르, 라슈카르가, 헤랏 등지에 공습을 퍼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8월8일 헬만드(탈레반 강성 지역)를 공습할 땐 헬만드 수도인 라슈카르가 2지구의 샤히드 안와르 칸 고등학교, 7지구에 위치한 정부 병원을 폭격했다. 아프간 언론 〈톨로뉴스〉는 현지 관료를 인용해 ‘공습 전후 이틀 동안 민간인 2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탈레반의 카불 함락 직전 미군의 공습이 지원되지 않자 아프간군도 힘을 쓰지 못한 일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따지고 보면 미국과 국제사회는 ‘탈레반 없는 아프간 재건’의 골든타임을 오래전에 놓쳤다. 9·11 공격 후 한 달 만인 10월7일 미국이 아프간 북부의 무장세력인 ‘북부동맹’ 군벌들과 적극 손을 잡고 치른 전쟁에 탈레반은 속수무책이었고 한 달 만에 패색은 자명했다. 〈뉴욕타임스〉 카불 지국장을 지낸 알리사 루빈은 〈뉴욕타임스〉 8월23일자 ‘아프간 전쟁은 일어났어야 했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중요한 역사의 장면들을 짚었다. 2001년 11월 탈레반 지도부가 미래의 대통령이 될 하미드 카르자이와 접선하고 협상을 시도했던 상황을 전달했다는 것. 알리사에 따르면 당시 아프간의 유엔 정치팀과 일했던 아프간 전문 미국 정치학자 바네트 루빈은 “탈레반은 완전히 패배했고 다른 요구는 없었으며 오직 사면만 바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투항의 메시지가 중재자를 통해 카르자이와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2015년 사망) 사이를 오갔다. 카르자이는 탈레반 투항 의사를 ‘탈레반 없는 아프간 미래 건설의 기회’로 만들려고 했으나 워싱턴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2001년 11월19일 펜타곤 브리핑에서 “미국은 투항하는 자와 협상하지 않는다. 물라 오마르를 생포하거나 없애고 싶을 뿐 그가 아프간 어디에서도 살아 있도록 두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물라 오마르 비서를 지냈던 압둘 하이 무트마인의 책 〈탈레반:내부로부터의 비판적 역사〉를 보면 물라 오마르가 흩어져 있던 탈레반을 다시 모으기 시작한 건 2002년 5월이다. 겨우 10명 내외가 모여들어 조직을 다시 추슬렀다. 탈레반이 본격적으로 재결집한 시기는 대략 2004년 전후다. 탈레반이 대패한 시점부터 이 3년 동안 아프간 전쟁은 미군의 일방적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프간 시골 구석구석을 훑어온 기자 아난드 고팔은 9월1일자 미국 언론 MSNBC와의 인터뷰에서 “2001~2004년 시간을 떠올려보면 외국 군대에 대한 반감이나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에 대한 반감 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미군에 의한 체포와 고문, (CIA 고문 구금 시설이 있는) 바그람 공군기지나 관타나모로 이감은 계속됐다. “미국이 존재하지 않는 적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다. 무고한 시민들이 고통받았고, 그게 바로 탈레반 부활을 가능케 했다.” 아난드의 말이다.

2004~2005년께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선 탈레반. 그들은 군사작전은 물론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탈레반 지방정부’를 세우며 정치를 했다. 앞서 언급했듯 북부 타지크계나 우즈벡계 주류 지역에는 그 주류들을 ‘탈레반 정부’에 배치했고, 이들 상당수는 탈레반 사령관들이다. 2020년 5월26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남부 14개 지방과 동남부 20개 지방으로 나누고, 동부는 하카니 네트워크가, 남부는 물라 오마르의 아들이자 이번 과도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물라 야쿱 우마리가 맡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8월26일 카불 공항 외곽에서 발생한 IS-K 테러로 부상을 입은 시민이 인근 병원 침상에 누워 있다. ⓒAP Photo

탈레반이 그래왔듯 IS-호라산도

2002년 10명 내외로 초라하게 모였을 탈레반은 19년이 지난 오늘 사병 규모만 5만~6만명으로 추정되는 조직이 됐다. 봉급은 없다. 다만 교통비 등 실비는 탈레반이 댄다. 파트타임 전사는 십만 단위로 알려져 있고, 엘리트 부대 두 개까지 갖추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드리 313 부대’다. 자살테러 공격과 집중 시가전 훈련을 받고 자살테러 공격 미션에 투입돼온 일종의 ‘순교 여단’ 엘리트 부대다. 약 5000명 대원이 등록해 있다. 탈레반 최고 지도자 말라위 히바툴라 아쿤드자다도 아들을 자살테러 공격에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드리 313 부대는 하카니 네트워크의 창시자 잘랄루딘 하카니의 아들 바드루딘 하카니(2012년 드론 공격으로 사망)가 창시했다고 알려졌다. 미군이 철수한 카불 공항으로 미군이 남긴 군복과 장비를 몸에 걸치고 공항으로 진입한 것도 바드리 313 부대원들이다.

또 다른 엘리트 부대는 ‘레드 유닛’이다. 2015년 이슬람국가(IS) 아프간 지부로 등장한 ‘IS-호라산(이하 IS-K)’이 탈레반과 부딪치자 필요에 의해 결성된 탈레반 특수부대로 알려졌다. 아프간 심층기사를 종종 실어온 온라인 매거진 〈뉴스라인〉이 9월3일자에 아프간 기자 페젤미날라 카지자이의 글을 게재했다. 기사에 따르면, 2015년 하반기 아프간 동부 낭가르하르의 아친 지구에서 IS-K에 의한 납치가 횡행하면서 탈레반과 IS-K의 충돌이 시작됐다. 아친이 IS-K 휘하에 넘어가자, 탈레반은 특수부대 결성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렇게 결성된 레드유닛이 대 IS-K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지난 8월26일 카불 공항의 IS-K 테러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최근 안티 탈레반 성명까지 발표한 IS-K는 탈레반이 기존 정권에 그래왔듯, 탈레반 정권에 자살테러 공격을 비롯한 여러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미 카불에 IS-K 점조직이 네트워크로 퍼져 있다는 안보 전문가들의 분석도 나왔다. IS-K는 이제 탈레반 정권 안보에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 20년이 선사한 세계는 더 급진화했고, 더한 테러 위협에 노출돼 있다.

기자명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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