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1일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화상회의를 통해 현안 법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REUTERS

“바이든이 이럴 줄은 몰랐다.” 지난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버니 샌더스 후보가 무료 대학, 정부 보육, 부자증세 등을 꺼내 들었을 때 그를 ‘위험한 사회주의자’로 몰아붙였던 민주당 온건파는 요즘 무척 당혹스럽다. 민주당 온건파들이 ‘샌더스 불가론’을 유포하면서 내건 대안이 바로 온건한(?) 조 바이든이었다. 그렇게 선출된 바이든이 샌더스나 추진할 만한 의제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바이든은 지루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임기 초부터 6조 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안을 꺼내 들며 ‘B3 플랜’으로 불리는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경제 어젠다를 착착 실천해나가고 있다. 바이든이 관련 세부 계획을 발표할 때마다 “좌파도 놀랄 정도로 진보(〈뉴욕타임스〉)” 같은 평가들이 나온다. 바이든은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코로나19 팬데믹을, ‘국가를 구하고(Rescue), 국가를 복구하며(Recover) 국가를 재건(Rebuild)한다’는 B3 플랜의 거대한 목표를 성사시키는 기회로 활용하는 듯하다.

“닉슨만이 중국에 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냉전 시대에 중국을 향해 문을 열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빗대어 정치계의 큰 변화를 표현하는 수사다. 요즘은 “바이든만이 노르웨이에 갈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바이든만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유사한 ‘사회주의’ 정책을 미국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뜻으로 통한다. 그러나 바이든의 진화 능력에 놀랄 필요는 없다. 바이든은 대선 공약을 그저 착실히 지키고 있을 뿐이다. 으레 공약에 그치고 말겠지 생각했던 유권자들이 그를 못 알아본 탓이다.

바이든 정부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더 나은 재건-B3 플랜’은 미국 구조 계획(The American Rescue Plan), 미국 일자리 계획(The American Jobs Plan), 미국 가족계획(The American Families Plan)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구조 계획은 바이든 취임 직후인 1월14일에 발표된 1조900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법안이다. 공화당의 격렬한 저항에도 지난 3월6일 50대 49로 상원을 극적으로 통과했다. 이후 하원을 거쳐 세계보건기구(WHO)의 팬데믹 선언 1주년인 3월11일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을 받았다. 이에 따라 중·저소득 미국인들은 1인당 1400달러의 현금, 실업자들은 실업수당이 지급되는 동안 주당 300달러의 추가 수당, 그리고 일하는 미국인들은 긴급 유급휴가를 신청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저소득 세액 공제, 임대주택 지원, 공립 초·중·고교와 대학에 모두 1700억 달러의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막대한 실업급여 때문에 경제가 마비되었다고 공화당은 비판했지만 오히려 일자리 수가 증가하면서 경제회복이 가시화되었다.

B3 플랜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일자리 계획은 지난 3월31일에 공개되었다. 바이든은 이에 대해 “국가경제를 전면 개편하는 혁신적 노력”이라고 말했다. 일자리 계획의 목표는, 공공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려 국가 기반시설(도로, 교통, 수도관, 광대역 통신망) 구축 및 기후변화 문제 해결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자리 수백만 개를 창출할 수 있었다. 세 번째인 가족계획은 교육 및 아동복지 관련 국가 프로젝트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계획들을 실현하려면 예산이 필요하다. 바이든 행정부는 ‘기간사업 투자와 일자리 법안’을 통과시켜 6조 달러 규모의 예산을 조달하려고 했다. 연 40만 달러 이상을 버는 부자들의 세금을 늘리고 법인세율을 21%에서 28%로 높이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공화당은 ‘사회주의 법안’이라며 법안 자체를 반대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이견이 있어 난항이 예상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인프라 투자를 가능하게 할 진보적 법안은 상원 통과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초당파 그룹’이 등장한다.

바이든의 투 트랙 전략

양당제인 미국 의회에서는 가끔 당파를 초월한 초당파 그룹 차원에서 합의가 이루어져 주요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될 때가 있다. 행정부 기능이 순조롭게 가동되기 어려운 오바마·트럼프 행정부의 말기에도 의회가 초당파 그룹을 통해 여러 주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오바마 정부 시절엔 ‘모든 학생의 성공을 위한 교육법’ ‘미국 지상 교통 개선법(Fast Act)’ ‘마이크로비즈 청정 해역 법안’, 트럼프 시대엔 ‘돈세탁 방지법’ ‘청정에너지 연구 투자 법안’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초당파 그룹을 흔히 ‘비밀 의회’라고 부른다. 비밀리에 결성된 집단이란 의미가 아니다. 당파 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적으로 필요한 정책이 통과되기 힘들 때 ‘은밀한 논의를 통해 해결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비밀 의회가 생산적으로 작동해서 뭔가 이루어지면 이로 인해 대통령과 여당의 입지가 상승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야당 의원들로서는 비밀 의회에 참여할 인센티브를 느끼지 못한다. 이에 따라 법안을 발의한 정당의 의원들이 해당 법안의 통과로 정치적 이익을 얻을 만한 상대 정당 의원을 물색한 뒤 은밀하게 협의해서 초당파 그룹을 형성한다. 상대 정당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을 초월한 의원을 찾아 그의 정치적 이익에 부합할 만한 지점을 부각해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다. 초당적 합의를 하려면 법안을 당파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 또한 중요하다. 지난해 통과된 에너지 법안은 ‘탄소제로 에너지 연구’에 예산을 투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파적으로 민감한 ‘기후 법안’이나 ‘그린 뉴딜’ 같은 표현을 삼갔다.

의회를 연구하는 학자인 프랜시스 리에 따르면, 대통령이 특정한 정치적 의제를 옹호하는 경우 의회에선 당파적 싸움이 더욱 극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입법 발의에 대통령의 참여가 늘면 정치적 양극화가 깊어지고 초당적 성향이 약해진다는 연구도 있다. 이번처럼 공화당이 사활을 걸고 반대하는 천문학적 예산의 인프라 법안을 대통령이 들고나오면, 초당파 그룹이 구성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6월24일 초당파 그룹과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발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바이든의 투 트랙 전략이 큰 몫을 했다.

일단 전체 법안에서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비판받는 사업의 예산(3조5000억 달러)을 떼어냈다. 그리고 나머지 2조2000억 달러가 소요되는 ‘노후한 물리적 인프라 교체’ 부분은 초당파 그룹을 통해 공화당과 합의할 수 있을 것으로 상정했다. 공화당의 합법적 의사진행방해인 필리버스터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공화당 의원 중 일부를 초당파 그룹으로 빼내야 했다. 상원을 민주당과 공화당이 50대 50으로 분점한 상황에서 적어도 60명 이상의 찬성을 확보해야 법안 통과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공화당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트럼프는 “애국자들이 응징할 것”이라며 법안에 협조적인 공화당 의원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비밀 의회는 잘 작동했다. 초당파 그룹에 합류하는 공화당 의원이 하나둘 늘어난 것이다. 결국 공화당 의원 11명과 민주당 의원(친민주당 무소속 1인 포함) 10명, 모두 21명이 초당파 그룹을 형성하면서 7월28일 협상안이 타결됐다.

총 2702쪽에 달하는 이 합의안에는 비록 원안의 2조2000억 달러엔 미치지 못하지만, 국가 기반시설 재건에 대한 1조2000억 달러 규모의 정부투자가 명시되었다. 이날 법안 논의를 개시하기 위한 절차 투표의 표결도 찬성 67명, 반대 32명으로 나타나 필리버스터까지 저지할 수 있었다. 8월10일에는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를 비롯해 공화당 상원의원 19명이 1조 달러 인프라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찬성 69명, 반대 30명으로 바이든 정부의 경제 의제를 실현할 역사적인 인프라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다.

대통령이 관여하면 틀어진다는 비밀 의회의 전통에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투 트랙’ 중 첫 트랙은 이렇게 성공했다. 공화당 의원 19명을 대표해 매코널 상원 소수당 원내대표는 여전히 트럼프에게 충성을 유지하고 있는 공화당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상호 협의할 수 있는 영역에서 민주당원과 함께함으로써 양극화된 정치 환경에서도 상원이 제대로 기능하길 원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워싱턴포스트〉).”

8월11일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가 의사당 상원의원 회관을 나서고 있다. ⓒAFP PHOTO

바이든, 민주당 의원 설득해야 한다

이제 문제는 두 번째 트랙이다. 무려 3조5000억 달러 규모로 책정한 후속 프로그램이다. 민주당은 당초 이 법안을 자력으로 통과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상원 예산 조정 절차를 통하면 가능하다. 민주당 의원이 담합하여 만든 50표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캐스팅보트(1표)로 51표의 단순 과반수를 실현해서 공화당 표결 없이도 상원을 통과할 수 있다.

1조 달러 인프라 예산안이 상원을 통과한 8월10일 저녁, 민주당은 이 예산 조정 절차의 첫 번째 단계인 예산결의안 통과 작업에 들어갔다. 예산 조정 절차에서는 각 의원이 수정안을 제한 없이 마음껏 내놓고 바로 투표하는 ‘라마 투표(Vote-a-rama)’ 과정을 거친다. 14시간 동안 진행된 밤샘 라마 투표는 민주당 내부 의견 차이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 공장 관련 예산 삭감’을 반대하는 공화당 존 부즈먼 의원의 수정안을 민주당 의원 4명이 지지했다. 이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의 ‘범죄경력 있는 불법체류자 추방 지원 법안’의 수정안에도 찬성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트랙 관련 예산결의안은 50대 49로 상원을 통과했다.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전원이 법안 자체를 반대했지만, 1인의 불출석으로 49표에 그쳤다. 이렇게 예산결의안이 통과되긴 했으나 이는 첫 단계에 불과했다. 다시 결의안을 하원에서 통과시킨 뒤 세부 법안을 만들어 하원 표결에 붙이고 상원으로 보내야 한다.

8월23일, 펠로시 의장의 바람대로 상원 표결을 거친 두 트랙 예산안이 하원에 상정되었다. 이번에는 민주당 온건파 하원의원들이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3조5000억 달러라는 금액 자체를 용납할 수 없으며 부자증세에도 난색을 표했다. 예산 표결을 보류하겠다고 선언해 휴정과 대치가 온종일 지속됐다. 그러나 이날 밤 반전이 일어났다. 예산결의안이 전격 하원을 통과한 것이다. 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표결 보류로 강력하게 대치했던 민주당 온건파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하원에서도 그들만의 비밀 의회가 작동했던 것일까. 민주당 온건파를 설득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내년으로 다가온 중간선거를 무시할 수 없다. 민주당 온건파가 대세의 흐름을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큰 산은 넘었지만, 하원에서 통과된 것도 예산결의안일 따름이다. 결의안과 관련된 세부 법안이 나오면 다시 하원 표결을 거쳐 상원으로 보내야 한다. 일단 하원에서 최종 통과하면 민주당 이탈 표가 없는 한 상원에서도 승리한다. 그러나 상하원 모두 민주당 온건파가 굳건하게 버티는 상황이라서 앞으로 난관이 예상된다. 이들은 예산결의안에 마지못해 찬성했지만, 세부 법안의 최종 표결 단계에서 저항할 수 있다. ‘바이든만이 노르웨이에 갈 수 있다’가 명언으로 남을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기자명 양수연 (재미 언론인, 4·3파우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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