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에도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이 있다.
‘세운상가’는 서울 종로구 종묘 앞에서 시작해 청계천로, 을지로를 거쳐 중구 퇴계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집합건물이다. 네 덩어리의 상자형 건물이 남북 축을 따라 1㎞가량 도열해 있다. 주상복합건축물의 효시로 ‘입체 도시’를 꿈꾸었던 이 건축물의 이상은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것으로 남았다.
1인당 국민총생산이 114달러였던 1966년 ‘세계(世)의 기운(運)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건물을 공사비 44억원 들여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울 때부터 혼란스러운 운명은 예정돼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 서울시장 김현옥, 그리고 건축가 김수근. 한국 현대사의 모더니티를 정립한 상징적인 이름들, 그들이 이 건물에 투영한 욕망은 수렴하기도, 엇갈리기도 했다.
통치의 정당성이 취약한 독재정권에 대규모 건축물은 경제성장과 번영을 가시화하는 수단이었다. 건축가 김수근은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녹지 위의 고층 주거’라는 1930년 근대건축국제회의의 근본이념을 서울이라는 변방의 도시에 실현하고자 했다. 지상 7.5m 높이로 설치된 공중 보행데크는 건축가가 품었던 야심의 흔적이다. 그러나 C~D지구 사이를 잇는 연결 가로가 설치되지 못하면서 그의 구상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최신식 아파트로 인기를 모았던 영광의 시절을 지나 불법 복제품의 온상으로, 다시 ‘핵무기 빼고는 다 만든다’는 전자상가로 세운상가는 여러 번 상징성을 탈바꿈하게 된다.
설계도에 그려진 상상 속의 건물을 현실이라는 물리적·사회적 제약 속에 세우는 일은 곧 드높은 이상이 추락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건축은 멜랑콜리아(우울)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기자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제주 소라의 성부터 서울 강남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건물과 공간들을 치열하게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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