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가의 키워드는 집이다. 맨 위부터 〈빈집 살래〉 〈건축탐구 집〉 〈서울엔 우리집이 없다〉.

“어디 살아?”

1989년 9월 전학 첫날 같은 반 아이가 건넨 질문이다. 당시 하재영 작가는 대구시 수성구 ○○빌라에 살고 있었다. 대답을 들은 아이가 말했다. “너희 부자구나?”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수성구는 대구에서 제일 비싼 동네였고 ○○빌라는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집이었다. 학교 아이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맨션, 타운, 하이츠 같은 영어 단어가 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저층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개발되지 않은 구역에 사는 아이들. 작가에게 계급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학년이 바뀐 날 그는 새로운 반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 살아?” 지나온 집들에 관해 기록한 책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 수록된 일화다.

30년이 지났다. 맨션이나 타운 같은 이름이 대형 건설사 상호로 바뀌었을 뿐 질문은 반복되고 있다. 2020년 한국엔 ‘호텔 거지’와 ‘전세 난민’이 산다. 정부가 전세 대책의 하나로 호텔을 개조해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하자 정치권에서 ‘호텔 거지’를 양산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전세난에 시름하는 세입자를 두고 ‘전세 난민’이라 부른다. 공공임대아파트 이름을 딴 ‘○○ 거지’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주거와 관련된 갖가지 욕망이 혐오 표현을 끌어안았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고 집을 사는 시대, 집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의 주거 문제에 대해 연구해온 김명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객원연구원은 한국인에게 ‘내 집’의 의미와 역할이 매우 특수하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의 주거 행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가족의 본질적 필요에 속하는 주거가 오히려 배타적 생존(생계)의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내 집에 갇힌 사회〉).’ 재화로서의 집이다.

동시에 집은 사는 공간으로 매우 구체화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머물러달라’는 당부를 매일같이 듣고 있다. 온라인 수업과 재택근무도 일상이 되었다. 방이든 집이든 어쨌든 우리에겐 공간이 필요하다. 아파트인지, 자가인지 하는 구분으로 단순화되는 집이 아니라 집다운 집이 뭔지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그간의 ‘주거 생애사’를 통해 잔혹한 한국 사회 주거의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결국 사람을 담는 집이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할지 생각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방송가에서도 ‘집방(집을 보여주는 방송)’이 늘어나는 추세다.

〈우선 집부터, 파리의 사회주택〉을 쓴 최민아씨는 도시계획가이자 건축가다. 프랑스 유학 시절엔 월세만 지불하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집에 대해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7년의 유학 생활 동안 한집에 머물렀던 그는 한국에 돌아온 뒤 10년 동안 일곱 번 이사했다. ‘한국에서는 경제적인 이익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생활과 정신의 안정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내 집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강남에 집 한 채밖에 없는 실수요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얼떨결에 다주택자가 되어 세금 폭탄을 안게 되었다는 자칭 ‘하우스푸어’의 이야기가 인터넷을 도배하지만, 그보다 몇 배 더 불안정한 상황 속에 살던 집에서까지 내쫓기는 ‘렌트푸어’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한 공무원과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그가 부처 관계자의 요청으로 프랑스의 민간주택 임대료 규제에 대해 설명할 때였다. 파리시는 임대료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임대료를 규제했다는 설명에 상대는 내 집값을 내가 결정하겠다는 걸 어떻게 막느냐며 “박사님, 집 없으시죠?”라고 물었다. 최근 책을 낸 그는 1년 전에 비해 한국의 집값이 무서울 정도로 크게 올라 수치를 고쳐야 했다.

하재영 작가도 아버지의 부도로 5년 만에 ○○빌라를 떠났다. 다가구주택과 상가주택 등 주거 형태는 계속 바뀌었다. 서울에 올라온 뒤엔 6년 사이 아홉 번 이사를 했다. ‘방’에서 ‘방’으로였다. 월셋집 입주를 앞두고 셀프 인테리어를 감행할 때였다. “사는 동안은 월셋집이든 전셋집이든 내 집”이라던 열쇠 수리공의 말을 들은 이후였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아등바등 집을 고치고 있단 말이야? 월셋집을? 누구 좋으라고?”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고친 그는 마침내 그 공간에서 안온함을 느꼈다.

작가처럼 방을 꾸미는 데 대한 관심이 몇 년 전부터 부쩍 늘었다. 임대든 자가든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10가구 중 3가구가 1인 가구이고 그중 절반은 월세로 산다. 주택가격이 치솟아 집 장만을 포기하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집 꾸미기에 열을 올린다는 해석도 있지만, 잠깐 머무는 집일지라도 원하는 바를 유보하지 않으려는, 가치관의 변화로 읽을 수도 있다. 이케아 같은 저가 위주의 가구시장이 커진 것도 한몫했다. 인테리어 정보 공유 플랫폼 ‘오늘의집’을 통해 이루어진 거래액은 지난 3월 한 달 동안 70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3월 대비 5배 성장한 수치다.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집을 꾸밀 수 있게 한다’는 슬로건 아래 사람들은 자신의 집 인테리어를 공유하며 ‘온라인 집들이’를 한다. 게시글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소품을 발견하면 바로 구매할 수도 있다.

인테리어 정보 공유 플랫폼 ‘오늘의집’은 ‘온라인 집들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코로나19 이후 강화된 집의 기능

오늘의집 콘텐츠 매니저로 일하는 무과수(별칭)는 서울 연희동 감나무집에 세들어 살던 당시 집에 대한 단상을 SNS로 기록했다. 시기별로 다르게 피는 나무를 보며 위로받았고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는 ‘나의 선택과 취향이 반영된 공간은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곳이 되고, 타인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울타리가 되어준다(〈집다운 집〉)’라고 말한다. 전북 김제의 115년 된 폐가를 4500만원에 사들여서 5100만원을 투자해 리모델링한 최별 MBC PD의 유튜브 채널 ‘오느른’도 인기를 얻고 있다.

방송가의 키워드도 집이다. 지난해 시작해 6%대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MBC 〈구해줘 홈즈〉는 열일곱 살부터 자취 생활을 한 개그우먼 박나래씨와 서울 살이 24년 동안 20번 이사한 김숙씨가 동료 연예인과 함께 의뢰인의 집을 보러 다니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다. 방송 초기, ‘가격이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부동산시장의 명언을 증명하기도 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 25만원짜리 복층 원룸이 대표적인데, 몸을 눕히기조차 어려운 좁은 공간 아래 꺾인 모양의 계단을 내려오면 화장실과 주방이 나오는 구조였다. 이 집을 ‘방탈출 게임’에 비유한 출연진들은 그 실험정신을 높이 사기도 했다.

반려견과 함께 살 수 있는 집, 1억원대의 1인 가구 집, 재택근무가 가능한 단독주택 등 의뢰인의 구체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집을 찾아준다. 지난해 기자간담회 당시 이윤하 PD는 “부동산에 문의하면 볼 수 있는 매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라서,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지 의구심이 있었다. 20~49 분들이 많이 봐주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전세나 월세 등 다양한 매물을 구해야 하는 처지의 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방송이 거듭될수록 시청자들이 깨닫는 건 서울을 벗어나면 훨씬 나은 조건의 집을 구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MBC와 디스커버리채널 코리아가 공동제작한 〈빈집 살래〉는 서울 시내 빈집을 활용해 집을 짓는 프로젝트다. 건축가가 의뢰인의 요구에 맞게 빈집을 리모델링한다. 첫 회에는 4억8000만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한 사례가 나왔다. 3부작으로 기획됐지만 프로그램 홈페이지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의뢰를 원하는 일반인의 사연이 계속해서 달리고 있다. 실제 프로그램에서 신혼부부의 집을 건축한 문훈 건축가는 “서울시가 확보한 빈집이 있어서 가능한 가격이다. 환금성보다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도구로서 집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프로그램들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EBS 〈건축탐구 집〉에도 출연하고 있다. ‘집은 곧, 내가 살고 있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문구가 프로그램 소개글에 나와 있다. 집과 사람,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임형남·노은주·문훈 건축가가 전국 곳곳의 집을 방문하고 탐구한다. 문훈 건축가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집을 용감하게 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손재주가 좋은 아마추어가 지은 집들이 인상적이었다. 기존의 시스템을 따르지 않는 경우다”라고 말했다.

가치관에 따라 집을 꾸며가는 이야기

코로나19를 지나며 집의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김주원 하우스스타일 대표가 최근 건축주에게 많이 듣는 말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라는 말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설계할 때 여유 공간을 남겨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돌잔치 같은 의례 기능이나 지인을 만나는 사회적 기능이 집 밖으로 빠져나갔는데 다시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면서 넓은 공간이 필요해지고 있다. 프라이빗한 공간과 퍼블릭한 공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관심이 생겼다.”

그런 요구를 반영하는 프로그램이 그가 출연하기도 한 JTBC 〈서울엔 우리집이 없다〉이다. 제목 그대로 서울 밖의 집을 다루고 있다. 주거비와 공간 구조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도심을 벗어나 개인이 정말 ‘살고 싶은 집’을 제안한다. 공간은 아파트보다 한결 넉넉하다. 김교석 칼럼니스트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공간을 결정하고 꾸며가는 이야기다. 사람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인테리어와 공간을 우선시했던 비슷한 예능 프로그램들과 좀 다르다. 아파트보다 자연과 좀 더 가깝다거나 슬로 라이프 같은 로망을 직접적이지 않으면서 잘 건드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채널A 〈Bye Seoul 여기, 살래?!〉도 마찬가지 성격이다. 연예인 집 내부의 물건을 정리하는 tvN 〈신박한 정리〉, 출연진이 ‘꿈의 집’에 실제 입주하는 방식의 SBS 〈나의 판타집〉, 직접 세컨드하우스를 짓는 KBS 〈땅만 빌리지〉 등도 집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반영한다.

문훈 건축가는 앞으로 사람들이 집을 어떻게 풍요롭게 사용할지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될 거라고 예견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집의 구석구석에 더 신경 쓰게 된다. 크기를 키운다기보다 공간 배치를 어떻게 다르게 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고심하게 될 것 같다.” 김주원 건축가는 다양한 외부 환경이 집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말했다. “코로나19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라는 변수도 있다. 아주 더워지거나 공기가 나쁘거나 하는 환경에서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피난처가 집이기도 하다. 집의 역할은 다양해질 것이다.” 주거 문제에 관한 한 사회적 합의는 요원해 보이지만, 집의 가능성에 대해 다른 기대를 하는 개인은 언제나 있어왔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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