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11일 대구에서 온 가족 4명이 ‘달빛동맹 병상나눔’으로 광주 빛고을전남대병원에서 코로나19 치료를 받고 완치된 후 퇴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월19일, 광주MBC와 대구MBC 공동기획 〈오월편지-5·18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가 대구MBC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5월18일에는 대구MBC가 제작한 〈광주여 미안하다〉가 광주MBC 채널을 통해 방송되었다. 이 프로그램들을 기획·연출한 PD에게 제작 후기를 부탁했다.

1980년 5월로부터 41년이 흘렀다. 동시대를 살아오면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간을 산다.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의 사람들, 특히 대구·경북 지역의 사람들은 1980년 5월의 아픔과 비극을 잘 알지 못한 채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관심이 적었던 것이 아니라 대구에서 오랜 기간의 정치적 편향이 광주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박근혜로 이어지는 최고 권력자의 든든한 정치적 지지 기반인 대구, 이곳 대구에서 반대쪽의 생각과 정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꽤 용기를 내어야 하는 일이다.

수십 년 동안 부산, 서울, 인천 등 각 지역이 시대의 흐름 속에 변화하고 있을 때 대구·경북은 그들만의 ‘보수’ 성벽을 굳게 지켜왔다. 오래된 체증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역 언론에서 최소한의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구MBC와 광주MBC의 공동기획은 올해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다. 2년 전인 2019년, 이와 같은 인식 아래 특집 다큐멘터리 〈보수의 섬〉 2부작을 제작했다. 그 과정에서 대구 시민들의 많은 변명(호남 사람들도 민주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데 대구가 보수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왜 비난받을 일인가?)을 들었다. 한편 대구·경북 지역에 대한 광주·호남 사람들의 안타까움(비난과 변명이 아닌)의 정서와 이유를 확인했다. 광주·호남 지역은 대구·경북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대구·경북 사람들과는 달리 상대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크게 갖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수십 년에 걸쳐 변하지 않는 정치적 편향은 대구를 스스로 섬으로 고립시켰다. 보수의 섬이 된 대구를 지역 언론 스스로 성찰해야 할 필요성은 〈보수의 섬〉 제작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올해 미얀마의 민주화운동과 군부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은 1980년 광주의 강렬한 데자뷔였다. 미얀마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의 봄’이 다가올수록 대구에서 광주 5·18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코로나19 상황에서 신천지교회 집단감염으로 인해 대구는 능력치를 넘어서는 한계상황을 맞았고 중앙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효성 있는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구 봉쇄, 대구 시민 이동 금지, 타 지역민 대구 방문 금지 등의 대책 아닌 대책이 세워졌다. 서울 딸 집에 와서 병원 진료를 받고 확진자로 판명된 대구 부모는 전국적인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코로나19 초기 확산 시기에 대구 지역, 대구 사람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대구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광주였다. 바로 그때 손을 잡아준 사람들은! 전국 지자체 중에서 처음으로 대구의 코로나 경증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병상을 열어준 곳이 광주였다. ‘만약 광주에서 집단감염으로 인해 통제 불능이 되었을 때 대구는 광주에 먼저 손 내밀어줄 것인가?’ 이 물음에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왜 광주였을까? 이 질문은 이번 특집 프로그램 〈오월편지-5·18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에서 중요한 화두였지만, 결국 광주라는 곳, 광주 시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론은 또다시 광주였다. 올해 미얀마 시민 투쟁에 대한 지지와 국제적인 연대를 호소한 곳 역시 다름 아닌 광주였다.

〈오월편지-5·18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를 본 광주의 지인은 “5·18 프로그램을 대구에서 만든 것에 놀랐고 대구가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놀랐다”라는 시청평을 전해왔다.ⓒ대구 MBC 〈오월편지〉 갈무리

전태일 열사와 윤상원 열사가 연결된 역사

1960년 2월28일 발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운동인 ‘2·28 민주운동’, 1970년 11월13일 대구 출신 전태일의 분신, 1980년 5월18일 광주 ‘5·18 민주화운동’, 지난해 3월 광주의 병상 연대 제안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일련의 사건들은 얼핏 보기에 독립된 사건 같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씨실과 날실이 엮이듯 소수 사람들의 선한 의지와 그 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연결되어 이룬 역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며 저항한 2·28 민주운동은 3·15 마산의거를 거쳐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대구 출신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광주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번 특집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2003년부터 시작된 대구 학생들과 시민들의 국립 5·18민주묘지 순롓길은 그것에 도움을 준 광주의 최초 인물(박진우, 2003년 당시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2013년부터 광주와 대구가 상생 및 교류 확대 사업을 시작하면서 달구벌 대구, 빛고을 광주 머리글자를 따 ‘달빛동맹’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구·경북 지역에서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은 솔직히 말하자면 남의 일로 취급되었다. 대구 지역 일간지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칼럼, 사설, 기사는 극소수이다. 대구 시민들의 정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대구 시민들 다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그만 떠들었으면 좋겠다” “전두환도 벌 받았으니” “5·18 유공자들은 충분히 보상받지 않았느냐?” 등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대구 지역의 방송사도 이와 같은 여론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5·18 민주화운동은 5월만 되면 방송에서 빠지지 않고 다뤄진다. 그러나 대구의 시각으로 5·18을 직시하지는 않았다.

이번 광주MBC와 대구MBC의 공동기획 특집 프로그램은 대구가 바라보는 광주, 대구가 느끼는 5·18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전태일 열사와 윤상원 열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일기〉를 제작한 광주MBC 김철원 기자는 대구 남산동 전태일 열사의 옛집 매입 시민 모금 운동에 성금을 보냈고, 나는 전태일 열사 옛집 시민 모금 운동을 취재하던 중 김철원 기자의 선행을 접하고 짧게 방송하여 인연이 맺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번 대구MBC 취재진과 국립 5·18민주묘지를 동행하여 안내와 설명을 해주었다. 광주MBC 백재훈 PD 역시 대구와의 공동기획에서 아낌없는 협력으로 대구 제작 아이템을 광주 시민들에게 소개하고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를 패널로 추천했다. 지금까지 대구에서 5·18 관련 방송 아이템은 종종 있었지만, 5·18 관련 단체 인사의 생방송 출연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광주와 대구가 협력하여 5·18 관련 방송을 제작하는 일 역시 최초가 되었다. 광주의 지인은 주위 사람들과 함께 방송을 본 뒤 “5·18 프로그램을 대구에서 만든 것에 놀랐고 대구가 우리 이웃이었음을 확인하고 다시 놀랐다”라는 시청평을 전해왔다.

이번 특집 프로그램 〈오월편지, 5·18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는 대구와 광주 시민에게,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전체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정치적 선택은 다를 수 있으며 어느 편이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1980년 5월의 광주가 지난 40여 년간 고통과 아픔 속에 눈물 흘리고 있을 때, 뒤늦은 감은 있지만 대구 지역민과 방송사가 광주 시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어루만져주고자 했다. 이런 연민의 마음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 믿는다. 취재 인터뷰에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라는 내적인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빛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광주와 대구의 다양한 공동기획 프로그램의 확대를 기대한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의 명확한 진상규명과 당시 희생당한 분들의 명복과 부상자 및 유가족의 평안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기자명 윤창준 (대구MBC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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