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한 장면. 두 주인공의 생사는 광주를 봉쇄하는 경계에서 엇갈렸다. ⓒ KBS 홍보실

그동안 드라마에서 5·18민주화운동을 다루는 방식은 〈제5공화국〉(2005)이나 몇몇 특집극처럼 실화에 기반한 준다큐멘터리가 주류(라기에도 민망하게 작품 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를 이루는 가운데, 기둥 줄거리에서는 비껴가는 단편적 에피소드로 삽입되거나 막연한 배경으로 그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역적〉(2017)에서 가공의 시공간에 노골적으로 ‘오마주’된 것만으로도 감격할 만한 도약을 일구긴 했지만 서사적으로는 ‘사건 자체’의 재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KBS의 12부작 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선한 파격이다. ‘1980년 5월, 광주’를 시공간 배경으로 하는 ‘복고풍 청춘 멜로’가 드디어 출현한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만들어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는 비운의 로맨스’ 서사에서 한국전쟁이나 IMF 구제금융 사태 같은 굵직한 현대사의 계기들이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직간접 ‘배경’으로 얼마나 다양하게 소환되었던가를 되짚자면, 왜 유독 ‘광주’는 그렇지 못했는지가 새삼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달리 말해 광주를 언급하는 건 대중 서사에서 오랫동안 금기였다. 그건 비단 여전히 그 역사적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폄훼하려는 옛 기득권 세력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실은 그 반대편에서도, 피해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충분히 감안한다 해도, 탈역사적인 허구적 서사의 배경으로 어설피 ‘동원’했다간 다분히 ‘불경’스럽게 여겨지거나 자칫 ‘물타기’의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종의 ‘성역’에 박제되어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자의 금기는 언급할 가치도 없거니와 후자에 국한해 말하더라도) 전형적인 ‘피해 서사’나 ‘투쟁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일상 서사’를 통한 ‘세속화’가 반드시 ‘사사화(私事化)’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스스로 입증해냈다. 이는 두 주인공의 생사가 엇갈린 지점이 예컨대 ‘도청 앞 집단 발포’(피해 서사의 전형적 배경)도 ‘최후의 항전’(투쟁 서사의 불가결한 핵심)도 아닌 광주를 고립시키기 위한 봉쇄의 ‘경계’에서였다는 대목에서 결정적으로 확인된다. 그 시점에서 그곳은 가장(오히려 일시적 해방구였던 광주 시내보다) 위험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는 주인공들의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배경과 조응한다. 희태(이도현)는 혼외자이고, 명희(고민시)는 월북자 가족이다. 굳이 ‘광주의 5월’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고립’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가족조차도 출세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희태의 아버지 기남(오만석)이 서재에 희태를 감금해놓고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영조라도 된 양 “고립된 광주처럼, 서서히 말려 죽일 것”이라고 위협하는 장면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는 ‘오갈 데 없는 고아를 거둬준 은공’을 들먹이며 “너는 내가 아들로 선택한 거야. 내가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넌 고아로 살았을 거야”라고 윽박지르는 기남에게 희태가 “고아는 아버지네요. 아무도 아버지를 가족으로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이죽거리는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때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폭압적 국가와 그에 저항하는 시민에 고스란히 포개진다.

사회 어디선가 몸부림치는 숱한 ‘광주들’

그래서 고립된 봉쇄를 강요하는 이 잔혹한 구조의 ‘부역자’이면서 동시에 ‘(구조적) 피해자’이기도 한 두 인물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이 집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라면서도 끝내 ‘뒤주’를 열어 희태를 꺼내준 기남의 아내 해령(심이영)이다. 기남의 간계 탓에 정략결혼의 희생자로 내몰린 수련(금새록)에게 건네는 해령의 대사, “두려움으로 살지 마. 두려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면 더 두려워져”는 아마도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희태의 친구이자 강제징집돼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경수(권영찬)다. 희태는 심성이 여린 경수를 향해 “넌 착한 게 아니”라면서 “착한 사람은 없어. 그때그때 선택할 뿐이지. 넌 그 선택을 남에게 미루지는 않잖아. 그건 착한 게 아니라 강한 거야”라고 말한다. 경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선임병에게 “불순분자가 아닌 사람에게 총을 쏠 수는 없다”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명희가 사살당한 현장에서는 신원을 알 수 있는 증거를 모두 인멸하라는 지시를 묵살하고 나중에 희태에게 해원(解冤)의 단서가 될 유품을 시신에 남겨놓는다. 그리고 명희의 유골이 뒤늦게 발견되었을 때, 폐인이 되다시피 한 몰골(진압군으로서의 트라우마 때문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드라마는 일체의 설명을 생략한 채 절제한다)로 나타나 당시 상황의 ‘제보자’를 자청한다.

특정 지역(혹은 사회집단)을 나머지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던 사건이라는 의미에 방점을 찍고 광주를 바라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사회에 어디선가 몸부림치는 숱한 ‘광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가령 연간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학살’당하고 있는 산업 현장은 언제 어떻게 완강한 봉쇄의 위험한 ‘경계’를 넘을 수 있을까. 또는 마침 이 글을 쓰는 동안 차별금지법 국회청원이 10만을 돌파했거니와, ‘경계’를 넘어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아슬아슬한 시도는 끝내 성공할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이 견고한 봉쇄 구조 속에서 얼마간 해령이고 경수인 우리 모두가 (굳이 착해질 필요는 없지만) 얼마나 강해지느냐에 따라 ‘경계’는 더 위험해질 수도, 또는 느슨해질 수도, 심지어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렇듯 ‘세속화’는 그저 ‘싸구려 소비’로 역사적 의미를 탈각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의 일상에 살을 붙여 역사적 해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작업이다. 이제 물꼬가 트인 ‘오월 광주’의 ‘세속화’가 더욱 다채로운 서사로 변주되어 한껏 피어나기를 바란다.

기자명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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