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식 조사위 조사2과 과장은 5·18의 피해자든 가해자든 불행했던 상황에 공감하는 것이 진상규명의 마지막 단계라고 본다. ⓒ시사IN 조남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유학 간 곳이 광주였다. 그때가 1981년,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였다. 1985년부터 5·18 관련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해부터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서 조사2과를 이끌고 있다.

5월4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조사위 사무실에서 허연식 조사2과 과장을 만났다. 그의 자리 맞은편에는 하루에 한 장씩 넘기며 날짜를 세는 달력이 놓여 있다. 인터뷰를 한 날은 조사위가 출범한 지 ‘D+495일’이 되는 날이었다. 사무실 벽에는 광주 지역 곳곳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지도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국가가 계엄군 장병의 증언을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5·18 관련 조사는 모두 대대장급 이상 인물들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이해관계와 정치적 입장이 얽혀 있기 때문에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난 40년 동안 책임자들은 입을 다물었고, 그들이 남긴 기록은 왜곡됐다. 아예 폐기된 기록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방법은 당시 실제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 장병들을 한 명씩 만나 증언을 모아가는 것뿐이다. 결국 책임자들에게 ‘모두가 이런 증언을 하고 있는데 이마저 부정할 것인가’라고 묻기 위함이다. 이제는 그들이 책임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부정해서 역사적 책임을 지든지 선택하라는 거다.

40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시도하는 일이다.

엄밀히 말해 처음은 아니다. 다만 과거 9차례에 걸친 조사는 계엄군에게 스스로 말할 기회를 줬던 게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내용과 방향으로 조사를 했다. 예를 들어 검찰은 기소하기 위한 수사를 했고, 과거사위는 일정한 범주를 정해놓고 그 상황을 인정하도록 했다. 백지에서 시작한 게 차이점이다.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거다.

오랜 시간 동안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온 입장에서 가해자의 증언을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피해자의 기억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의 변형된 기억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조사위는 피해자 단체가 아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관계를 입증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객관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결국 가해자들에게 자신의 가해를 인정하는 진술을 받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가해자들의 인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나?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가해자 본인이 평생 짊어지고 왔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다. 가해 책임도 개인 각자에게 물을 게 아니라, 이걸 한데 모아 국가의 이름으로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그래야 가해자의 트라우마도 치유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아까 언급했듯 가해자의 증언과 피해자의 증언을 교차시켜 검증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증언을 명확한 사실로 객관화할 수 있다.

계엄군을 한 명씩 만나는 ‘방문 전수조사’ 방식이 통할 거라고 확신한 이유는?

사실 우리도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초기에 30명 정도 만날 때까지만 해도 감이 잘 안 왔다. 그런데 증언이 또 다른 증언으로 이어지고, 한 사건이 다른 사건과 연결되면서 이 방향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힘들게 발품을 팔면 팔수록 그만큼 가치 있는 진술이 나왔다. 단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가 유의미한 진술을 한다면,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만나러 간다.

처음 계엄군의 증언을 들었을 때 어땠나?

첫 인터뷰는 ○공수여단 지휘관이었다. 그를 만났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 긴 시간이 필요하겠구나’였다. 이들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만약 조사위에게 강제조사권이 있었다면 조사가 좀 더 수월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과 기억은 강제로 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점이 제일 힘들었나?

자꾸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라는 명분 뒤로 숨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사팀에게 그는 가해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만나다 보니 의미 있는 증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툭툭 튀어나왔다. 세 번째 만남부터는 “사실 내가 이러저러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더라. 일단 자신의 가해를 인정하고 나니 태도가 달라졌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무리 국가의 명령이었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됐다. 그 죄를 평생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나도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신군부 핵심 세력들, 정권을 찬탈하고 그 정권을 통해 부와 명예를 축적했던 가해 책임자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엄군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뼈아픈 반성이 먼저다. 어쨌든 1980년 5월 광주에서 반인륜적인 행위가 저질러졌으니까.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한 증언과 고백이 선행돼야 어느 측면에서는 피해자로서의 입장도 이해받을 수 있고, 트라우마도 치유될 수 있다. 그러한 진상규명 과정 없이 덮어놓고 ‘이들도 피해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진상규명의 목표는 무엇인가?

최소한 진실은 확인하자는 거다. 그리고 확인된 진실은 인정하자는 거다. 피해자들은 지난 41년 동안 ‘왜?’라는 물음을 한 번도 해결할 수 없었다. 가해자들 역시 ‘내가 왜 그랬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결국 서로 다른 ‘왜?’라는 질문 앞에서, 당시 현장에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가해자가 진실을 이야기하면 피해자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진상규명이다. 그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접점을 찾아가는 것, 가해자든 피해자든 불행했던 상황에 대해 최소한 공감하는 것, 이게 진상규명의 마지막 단계라고 본다. 화해를 시도하는 건 맞지만, 완전한 회복 자체는 불가능하다. 돌아가신 분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더라도 당시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5·18을 상징하는, 굉장히 유명한 사진들이 있다. 공수부대원들과 인터뷰를 하다 보면 ‘그 사진 속 청년은 어떻게 됐냐’고, ‘그 사진 속 시신은 누구였냐’고 오히려 그들이 내게 물어볼 때가 있다. 그 사람들도 40년 동안 궁금했던 거다. 대답을 해줘야 되는데, 대답이 쉽지만은 않다. 개인적으로 30년 넘게 5·18 관련 일을 해왔지만, 증언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내가 그동안 디테일한 건 놓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폭력’이라고 뭉뚱그려 말해왔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압력 속에서 지워진 이름들을 하나하나 복원시키는 정밀한 작업을 이제야 하는 중이다. 역사에 지워진 얼굴을 찾아주는 게 조사위의 역할이기도 하다.

앞으로 조사위의 계획은?

올 하반기부터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이어주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한다. 가해자는 고백과 사죄를 하고, 피해자는 용서와 화해를 하는 거다. 그동안 우리 한국 사회가 과거 청산을 여러 차례 시도해왔지만, 제대로 결실을 맺은 적이 없었다. 이번 조사위를 통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기고 싶다. 비록 완전한 피해 회복은 불가능할지라도 진실을 가운데 놓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가보고 싶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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