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인천 동구의 공부방 ‘기찻길옆작은학교’의 학생들은 코로나19로 일상이 무너지자 두 팀으로 나뉘어 영화를 제작했다.

신발은 벗어놓은 모양새로 제 주인을 묘사한다. 뒤축이 가차 없이 접힌 신발, 앞코에 까맣게 때가 탄 신발, 뽀얀 흙먼지가 뒤덮인 신발들이 어지럽게 신발장에 엉켜 있을 때, 그곳은 필시 아이들의 공간이다. 분주히 신발을 신고 벗는 나이, 걷기보다 뛰기를 좋아하는 나이, 진흙탕을 보면 피하지 않고 일부러 골라 밟는 나이의 아이들이 만들어놓는 신발과 신발장 모습들이 있다. 지난 10월17일 인천 만석동 ‘기찻길옆작은학교’의 2층 현관 모습도 꼭 그러했다.

신발들은 많은데 실내는 고요했다. 아이들은 숨죽이며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씬 8 다시 1, 테이크 투, 액션!” 영화를 찍고 있었다. 제목은 〈사춘기〉. 이날은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공부방 2층 부엌에서 극 중 민호(박하늘)가 아버지(이광혁)와 밥을 먹으며 화해하는 장면을 찍는 중이었다.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아빠가 만들었는데 어때?” “좀 짜.” 시큰둥하지만 현실적인 하늘이의 연기에 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어깨를 들썩였다. 마스크에 웃는 입은 가려졌지만 서로 교환하는 눈빛들이 반짝거렸다. 한마음으로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하고 기분 좋은 분위기가 촬영장을 가득 메웠다.

기찻길옆작은학교는 1987년부터 이어져온 아이들의 공간이다. 항구와 기찻길, 조선소와 방직공장 사이사이에 가난한 노동자들이 터전을 잡았다. 부모가 일하러 나간 집에 혼자 남은 아이들이 하나둘 공부방에 모였다. 공부방에서 먹고 쉬고 배우고 놀던 아이가 자라서 다시 아이들을 돌보는 이모 삼촌이 될 때까지 기찻길옆작은학교는 33년째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 숱한 세월 속에서도 올해 같은 때는 없었다. 코로나19로 공부방의 일상이 많이 무너졌다. 처음으로 일주일 이상 공부방 문을 닫아야 했고, 캠핑이며 소풍이며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행사들도 모두 취소해야 했다. 1990년부터 한 번도 빠짐없이 열어오던 연말 공연도 못하게 됐다. 1년 동안 공연을 스스로 기획하고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성장과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매해 목격해온 터라 공부방 식구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시사IN 이명익‘기찻길옆작은학교’ 학생들이 만든 영화 〈핸드폰 분실 사건〉 〈사춘기〉는 2020년 ‘중딩’의 삶을 담고 있다.

“우울해요” “무기력해요” “답답해 죽겠어요” 등등. 아이들의 호소가 쌓여갔다. 넋 놓고 있을 수 없어 머리를 모은 끝에, 초등부는 나무 인형을 깎아 나만의 그림책을 한 편씩 만들기로 했다. 중등부는 단편영화를 찍기로 했다. 5월부터 영화제작법을 공부하고 주제를 구상하고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핸드폰 분실 사건〉과 〈사춘기〉 두 편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두 조로 나눠 각자 역할을 정했다.

두 영화 줄거리에는 2020년 ‘중딩’의 삶이 담겼다. 스마트폰, 유튜브, 게임, 롤 승격전, 온라인 수업, 보드게임 방, 컵라면, 잔소리, 간섭 같은 소재들이 소소하고 재미있게 배치됐다.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 그걸 잃어버렸을 때 찾아온 심각한 금단증상, 온라인 수업을 마치자마자 헤드폰 끼고 시작하는 PC 게임, 노크도 없이 들어와 잔소리를 늘어놓는 부모와의 말싸움, 급기야 컴퓨터 전원 코드를 뽑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코로나19로 일감이 없어 집 안에서 서성이는 아버지의 한숨 같은 것들은 아이들이 진짜 겪고 있는 현실이 영화화된 것이다. “어른들은 왜 우리가 마음에 안 들면 다 사춘기를 갖다 붙이는 거지?”라는 대사는 영화를 통해 세상에 던지는 청소년들의 일갈이다.

영화 촬영은 중간에 툭툭 끊겼다. 코로나19 때문이다. 그 밖에 아이들이 좋아하고 기다리던 다른 많은 것들이 자꾸 미뤄지고 보류됐다. “파자마 파티요. 친구들과 졸업하기 전에 꼭 하자 그랬는데 아직 못했어요(은진·중3).” “애들하고 콘서트 많이 가려고 했는데 못 갔어요(윤호·중1).” “저 노래 부르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요. 코인 노래방도 못 가고, 집에서 부르면 시끄럽다고 혼나고…(이경·중3).” 학교 문이 겨우 열려서 마스크 쓰고 등교했지만 “뒤도 못 돌아보고, 급식 먹으러 갈 때 처음으로 의자에서 일어났고(한빈·초4)” “‘같이 놀지 마, 떨어져, 붙지 마’ 이런 말만 듣게 되고, 코로나 이 녀석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예서·초6)” 2020년이었다.

ⓒ시사IN 신선영영화 제작에 참여한 중등부 학생들이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영화 〈사춘기〉를 찍고 있는 학생들.
ⓒ시사IN 신선영작품 발표 후 집으로 돌아가며 꽃을 받고 있는 학생들.

어른과 세상에 건의하고 싶은 이야기

가만히 보면 어른들은 은근히 하고 싶은 것들 다 하고 사는 눈치였다. “우리는 마스크 잘 쓰고 방역수칙 잘 지키고 학교도 못 가면서 참는데 어른들은 좀 아닌 것 같아서 화났어요(예담·중1).” 예나(중3)는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손소독제가 눈에 튀어 각막 화상을 입은 다섯 살 아이 뉴스를 보고 슬퍼졌다. 손소독제 위치가 아이의 눈높이여서 일어난 사고였다. “너무 다 큰 사람들 기준에 맞춰 있는 거 같아요.”

어른들과 세상에 건의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자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쉬는 시간 좀 늘려주면 안 돼요?” “맞아요, 화장실만 갔다 오면 끝나버려요.” “가방이 너무 무거워요(등교 수업과 온라인 수업이 병행되면서 아이들은 원래 사물함에 두던 수십 권의 교과서와 참고서들을 몽땅 책가방에 넣고 다녀야 한다).” “시험 없애주세요. 애들 좀 줄 세우지 마시고요.” “코로나로 다른 건 다 없어지고 취소됐는데 시험은 그대로, 아니 더 늘어난 느낌이에요.” “맞아요 맞아, 등교하는 날엔 맨날 시험만 쳐요.” “아 참 그리고, 우리 의견은 왜 안 물어봐요? 학교에서 수업 일정이나 이런 거 설문을 하는데 부모님한테만 물어봐요. 우리가 바라는 문항도 없어요. 우리 의견도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학교도 몇 번 안 가고 친구도 얼마 못 사귀었는데 훌쩍 연말이 왔다. 한 해가 지기 전에 기찻길옆작은학교 식구들은 그동안의 성취를 기념하는 자리를 열었다. 12월4일 저녁 인천 시내 작은 영화관을 빌렸다. 초등부의 그림책들을 낭송하고 중등부의 영화를 상영했다. 아이들이 직접 구상하고 카메라에 담은 영상이 커다란 스크린에 걸렸다. 올라가는 자막 명단에 총총 별처럼 아이들 이름이 박혔다. 예년 공연 때처럼 서로 얼싸안고 떠들고 축하하진 못했지만 마스크를 쓴 채 눈빛으로 감동과 뿌듯함을 공유했다.

무대 인사차 스크린 앞에 선 중등부 아이들은 꽤 의연하게 자신들의 2020년을 회고했다. “코로나 시기에 친구들과 같이 영화를 만들어서 뿌듯해요(〈사춘기〉 배우 박하늘).” “이렇게 각각 개성 강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잘 만든 것 같습니다(〈핸드폰 분실 사건〉 감독 박예나).” “영화 찍을 때도 재미있었고 완성작도 마음에 들어서 너무 행복합니다(〈사춘기〉 스크립터·소품 담당 박예담).”

그렇게 아이들은 한 뼘 더 자랐다. ‘코로나 이 녀석’이 훼방 놓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도, 고맙게도, 착실하게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시사IN 신선영12월4일 ‘2020 기찻길옆작은학교 활동 발표회’가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되었다. 작품 발표를 위해 영화공간주안에 모인 학생들.

〈2020 올해의 인물올해의 정은경과 내년의 우리들
〈2020 올해의 인물유엽이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2020 올해의 인물〉 “왜 사춘기를 갖다 붙이는 거지?”
〈2020 올해의 인물여성 택배 노동자로 사는 것
〈2020 올해의 인물코로나19 전부터 감염자로 살았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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