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PHOTO미국 뉴욕시 맨해튼 지역에 있는 마운트 시나이 병원 앞에서 4월10일 코로나19로 숨진 의료진을 추모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나이 듦, 질병, 돌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다. ‘존엄한 죽음’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사IN〉은 의사·의료인류학자·환자·보호자·간병인 등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목소리에서 출발해 ‘죽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현장까지 두루 살펴봤다. 기사는 총 5회 연재된다.

①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
②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 ‘아픈 몸’도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음을

③ 의학은 돌봄을 가르치지 않았다
  - “환자 집에 가면 질병이 작아 보여요”
④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돌봄으로부터
⑤ 죽음의 미래를 찾아서

〈시사IN〉은 ‘죽음의 미래’ 연재를 통해 질병 당사자와 말기 돌봄 현장의 의료진, 가족 돌봄 당사자와 간병사 등을 만나 죽음을 둘러싼 현장의 고민을 들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대다수에게 낯선 주제였다. 죽음에 대해 쉽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엄한 죽음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는 장례문화마저 바꿔놓았다. 코로나19를 함께 겪어내고 있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를 쓴 케이틀린 도티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도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장의사로 일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할 때 피할 수 없었던 단어인 ‘돌봄’에 대해서도 깊이 들여다봤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가족이든, 의료진이든 일정 시간의 돌봄은 필수다. 송병기 연구원(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이 〈돌봄 민주주의〉를 번역한 김희강 교수(고려대 행정학과)를 만나 돌봄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올봄에는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다. 하루 확진자가 수만 명씩 발생하던 4월과 5월, 미국에서는 처리되지 못한 시신들이 냉동트럭에 쌓이거나 공동묘지와 인공섬에 임시 매장되었다. ‘잔인한 봄’이라 불렸다. 이탈리아는 모든 장례식을 금지했고 에콰도르에서는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시신을 집과 거리에 그대로 방치했다. 전 세계적으로 죽음을 애도할 시간과 공간이 사라졌다.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는 148만5000여 명(12월2일 기준)에 이른다. 코로나19는 우리가 알던 죽음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민음사 제공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장의사로 일하는 케이틀린 도티.

“2020년은 ‘나쁜 죽음’의 해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 참담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해였으니까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장의사로 일하는 케이틀린 도티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장의사로서 좋은 죽음이란 유족들과 시신이 충분히 ‘상호작용’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올해는 달랐다. 유족들에게 ‘여러분은 화장장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고인의 시신과 같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장례 대란’ ‘시신 트럭’ 따위 흉흉한 말들이 쏟아지고 나서야 죽음의 현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상업화된 장례산업의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장례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은 약 1만 달러(약 1100만원)다. 코로나19로 더 어려워진 취약계층에게는 이중고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대량 실업이 발생하고 있는데, 장례비용에 대한 정부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 팬데믹은 우리가 죽음과 맺고 있는 불충분한 관계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이 닥쳤을 때 사회가 유족을 충분히 돕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보여줍니다.” 도티는 장례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상업적인 장사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케이틀린 도티는 장의사이자 작가, 134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장의사에게 물어보세요(Ask A Mortician)’ 운영자다. 20대 초반 화장터 업체에 취직해 하루에 수십 구씩 시체를 나르고, 태우고, 분쇄하고, ‘인간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반비, 2020)을 썼다. 시신들을 대하다 보면, 스스로의 죽음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시신이 될 사람들”이었다. 6년간 장의사로 일하면서 현대의 장례문화가 죽음을 은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상업주의로 물든 장례업계 현실을 비판하며 대안적인 장례문화를 찾아 나선다.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반비, 2020)는 3년간 세계 각지에서 ‘색다른’ 죽음 의례를 가진 공동체를 탐방하고 기록한 책이다.

죽음의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것은 한국도 다르지 않다. 평균 장례비용은 1380만원에 이르고 상조시장 규모가 5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산업화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낯설다. 환자와 가족이 죽음 앞에 선택할 수 있는 건 매장과 화장, 관 종류와 수의 따위뿐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우리 눈앞에서 죽음은 완전히 감춰지게 되었습니다.” 도티는 죽음을 둘러싼 현재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한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죽음의 장소는 집이었다. 가족과 공동체가 담당했던 시신 돌봄이 병원, 장례업체, 장의사에게 넘어가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것 중 하나가 죽음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이다. 도티는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화장을 한 뒤 빠르게 태워버리는 현대 장례 서비스가 유족들로부터 죽음을 마주할 기회를 ‘빼앗는다’고 말했다. “메이크업이나 호화로운 관 없이 있는 그대로 시신을 바라볼 때,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이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아. 너무 큰 슬픔을 느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도 언젠가 이렇게 되겠지’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하나의 산업이 되면서 죽음은 피하거나 감추어야 할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아는 장례 방식은 과연 최선일까? 죽음과 관계 맺는 다른 방식이 가능할까? 도티가 세계의 장례문화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 건 인도네시아 타나토라자의 장례문화를 다룬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그곳에서는 시신을 ‘미라화’해 집에서 보살피는 풍습이 있다. 기사는 ‘무례하다’ ‘역겹다’ 등의 댓글로 도배가 되었다. “화가 났어요.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무례한지 아닌지 왜 함부로 판단하려 들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결코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장례에 드는 그 모든 비용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고 화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죽음을 스스로 다룰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요.” 두 번째 책에서 그는 시신들이 썩어 퇴비가 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인간 부패 연구소로, 두개골을 수집하는 볼리비아의 냐티타 축제로, 멕시코의 ‘망자의 날’ 행사를 찾아 직접 참관한다. 그곳들의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죽음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역시 인도네시아 타나토라자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이곳에선 고인의 영혼이 시신 안에서 살아 있다고 믿는다. 미라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영혼과 연결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 모든 게 너무 ‘정상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미라가 된 시신을 꺼내어 옷을 갈아입히고 씻기는 의례가 마치 ‘포틀럭 파티’ 같았다고 도티는 말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나눠 먹는 동네잔치처럼 일상적인 풍경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가족 내 여성에게 돌봄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뒤따른다. 임종과 시신을 돌보는 일은 오랫동안 여성에게 내맡겨져왔기 때문이다. 집에서 병원으로, 공동체에서 장의업체로 죽음의 공간이 바뀐 이유 중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 확대도 관련이 있다. 저자는 죽음이 산업이 된 현 시점에서도 여성의 돌봄노동이 평가절하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장의업에 여성이 더 많이 진입한다면, 그 직업은 과학적이지 않다고 폄하됩니다. 그건 더 이상 ‘전문적인’ 직업으로 평가받지 못한 채 저임금을 받게 되는 거죠.” 환자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돌봄 노동자를 어떻게 지원할지 등은 미국에서도 주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이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개인 차원의 결정을 넘어 죽음을 둘러싼 시스템을 건드린다.

ⓒSergey인도네시아 타나토라자의 장례식 모습. 이곳에선 고인의 영혼이 시신 안에 살아 있다고 믿는다.

가족과 죽음에 관해 대화할 수 있어야

도티는 정신적·육체적·정서적 과정으로서 죽음이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고, 있는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도티는 이렇게 답한다. “존엄은 선택과 열린 대화에서 옵니다.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하는 것이 무례하고, 금기시되고, 무섭고 징그러운 일로 여겨지는 문화에서 죽음은 수치스럽고 피해야 할 것이 됩니다. 하지만 죽음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내려진 벌은 더욱 아니고요. 우리는 공동체와 죽음에 대해 솔직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이든, 상실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든. 존엄이라는 것은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존엄사’할 권리를 허용한 주다. 말기 시한부 환자들이 의사로부터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 도티는 존엄사법이 있음에도 많은 환자들이 약을 선택하지 않고 질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자신에게 선택지가 있다고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위로를 받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절망적일 때 ‘그래, 약을 먹자’고 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존엄한 죽음을 만든다. 그러나 죽음을 실패로 규정짓는 의료시스템에서 ‘다른 대안’을 꿈꾸기란 쉽지 않다.

도티는 대안적인 죽음 문화를 탐구하는 예술가 집단인 ‘좋은 죽음 교단’이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대화에 친숙하게 참여하기를 바랐다. “내가 지금 나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가? 사람들에게 충분히 다정한가? 내게 변화시킬 시간이 남아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시간에 ‘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즉 죽음을 받아들일 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거든요.” 죽음에 대해 침묵할수록 존엄한 삶의 모습과도 멀어진다.

가족들과 친구들끼리 죽음에 관한 대화를 시도해보는 일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거절당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죽음에 관한 대화는 당신과 부모님, 배우자, 자녀들의 관계를 변화시킬 겁니다.” 집과 병원 어디서 죽음을 맞을지, 어떻게 ‘처리’되고 싶은지 꼭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화장장에서 죽음을 일상처럼 마주했던 장의사 도티가 건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든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르르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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