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송병기 연구원(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이 김희강 교수(고려대 행정학과·왼쪽)를 만나 돌봄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 듦, 질병, 돌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다. ‘존엄한 죽음’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사IN〉은 의사·의료인류학자·환자·보호자·간병인 등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목소리에서 출발해 ‘죽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현장까지 두루 살펴봤다. 기사는 총 5회 연재된다.

①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
②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 ‘아픈 몸’도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음을

③ 의학은 돌봄을 가르치지 않았다
  - “환자 집에 가면 질병이 작아 보여요”
④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돌봄으로부터
⑤ 죽음의 미래를 찾아서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은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제가 죽고 싶은 곳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바라는 임종의 순간을 상상으로만 남겨둔 채, 혹은 상상할 틈도 없이 병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세상을 떠나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김희강 교수(고려대 행정학과)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의 풍경은 단순하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동안 홀로 방치되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삶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저의 삶과 죽음을 긍정해줬으면 해요. 임종이 가까워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긍정의 방식은 조촐하겠지만요. 손을 잡아준다거나 눈을 맞춰준다거나.”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조촐’한 긍정조차 쉽지 않다. 김희강 교수는 그걸 가능하도록 만들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내가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내 지인들이 나를 돌볼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그들을 돌봐주는 겁니다.”

‘좋은 죽음은 좋은 돌봄으로부터’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다. 돌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김희강 교수의 전공이 정치철학인 이유다. 그는 돌봄 연구에서 세계적 석학인 조앤 C. 트론토 미네소타 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저서 〈돌봄 민주주의〉를 번역하기도 했다. 11월28일 송병기 연구원(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이 김희강 교수를 만나 ‘죽음의 미래’를 탐색했다.

송병기:요즘 들어 ‘돌봄’이나 ‘돌봄노동’이라는 단어가 참 자주 쓰입니다. ‘돌봄’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전제부터 짚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대체 돌봄이란 무엇일까요.

김희강:돌봄은 취약한 인간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취약한 사람도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그들이 처할 만한 위험을 방지하는 모든 활동이 돌봄인 거죠. 여기서 취약한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일정 기간, 또 죽기 전 일정 기간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100세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중 40%가 타인에게 의존하는 기간이라고 하거든요. 물론 누군가는 조금 더 짧게, 누군가는 더 길게 의존하는 기간을 겪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누군가 돌봄을 받았다는 건 누군가가 돌봄을 줬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거예요.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는 인간이 살아가는 필수적인 조건인 거죠.

송병기:우리 사회는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인간’을 강조하는 동시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도 강조하는데요.

김희강:사실 누구나 의존의 기간을 거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 된 거예요. 독립적이고 생산적인 인간조차 한때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 성장했고, 앞으로 죽기 전에도 누군가의 돌봄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의 돌봄을 통해서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해요.

송병기:왜 자꾸 그 전제가 간과될까요?

김희강:18~19세기에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분리될 수 있다는 허상이 생겨납니다. 쉽게 말하면 ‘남성은 공적영역인 시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사적영역인 집에 남아서 아이를 돌본다’는 건데요. 이런 구조 속에서 여성이 하는 집안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허드렛일, 일이 아닌 것, 심지어 본성으로 취급됩니다. 그러다 ‘돌봄노동’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게 된 건 이제껏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걸 노동으로 인정받겠다는 시도인 거죠. 가사일이 월 300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집에서 논다’고 생각했던 걸 ‘300만원짜리 일이구나’라고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노동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하기 시작한 거예요.

ⓒ시사IN 신선영모든 인간은 삶의 40%가 타인에게 의존하는 기간이다.

송병기:하지만 돌봄을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희강:저도 돌봄을 노동으로만 한정하는 데 회의적이에요. 물론 ‘돌봄노동’이라는 단어가 돌봄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돌봄은 그 이상의 사회적 가치와 규범으로도 살펴봐야 합니다. ‘돌봄노동’이라는 단어에만 매몰되면 근본적으로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 돌봄 관계의 사회적 가치까지 이야기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돌봄노동’이라는 표현보다 ‘돌봄 제공자’ 등의 표현을 더 사용합니다.

송병기:돌봄 제공자는 여전히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공적영역-사적영역’이라는 이분법이 깨지고 여성이 노동시장으로 많이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요.

김희강:돌봄을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하긴 어려워요. 시장에서는 생산성을 따지고 성과관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돌봄은 고단하게 계속 반복되는 일이거든요. 돌봄 수혜자와 돌봄 제공자 간의 애착과 공감대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정량화도 어렵습니다. 돌봄은 시장의 잣대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장에서 상당히 저평가돼 있어요. 이런 성별분업과 노동 중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돌봄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배제되고, 결국 돌봄 제공자는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불이익을 겪는 악순환의 구조가 만들어지는 거죠. 누가 됐든 돌봄 제공자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주로 여성인 게 현실이고요. 〈돌봄:사랑의 노동〉(박영사, 2016)이라는 책을 쓴 에바 페더 키테이 교수(뉴욕 주립대학 철학과)는 돌봄 제공자가 어떻게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해지는지 설명합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의 취약성이 불가피한 생물학적 취약성(1차 의존)이라면,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취약성은 구조적 취약성(2차 의존)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코로나19로 아이나 부모님을 돌보다 직장 내 휴가마저 다 써버린 여성에게 남은 선택지는 퇴사밖에 없죠. 직장을 다니기 위해서 돌봄을 버리는 비정한 엄마나 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요. 취약한 돌봄 제공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송병기:돌봄이 젠더화되고 시장에서 저평가되면서 발생하는 한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여성들도 경제적으로 여력이 되면 돌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쓴다는 건데요.

ⓒ시사IN 신선영7월29일 한 요양보호사(오른쪽)가 90세 어르신 집을 방문해 돌봄노동을 하고 있다.

김희강:공적 돌봄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니 돌봄을 외주 주는 거죠. 돌봄을 사는 겁니다. 보통 ‘제3세계’라고 불리는 곳의 여성들이 제1세계에 와서 돌봄 공백을 메우게 돼요. 그렇게 되면 제3세계 여성의 가정에도 돌봄 공백이 생기죠. 이제 제3세계에서도 어린 여성이나 할머니와 같은 약자에게 돌봄이 전가됩니다. 또 다른 악순환이죠. 돌봄이 글로벌 이슈, 글로벌 정치와도 연결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집안 윤리’라고 낮잡아 말하던 가족의 일, 돌봄의 일이라는 게 사실 굉장히 정치적인 일인 겁니다.

송병기:국내에서도 돌봄이 정치, 국가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김희강:제가 생각하기에 국가의 역할은 돌봄이 당당한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그건 국가가 돌봄을 제공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돌봄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 국가가 모든 돌봄을 책임지고 제공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어쩌면 국가가 민간에 돌봄을 위탁해서 재정을 지원하고 관리감독하는 게 일반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송병기:정부의 규제와 관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으시는군요.

김희강: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런 규제와 관리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눈여겨볼 필요는 있습니다. 돌봄 당사자나 돌봄 제공자, 지역사회가 참여해서 민주적인 형식으로 만들어진 규제라면 따라야 하겠죠. 반대로 상명하달식 규제가 내려와서 공무원들이 수치에 집착하는 그런 규제라면 현장에서도 반발이 클 거고요.

송병기:하지만 돌봄이라는 게 워낙 근본적인 일이다 보니 정치와 경제가 포착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끝내 제도나 화폐로는 전환되지 못하는 영역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김희강:돌봄은 결국 어느 정도 개인의 윤리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건 시민교육이라고 봐요.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을 이해하고, 취약한 사람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키우며, 돌봄을 긍정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교과과정이 필요해요. 한 가지 중요한 건 돌봄 교육에서 이론뿐만 아니라 경험도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돌봄을 주고받는 건 살과 살이 맞닿고 몸과 몸이 맞닿으며 감정을 교류하는 일이거든요. 돌봄은 직접 해봐야 알아요. ‘시민은 길러진다’는 전제가 있잖아요. 돌봄도 마찬가지예요. 취약한 상대를 봤을 때 자극을 받는 인간, 그게 시민인 거죠.

송병기:돌봄 교육 말고 이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요.

김희강:돌봄 사회, 돌봄 국가로 가는 사회적 의례일 수도 있고 상징 행위일 수도 있는데요, 돌봄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헌법이라는 게 정치적 산물이거든요. 한 시대를 반성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 국가들의 헌법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경험하고 그 반성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코로나19 이후에 뉴노멀이니 뉴딜이니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뉴 돌봄’ ‘돌봄 뉴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송병기:헌법 명문화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려면요?

김희강:돌봄 제공자들이 느끼는 답답함, 압박감, 부당함, ‘아 이거 뭔가 잘못됐다’ 하는 불의감에는 정당한 분노가 있어요. 평등과 공정의 맥락에서 이거 옳지 않다, 왜 돌봄 하는 사람들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 이런 문제 제기들은 사실 돌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정당한 분노잖아요. 돌봄이 이 정당한 분노들을 모아 표출하는 하나의 정치적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노동의 언어로도, 제도의 언어로도 설명하지 못했던 사람들,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한데 뭉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그런 분노는 정당하고, 정당한 분노는 표출돼야 해요. 그게 정치적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이라면 ‘돌봄 책임복무제’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민의 의무로서 모든 국민이 일정 기간 돌봄에 참여하는 겁니다. ‘돌봄이라는 게 누군가 정해진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하는 일이구나’ 하고 느끼는 체감과 공감이 어떻게 돌봄 책임을 재분배할 수 있을 것인지와 관련된 사회적 논의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최근에는 사회복무요원이나 대체복무요원들이 돌봄 현장에서 일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변화와도 맞물려 있고요.

송병기:하루종일 환자를 돌보지만 노동자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간병인들도 있는데요. 말씀하신 ‘정당한 분노’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간병 급여화’와 같은 정책도 신속히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김희강:돌봄이라는 건 거리두기가 불가능하잖아요. 대학병원 간병인분들은 하루 쉬고 주 6일 24시간 내내 환자와 붙어 있거든요. 그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공적 담론으로 끌어낼 여력도 시간도 자원도 없어요. 돌봄은 돌봄 수혜자-돌봄 제공자 간의 양자관계를 넘어서 3자 관계(양자관계를 지지하는 사회경제적 지원), 4자 관계(3자 관계를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일)도 필요하거든요.

송병기:말씀하신 대로 돌봄은 일상, 정치, 경제, 글로벌 역학 관계까지 연결돼 있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특히 돌봄이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같은데요. ‘죽음의 미래’를 탐색하다 보니 결국 돌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희강:어떻게 보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런 대안 가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잖아요. 미국처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논리가 강한 곳은 비판적 논의가 더 활기를 띠고 있고요. 돌봄을 이야기해온 사람으로서 그동안 아무리 이걸 말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코로나19가 이런 변화를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될 줄 몰랐어요. 사람들이 누구나 질병에 걸릴 수 있는 취약한 환경에 마주하니까 비로소 돌봄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 거죠.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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