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그림

오래 사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건강하지도 않고, 몸과 마음을 챙기지 못하면서 연명하는 게 무슨 삶이냐고 묻는다. 비참하게 목숨을 유지하기보다 스스로 결정해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존엄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존엄에 대한 관심이다. 사는 것답게 살다 죽는 게 존엄한 죽음이다. 사는 것답게 산다는 의미는 바로 생명다움이다. 생기가 없는 삶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생명의 생기를 볼 줄 알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존엄이라고 할 수 있다. 생기를 가진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존엄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기를 볼 때 그 존재는 대체되지 않는다. 그 생명력에 감탄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혹은 식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고기를 먹는다고 해도 생명이 대체되지 않는다고 인식할 때와 고깃덩어리로 인식할 때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존엄에 대한 인식이란 대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인식이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뇌를 연구하는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게랄트 휘터가 쓴 책이다. 저자는 존엄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어떻게 다른지 뇌과학으로 풀어낸다(뇌과학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재주가 없기 때문에 독자들이 직접 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저자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충실하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의 근거는 대용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용물을 허락하지 않는 존재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대용물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저자는 어린 시절 그 세계를 우연한 만남으로 경험했다. 한 노신사가 숲속에서 식물 채집을 하고 있었다. 신사는 버스 타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고 저자와 친구들이 그 신사를 버스 정류장까지 안내한다.
이 노신사를 버스 정류장으로 데려가는 길에 저자는 자신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고 말한다. 그 길은 이미 소년들이 잘 알고 있었다. 길에 피어 있는 꽃과 나무도 익숙했다. 그럼에도 그날 소년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노신사가 들려준 꽃과 나무에 대한 새로운 설명과 함께 말이다.

노신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직진하지 않았다. 소년들과 동행하는 내내 길가에 있는 잡초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 꽃은 무엇이고 저 풀은 무엇이며…. 다시 말하지만 소년들이 모르는 풀이 아니었다. 저자는 노신사의 설명이 다른 어른들의 그것과 달랐다고 말한다. 다른 어른들이 주로 식물의 쓰임을 들려주었다면, 노신사는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단지 그 아름다움만을 설명했다.

다른 어른과 노신사의 설명은 무엇이 달랐을까? 노신사는 소년들에게 존재의 어떤 측면을 깨닫게 했을까? 바로 대체 불가능성에서 오는 존엄이다. 어떤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존재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그날 소년들은 익숙했던 꽃과 나무에서 생명 넘치는 환희의 세계를 경험했다. 이 숭고함, 바로 이것이 존엄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의 대체 불가능함을 깨닫는 사람은 존엄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대체 불가능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표상이 있어야 한다. 이 내적 표상을 자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아상은 ‘자신의 모든 경험을 연결하고 그 관계성을 파악하는 작업이 성공적일수록, 한 인격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생각이 확장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인격과 존엄에 대한 인식에 이른다. 유일한 존재로서 말이다.

물론 자기 자신만이 대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위험은 늘 존재한다. ‘자신의 이상과 신념에 따라 성장을 도모하며 자기 이해를 이룬 사람’이 ‘자신이 지닌 시각과 자아상, 인생관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도 힘들고, 특히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는 더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사람들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존엄의 보편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패와 만남이 필요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무너져 내리는 실패를 경험했을 때 인식의 한계를 넘는다. 이런 실패는 대부분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실패는 그저 성공하지 못함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한계의 자각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경험과 같은 회심이 바로 이런 실패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존엄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고 그것이 ‘자주 활성화시키는 경험과 행동 패턴’이 되어, ‘뇌 안에 구조적으로 저장’되어 있는 ‘뇌의 조직과 기능 방식에 근거를 두는 하나의 표상’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와 만남이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가 어린 시절 경험한, 생명의 환희를 깨닫게 해주는 만남 말이다. 이렇게 살면서 맺는 좋은 인간관계가 존엄에 대한 의식 자체를 일깨울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환대하는 사람들과 만나 ‘잊고 있던 유대감을 재발견’하고, ‘이 유대감은 자신과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되찾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저자가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 판결을 인용해 인간의 권리에 대해 말했듯이, 존엄이란 ‘고립되고 독단적인 개인’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존엄은 타인과의 ‘공존에서 오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며 어떤 모습으로 인간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념이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내적 표상이다.

문제는 이런 만남을 하기가 지극히 힘들어졌다는 데 있다. ‘갈수록 급해지고 복잡해지고 소란스러워지는 세상 속에서는 이들을 발견하거나 귀 기울이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하나의 이유다. 또 하나는 스스로의 존엄을 유지하고 타인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섣불리 나서지 않고 주의 깊고 신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더구나 ‘오늘날의 글로벌 디지털 사회에서는 먼저 목소리를 높여 주목을 받고,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남에게 영리하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사람만이 명예와 권력, 영향력을 손에’ 쥐는, 그런 사람이 성공의 본보기가 되는 시대이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대체한다.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라진다.

여기에 존엄의 딜레마가 있다. 존엄이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을 지는 태도의 문제’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라지는 순간, 전체 사회에서 존엄은 점점 사라져간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하는 시대’라고 말이다. 아직 존엄하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 우리 대다수 사람들의 반대쪽 사정으로 말한다면, 이런 존재를 만나려는 시도만은 부단히 하고 살아야 한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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