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인가, 미끄럼틀인가
  • 엄기호 (문화 연구자)
  • 호수 635
  • 승인 2019.11.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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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일 그림

곧 발간될 〈특권〉이라는 책에 추천사를 썼다. 이 책에 ‘과거의 특권계층은 세상을 피라미드로 인식했다면 현재의 특권층은 사다리로 인식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상을 사다리로 인식하면 위계의 의미는 달라진다. 피라미드에서 위계가 불평등을 의미했다면 사다리에서 위계는 기회다. 세상이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개인이 재능과 노력을 통해 그 사다리에 오를 수 있기에 나쁘지 않다. 능력주의를 정당화하고 작동시키는 방법이다.

이 내용이 흥미로워 경희대 교육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고 제안했다. 세상을 피라미드로 보는지 사다리로 생각하는지 그 모양을 세계상(像)이라고 하는데 그걸 알아보기로 했다. 학생들은 피라미드냐 사다리냐 하는 이분법적 답을 넘어 상세하고 예리하게 제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예상을 뛰어넘는 답은 ‘세상이 사다리도 피라미드도 아니고 미끄럼틀’이라는 것이다.

이전 세대들은 사회 위계를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사회의 성장을 경험했기에 올라가는 게 당연하고 내려오는 것을 예외로 간주한다. 중산층 이상 기득권층도 마찬가지다. 올라가는 것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설계한다.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기에 그 규칙이 공정해야 한다. 공정은 올라가는 데서 문제가 되지, 내려오는 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올라가는 데 반칙이 작동하지 않는 ‘규칙’이다. 규칙을 통해 추구하는 ‘공동선’으로서가 아니라 규칙 자체가 가치가 된다.

올라가려는 사람 말고 공정에 관심을 가지는 다른 한 부류가 있다. 올라가는 경쟁을 지켜보는 구경꾼이다. 어느 게임에서나 구경꾼들이 참가자 못지않게 규칙에 열광한다.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공정에 핏대를 올리는 이유 중 하나다. 올라갈 수 없는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지만 구경꾼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관심거리다.

그러나 지금의 세대, 특히 기득권층을 제외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회는 미끄럼틀에 가깝다. 올라가려 노력하지만 자칫하면 미끄러지고 한번 미끄러지면 나락이다. 올라가는 것을 독점하는 불공정의 문제도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미끄러지고 난 다음이다. 사다리가 미끄럼틀로 돌변하는 것은 한순간인데, 사다리에 대한 규칙은 있지만 미끄럼틀에 대한 규칙은 없다. 미끄러지고 난 다음에는 그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누가 미끄러지고, 미끄러진 자들은 어디로 모이는가? 〈까대기〉는 만화가 지망생인 한 청년이 서울에 올라와 택배 노동을 하며 만나고 겪은 일을 담담하게 풀어낸 만화다. 지방에 사는 저자는 만화가를 꿈꾸며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 선배 집에 머물지만 당장 돈이 필요해서 택배 ‘알바’를 시작한다. 노동이 아니라 굳이 ‘알바’라고 하는 이유는 주업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임시로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사용주나 노동자 모두에게 말이다.

미끄럼틀 아래에서 버려지는 사람들

다른 곳보다 시급 2000원을 더 쳐주어 한 달에 80만원 정도를 벌 수 있다는 계산에 그가 시작한 일이 ‘까대기’다. 이른 아침부터 4~5시간만 근무하므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만화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여겼다. 까대기는 택배 물건을 차에서 내리고 올리는 일이다. 몸이 혹사당한다고 해서 악명이 높은 일이다. 절대 오래 할 수 없어 “첫날에 힘들어서 도망가는 애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까대기 같은 육체노동, 정규직이 아니라 일용직이거나 이른바 택배 기사 같은 특수고용직인 육체노동이 미끄럼틀의 아래에 있다. 저자에게 까대기 일을 가르치고 가장 살갑게 대해주는 아저씨는 인쇄소 사장 출신이었다. 식당을 크게 하다가 폐업해서 온 부부도 있다. 대학생 때 아빠가 된 청년도 있다. 은행원 출신, 도박하다 망한 사람, 이주노동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는 경우 등 다양한 사람이 모이고 만난다. 망한 자들이 모인다.

이 만화에서는 담담하게 그리지만, 택배 노동은 인간 노동력의 극한을 보여주며 인간 생체리듬을 다 깨버리는 대표적인 현장이다. 화물차 기사들은 “초저녁에 출근해서 밤새 물류센터랑 지점을 오가는 운전”을 하며 “새벽 3~4시는 되어야 지점에 도착해서 지점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쪽잠을” 잔다. 택배 기사들은 “점심 먹으면 몸이 퍼져서” “편의점에서 김밥이나 빵으로 대충” 때우며 배달한다. 비 오는 날 배달하다가 넘어져도 자기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상품을 보호한다. 수수료 700원에 “생쇼를 한다”라고 자조한다.

한 사람의 생체리듬만 깨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생활리듬이 다르다 보니 통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아직 지리가 익숙지 않아 밤 12시가 넘어서야 퇴근한 초보 기사에게 동료가 이렇게 말한다. “택배 기사들은 집에서 사랑받기 힘들다.” 이 초보 택배 기사는 부부가 같이 일한다. 둘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끄럼틀의 아래에 필요한 것은 올라가는 자들의 공정이 아니다. 탈락하여 추락하는 것에 공정한 규칙이란 없다. ‘공정한 추락’이라는 말은 너무 웃기지 않는가? 미끄럼틀에서 일차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안전장치다. 미끄러진 사람들을 보호할 안전장치가 있는가? 그리고 이들이 다시 재기할 만한 장치가 있는가?

화물차에서 택배 노동자까지 외치는 구호가 “졸면 죽는다”이다. 병이 나더라도 일을 멈출 수 없다. 일하다 사고가 나도 119에 신고하지 못한다. 대신 지점장이 ‘아는 병원’의 구급차를 부른다. “산재보험도 안 들어서 영업장이 신고당할까 봐” 걱정해서다. ‘아는 병원 구급차’와 ‘119’가 오는 시간 차 사이에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다.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다. 그저 소모되고 버려질 뿐이다.

미끄럼틀 아래에서는 존재 자체가 전혀 안전하지 않다. 자기가 언제 어떤 위험을 당해서 소멸할지 모른다. 자기가 소멸하면 즉각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 일말의 아쉬움도 없다. 미끄럼틀 아래는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 존재 자체가 존중받지 못한다. 개체로, 관계로, 세계 안의 존재로 이 모든 게 위협당하고 파괴된다.

안전에 대한 요구는 언제나 ‘존재에 대한 존중’의 요구로 이어졌다. 처음 시작은 임금투쟁이고 노동조건 개선이지만 그 끝에서 아래의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존재에 대한 존중이었다. 처음에는 월급 좀 올려받고 싶고 장갑 하나 더 지급받고 싶었지만, 싸움이 커지고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제도와 구조에 의해 얼마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는지 깨닫는다.

희망이 있다면 이 존중을 요구하는 방식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대부분 몰릴 대로 몰리고 나서 울부짖으며 터져 나오던 말이었다. 이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존중’을 분명하게 또박또박 요구한다. 당신들이 훼손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정확하게 경고한다. 그 존중의 경계가 무너졌을 때 주저 없이 반응한다. 〈까대기〉에서 종범도 “몇천원 더 받자고 하는 짓 치고는 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알바라지만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는 거지”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사다리에서 공정이 중요했다면 미끄럼틀에서는 존중이 중요하다. 사다리에서 공정한 제도가 중요하다면 미끄럼틀에서는 존중과 존엄의 제도화가 중요하다.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달라진다. 무엇을 공동선으로 놓을지가 달라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에 있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아래’에 놓인 사람들이 이 사회를 무엇으로 경험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야기는 아래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기술적 가치가 넘는 공동선으로서의 높은 뜻은 거기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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