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그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느낌에 뿌듯함이 있다. 뿌듯함을 느낄 때 사람은 자기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뿌듯함을 느끼는 여러 방법이 있다. 못할 것을 해냈을 때 뿌듯함이 든다. 성취를 넘어 자기 평가가 상승한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질 때 오는 뿌듯함이다.

뿌듯함을 느끼는 또 다른 방법은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했을 때다. 언덕길에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는 노인을 도와주었을 때나 곤란한 일을 당한 사람을 기꺼이 도와줬을 때 사람은 뿌듯함을 느낀다. 이 뿌듯함은 성취로부터 오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기여하고 참여해서 드는 뿌듯함이다.

헌혈은 이런 ‘좋은 일’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다. 자발적으로 헌혈하는 사람에게 경제적인 보상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평판이 좋아지기도 하는데, 평판을 바라고 경쟁적으로 헌혈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헌혈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대체 불가능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기꺼이 남을 위해 자기 시간을 내어준다. 수혈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 수도 없는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동참했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낀다. 낯선 이와 연결되며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인간됨(humanity)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뿌듯하다.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만족과는 달리 자기를 넘어서는 데서 오는 뿌듯함이다.

영국 복지국가를 설계한 이론가인 리처드 M. 티트머스는 〈선물관계〉에서 ‘사회정책’이란 구성원들 사이에 “통합을 창조하고 소외를 약화시키는 그런 제도들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결속을 활성화하는 것이 사회정책이다. 구성원들이 가만히 있어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잘 돌아가는 게 사회정책은 아니다. 사회정책은 경제정책과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사회정책이 추구하는 방향은 시민과 시민의 연결이고 결속이다. 어느 정도 자발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자부심을 느끼고 존재감을 느끼면 사회는 튼튼해진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서 말한 대로 시민이 훌륭해지면 폴리스가 훌륭해진다. 사회정책은 가난한 이를 돕고 시민이 훌륭해질 수 있게 권장한다.

티트머스가 쓴 〈선물관계〉는 시장화에 맞서 복지국가의 사회정책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지켜낸 기념비적인 저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헌혈을 분석함으로써 왜 ‘교환’이 아닌 ‘선물’로서 헌혈이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더 나은지 설명한다. 사회정책에 의해 헌혈이 선물이 될 때 사회는 단단해지고, 사람들은 존재감의 고양을 경험하게 된다.

자발적 헌혈은 ‘창조적 이타주의’

이 책은 헌혈이 돈을 내고 사고파는 교환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물이 되었을 때 더 안전하고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혈액 증여의 가장 큰 문제는 증여자가 혈액을 통해 전염되는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 수혈자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간염이나 HIV/AIDS(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와 같은 질병이 대표적이다. 선의로 헌혈하더라도 그 선의로 타인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헌혈은 “낯선 사람 사이의 선물 행위”이다. 헌혈은 “선물의 수혜자를 알지 못하고 결코 볼 수 없다”. 수혈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누가 증여했는지 알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다. 대부분 이 낯선 둘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무책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익명성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의 신중함이 중요하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감염 가능한 행위가 있었는지 점검한다. 자기가 하는 ‘선의의 행위’가 타인에게 미칠 여파를 생각하며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자발적 적극성이란 신중함에서의 적극성을 의미한다. 이런 적극적 신중함을 가지고 타인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을 ‘공적 정신을 가진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매혈을 하는 사람과 대가 없이 헌혈하는 사람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적극성과 적극적 신중함이 더 높은지를 보여주는 게 이 책의 성과다. “보수를 받는 혈액 판매자들은 개인적인 이해의 충돌”에 직면하고 경제적 필요에 따라 행위하기에 진실하지 못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진실하지 못함의 사회적 비용”은 분명하다.

티트머스는 혈액의 사적 시장화가 행위자에게 두 가지 해방을 준다고 말한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감에서 해방”됨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 포함된다는 감각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는 자발적으로 헌혈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미래에 다른 사람이 기꺼이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 즉 “미래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확신”과 정확히 대치된다. 한쪽은 타자로부터 해방되고, 다른 한쪽은 타자에 대한 믿음을 구축한다.

공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사사성(私社性)에 고립된 개인이 있다. 그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일까? 매혈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이다. 궁핍하기에 익명성의 무책임함에 기대어 자기의 혈액 상태를 신중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혈액을 판다. 더구나 경제체제는 이들을 ‘어설픈 존재’로 이용한다.

반대로 자발적으로 헌혈하는 증여자는 공적인 존재로 자기를 창조한다. 〈선물관계〉에서는 ‘창조적 이타주의’라고 규정한다.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나 답례 선물 또는 행동에 대한 개인적 권리를 수반하지 않는 사회적 선물과 행동”이기 때문에 “익명의 타자들을 도움으로써 자아가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이라고 말한다. 대가 없이 타자를 돕는 행위는 시장에서 훼손된 존재감을 회복하고 공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창조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우정과 동료애를 도덕적 낭만화가 아니라 정책의 문제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티트머스가 던지는 질문은 “누가 나의 낯선 사람인가”이다. 이 낯선 이들은 서로에게 악마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는 그 낯선 이들의 이웃이 될 수 있다. 평생 만날 일이 없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정책이란 만나지 않고도 선물과 증여를 통해 낯선 이들이 서로를 이웃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정책이다. 티트머스는 자발적 헌혈 시스템이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 사이”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동료애 관계”를 구축하고 작동시키는지 입증한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특정한 사회정책의 도구에 의해 촉진되고 격려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사회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좋을 일을 하며 뿌듯함을 많이 느끼는 사회다. 이 ‘좋은 일’이 전적으로 개인의 호의에 맡겨진다면 좋은 사회가 아니다. 개인의 호의와 선의가 배반당하지 않도록, 좋은 일이 좋을 일이 되도록 신뢰를 구축해야 좋은 사회다. 그럴 때 사람들은 기꺼이 그 좋은 일에 동참하며 참여와 기여의 기쁨과 뿌듯함을 느낀다. 이런 뿌듯함을 많이 경험할수록 세상은 살 만해지고 사람은 사람에 대해 희망을 갖고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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