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동결, 트럼프의 새로운 계산법?
  •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 호수 617
  • 승인 2019.07.1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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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핵 동결 카드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워싱턴 외교가에서 흘러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인하지 않는 가운데 핵 동결설이 힘을 얻고 있다.
북한 핵에 대한 워싱턴의 ‘새로운 계산법’은 핵 동결(nuclear freeze)일까? 6월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전격 회동한 뒤 요즘 워싱턴 외교가에 부쩍 나도는 화두다.

북한은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했다. 그 시한도 올 연말까지 제시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핵 동결’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곧 재개될 북·미 실무회담에 이목이 잔뜩 쏠린다.

‘핵 동결설’의 진원지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의 판문점 회동이 있던 당일 <뉴욕타임스>의 단독 보도다. 이 신문은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운 대북 협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는데, 그 틀이 ‘핵 동결(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과 사실상 같은 맥락”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의 파장을 감안한 듯 <뉴욕타임스>는 이례적으로 보도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20년 이상 북핵 문제를 추적해온 외교통 데이비드 생어와 백악관 출입기자 마이클 크롤리가 공동으로 취재해 보도한 것으로 볼 때 터무니없는 내용은 아닐 듯하다.
ⓒAP Photo6월30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에서 지척에 있는 오울렛 초소를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이 보도가 나오자마자 대북 강경론자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국가안보실 누구도 그런 구상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누군가의 괘씸한 짓이다”라고 발끈했다. 하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이 보도에 대해 부인하기는커녕 침묵을 지키고 폼페이오 국무장관 역시 비슷한 기조다. 핵 동결설이 허구가 아닌 실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퍼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기류 변화는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특별대표)의 발언에서도 감지된다. 그는 판문점 회동 후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비보도(off the record)’를 전제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비건 특별대표는 이 간담회에서 “미국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핵과 미사일을 포함한 북한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해 ‘완전한 동결’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북한과 서로 주고받는 식의 협상에 열린 자세로 임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핵 동결의 대가로 ‘인도적 차원의 지원’ ‘인적 교류’ ‘북·미 관계 개선’ 등에서 양보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북한 측이 ‘완전한 동결’을 시행한다 해도 대북 제재를 해제하지는 않는다”라거나 “제재 해제는 북한의 ‘완전 비핵화’가 실현되어야 가능하다”라는 등 그는 기존 방침도 재천명했다.

볼턴의 입김, 협상 과정에서 줄어들 것


비건 특별대표의 발언대로라면, 미국은 조만간 재개될 실무협상에서 그동안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단계적·동시 행동’을 일부 수용하며, 처음부터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기보다는 핵 동결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의 완전 비핵화’라는 전략을 유지하되, 일단 핵 동결 카드를 제시하면서 북한과 주고받기식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 국장은 CNN과 인터뷰하면서 “먼저 북한의 현존 핵무기 창고부터 제한한 뒤 장기적으로 모든 핵무기를 제로 상태로 만드는 전략이라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핵 동결 카드에 대한 지지 의견이다.

그러나 핵 동결이 북한에 마냥 반가운 카드인 것은 아니다. 북측은 핵 동결을 입증할 검증 체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삼키기 힘든 쓴 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클래퍼 전 국장이 “매우 복잡한 협상”을 전망하는 이유다. 이후 실무협상에서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부차관보는 매우 회의적이다. 그는 외교통상 전문 정보지 <넬슨리포트>에서 “비핵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트럼프 대통령처럼 김정은 위원장도 ‘비핵화 가능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판문점 회동은 그 환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조지타운 대학 교수)는 MSNBC 방송에 나와 “텔레비전용 이벤트성이 강한 판문점 회동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에 대한 항구적이고 완전한 포기를 이끌어낸 뒤에야 비로소 역사적 회동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판문점 회동처럼 전통적 외교 관례와 다른 ‘톱다운’ 방식을 추진해온 트럼프 대통령은 계속 같은 기조를 유지하리라 보인다. 적어도 북핵 문제에 관한 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에 앉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이번 판문점 회동에서 존 볼턴 보좌관이 빠진 것은 예사롭지 않다. 백악관 측은 볼턴 보좌관이 몽골 방문 때문에 판문점 회동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벌써부터 향후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그의 입김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시사지 <애틀랜틱>은 “지난 20년 동안 그 누구보다 대북 포용정책을 반대해온 볼턴 보좌관이 판문점 회동에서 눈에 띄지 않은 건 매우 특이한 일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최근 볼턴을 ‘트럼프 행정부에 기생하는 촌충’이라고 부른 <폭스뉴스> 토크쇼 진행자 터커 칼슨이 (판문점 회동에서)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는 흥미로운 분석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 방한에 동행한 칼슨은 저명한 보수 성향의 논평가로 일관되게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옹호해왔다. 일각에서 ‘트럼프의 비공식 안보보좌관’이라 부를 정도다.

이번 판문점 회동의 미국 측 배석자 명단에 앨리슨 후커 국가안보회의(NSC) 한국 담당관이 보였지만 그의 선임이자 대북 강경파인 매슈 포틴저 아시아 국장이 눈에 띄지 않은 것도 특기할 만하다. 판문점의 역사적인 북·미 정상 회동 순간 포틴저 국장은 볼턴 보좌관과 함께 한반도에서 1600㎞ 떨어진 몽골에 있었다. 두 참모 대신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장녀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대통령 선임고문 자격으로 배석한 것도 향후 미국의 대북정책과 관련해 눈여겨볼 대목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핵 동결을 추진한다고 해도 북한이 ‘영변을 포함한 모든 핵시설 폐기’ 등 획기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경제제재를 풀지는 않으리라 본다. 내년 11월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주당에게 안보에 취약하다는 공격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조지프 바이든 전 부통령은 판문점 회동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안보와 국익을 저버린 채 독재자를 지극히 대접하고 있다”라고 공격했다. 민주당의 또 다른 후보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도 “우리나라 대통령이 무자비한 독재자와 러브레터를 교환하고 사진이나 찍는 데 미국의 영향력을 허비해선 안 되며, 원칙 있는 대북 협상으로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르지 않을 태세다. 그는 판문점 회동 이후의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서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내년 대선까지 신속한 타결보다는 협상을 통한 ‘상황 관리’에 더 치중하겠다고 시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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