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북·미 판문점 회동 때 트럼프 대통령 옆에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볼턴 보좌관의 입지를 둘러싼 설왕설래가 그치지 않고 있다. 판문점 회동 이후 미국의 대북 ‘핵 동결’ 방안이 급속히 힘을 얻으면서 트럼프 행정부 내의 초강경 대북 매파인 볼턴 보좌관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요구한 빅딜, 즉 ‘전면 비핵화’의 입안자가 볼턴 보좌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핵 동결 방안이 미국의 협상 목표로 낙착될 경우 그의 입지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문은 그가 판문점 회동 당시 현장에서 1600㎞ 떨어진 몽골에 체류한 사실이 확인되며 증폭되었다. 당시 그는 또 하나의 대북 매파인 매슈 포틴저 아시아담당 선임국장과 함께 몽골에 있었다. 백악관 측은 볼턴 보좌관의 몽골 방문 일정이 한 달 전에 잡혔다고 해명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일정이 잡혔어도 판문점 회동 같은 중대한 상황이 생겼을 때 몽골 방문을 미루는 것이 자연스럽다. 트럼프 대통령도 그의 몽골행을 만류했을 터이다. 볼턴 보좌관의 ‘수상한 부재’를 심상치 않게 보는 까닭이다.

ⓒ볼턴 보좌관 트위터 갈무리6월30일 몽골을 방문한 존 볼턴 보좌관(왼쪽)이 몽골 측 인사와 만났다.


판문점 회동과 때를 같이해 날아든 핵 동결안도 그의 입지를 흔들었다. 회동 당일 〈뉴욕타임스〉는 북핵 정책에 관여하는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리들이 비핵화 협상에서 전면 비핵화가 아닌 핵 동결을 목표로 논의 중이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자 볼턴 보좌관은 “나를 포함해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누구도 핵 동결안을 듣거나 논의한 적이 없다.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괘씸한 짓이다”라고 말했다(〈시사IN〉 제617호 ‘비핵화는 글렀어, 핵 동결로 가야겠어?’ 기사 참조).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핵 동결안 논의의 진원지가 협상 주무 부처인 국무부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대북 협상의 미국 측 실무대표인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이하 특별대표)도 처음에는 핵 동결설을 ‘순전한 억측’이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그는 판문점 회동 후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하면 인도주의적 지원이나 외교관계 개선 등의 조치가 가능하다. 향후 협상 과정에서 북한의 완전한 핵 동결을 원한다”라고 밝혔다.

판문점 회동 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북핵 협상의 재가동을 일임한 상태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비건 특별대표가 핵 동결안을 들고 북한 측과 조만간 본격 실무협상을 벌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렇게 되면 하노이 회담 이후 하늘을 찔렀던 볼턴 보좌관의 기세가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그는 하노이 회담 당시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인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의기양양했다. 그의 빅딜 구상 앞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제시한 영변 핵단지 폐쇄안은 물거품이 되었다.

 

 

ⓒ판문점 조선중앙통신6월30일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공개적으로 볼턴 면박”

하지만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뒤 북·미 관계가 긴장 상태에 빠지고 문재인 대통령까지 중재에 나서는 등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볼턴 보좌관의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 4월11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한 뒤 빅딜 원칙론을 거론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의 ‘스몰딜(Small Deal)’도 가능하다”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스몰딜은 북한이 주장해온 ‘단계적·동시 행동’에 근접한 주고받기식 협상이다.

흥미롭게도 볼턴 보좌관은 지난 6월 말 핵 동결안 최초 보도 당시 격한 반응을 보인 뒤 잠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 보좌관이 격하게 반응한 다음 날, 단계별 북핵 해법을 부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백악관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NBC 방송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볼턴을 면박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말했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판문점 회동 이후 ‘빅딜’ 혹은 ‘전면 비핵화’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리들은 북한의 기존 핵시설을 동결해 추가 핵물질 생산을 막는 데 초점을 두고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는, 핵 동결 방안에 대해 집중 논의해왔다. 트럼프 행정부 내 초강경 보좌관들의 영향력이 제한적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핵 동결안이 현실적인 비핵화 협상 의제로 사실상 자리를 잡으면 존 볼턴 보좌관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그는 2001년 5월,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으로 임명된 뒤 역대 행정부에서 초지일관 초강경 대북 매파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되기 직전에 쓴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그는 북한을 ‘임박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선제공격을 주창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국가안보보좌관’이라는 직위는 국무장관처럼 한 정부의 부처를 거느리는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각 부처의 의견을 조율해 대통령에게 언제든 조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막강한 지위다. 국가안보보좌관의 힘은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데서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언론에 “볼턴 보좌관이 일반적으로 강경 입장이긴 해도 일은 아주 잘한다”라고 말했다. 아직은 신임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란의 미국 무인기 격추 사건에 대해 볼턴 보좌관이 주도한 추가 제재를 승인한 바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5월 말부터 이란에 대한 볼턴 보좌관의 초강경 입장과는 거리를 두어왔다. 특히 지난 6월21일 이란 공격 개시 2분 전에 전격 중단한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는 볼턴 보좌관을 크게 실망시켰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볼턴 보좌관의 견해 차이는 이란보다 대북한 정책에서 더욱 선명해 보인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더 그렇다. 단적인 사례로 지난 5월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자 볼턴 보좌관은 ‘안보리 결의사항 위반’이라며 펄펄 뛰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은 달랐다. “북한이 소형 무기를 발사해 보좌진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내게 한 약속을 신뢰한다.” 사실상 볼턴 보좌관을 겨냥한 발언이다.

결국 판문점 회동 이후 볼턴 보좌관의 입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달라진 북핵 접근법에 순응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외교 전문지 〈넬슨리포트〉의 크리스 넬슨 편집인은 “국무부 소속 북핵 전문가들이 핵 동결안의 세부 사항을 설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볼턴이 최근 의도적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 부처 사이의 의견 조율을 방기하면서 (핵 동결안의 향방이) 오리무중인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볼턴 보좌관의 ‘저항’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스타브리디스 장군은 NBC 뉴스 인터뷰에서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과 북핵 해법에 관한 견해차를 줄이든가, 그게 싫다면 다른 자리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