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이 ‘어용 철학자’라고?
  • 장정일 (소설가)
  • 호수 613
  • 승인 2019.06.2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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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더우면 읽는 책이 얇아지고 주제도 가벼워진다. 더위가 닥치기 전에 두껍고 무거운 주제의 책 세 권을 미리 읽었다. 첫 번째 책은 남기호의 <헤겔과 그 적들>(사월의책, 2019). 헤겔은 마르크스에 의해 관념론(정신이 곧 실체) 철학을 대표하는 반동적인 철학자로 낙인찍혔다. 이후로 헤겔에게는 프로이센의 왕정복고를 지지했던 어용 철학자이자 ‘국가야말로 시민의 자유와 이성이 완벽하게 실현된 현실태’라고 강변했던 국가 철학자라는 악명이 줄곧 따라다녔다. 지은이는 이런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서구 철학계에서 헤겔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려는 시도는 1980년대 말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헤겔의 신원 작업에 나선 최근의 대표 주자는 방언을 하는 자로 알려진 슬라보이 지제크다. 그는 1995년에 출간된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b, 2005)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치와 관련하여, 젊었을 때는 ‘혁명적’이었으나 노년에 가서 자신의 전복적 기원을 배반하고 국가 철학자가 되었다고 하는 헤겔에 대한 표준적 신화를 바꾸어놓고만 싶다.” 지제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동원하여 헤겔의 보편성(인륜성·국가)을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닫히고 완결된 계(界)가 아니라, 틈새나 구멍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시민(주체)은 기계적인 반복과 같은 교양(Bildung)의 연마를 필요로 한다(‘기계적 반복’을 ‘멈출 줄 모르는 부정성’으로 바꾸어 읽으시오!).
ⓒ이지영

남기호는 헤겔을 오해하게 만든 그의 주저 <법철학 개요>를 중심에 놓고 헤겔의 적들을 하나씩 논파한다. 그러면서 <법철학 개요>에서 헤겔이 논구했던 ‘헌법’의 요체를 독자에게 귀띔한다. <법철학 개요>의 핵심은 “누가 헌법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우선 헤겔은 헌법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간주하지 말아야 하며, 항상 특수와 보편이라는 관계 속에서 “변경”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변경을 만드는 주체는 선택된 소수가 아니라, 경제적 삶을 살아가는 일상인(특수)인 동시에 교양인(보편)들이다. 무더위가 오기 전에 이 책을 통독하겠다고 마음먹은 독자가 있다면, 169쪽 마지막 문단에서부터 178쪽 첫 문단까지를 꼼꼼히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이 대목에는 헤겔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군주의 상(像)이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구해야 하는 이상적인 지도자(대통령) 상과도 잘 들어맞는다. 또 이 대목은 지은이가 칼 슈미트를 논박했던 이 책의 마지막 장(제7장)을 훌륭하게 보충해준다.

두 번째 책은 5·18기념재단이 기획한 <너와 나의 5·18>(오월의봄, 2019)이다. 이 책의 필진은 5·18을 1980년이라는 시간과 광주라는 지역에 국한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를 ‘5월 운동’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1980년 열흘간의 5·18민주화운동은 계엄군의 진압에 의해 무참한 패배로 일단락되었지만, 이 항쟁을 결국 ‘승리’한 항쟁으로 만든 것은 이후 20여 년간 끊임없이 군사독재 정권의 기초를 침식해 들어가 마침내 민주적인 헌법을 쟁취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 회복, 나아가 마침내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을 이루어낸 ‘5월 운동’이었다(정문영).”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미국은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한 무력 진압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지만, 전두환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제5공화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지 못한 이유는 5·18의 학살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부담감 (김정한)” 때문이었다. 5월은 6월 민주항쟁 당시 군대가 거리가 아닌 병영에 머물게 하는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으니, 한국의 민주화는 5·18 영령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5·18을 부인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반동이 심해졌다. 이들의 망발은 즉흥적이거나 우연적인 실수가 아니다. 이들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의 살인 행각을 ‘구국의 결단’으로 미화하면서 전두환과 똑같은 반역의 무리가 되었다. 까닭은 “5·18의 진실을 왜곡하여 지역주의와 반공주의의 프레임에 5·18을 가둬(은우근)” 놓음으로써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프레임이 사라지지 않는 한, 5월 운동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읽은 최자영의 <시민과 정부 간 무기의 평등>(헤로도토스, 2018)은 촛불혁명 이후의 진로를 가리키고 있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은 시민에게도 무기가 있어야 정부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미국의 반연방주의자와 우익 민병대의 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촛불혁명 이후의 진로를 가리키는 책


나아가 저 제목은 광주 시민이 총을 들고 전두환 반역군에게 맞섰던 반폭력(anti-violence)의 정당성을 떠올려주기도 한다(반폭력은 폭력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과 달리 폭력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소멸시키겠다는 ‘절멸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시민군의 차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말하는 무기는 총기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말이나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먹혀들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의 무력 조직이 시민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국가와 시민 간의 무기의 평등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시민이 가진 무기란 권위적, 비합리적 공권력의 부패를 고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제도를 일상화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국민에게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와 국회의원, 판·검사, 경찰을 감시하고 징치할 수 있는 제도(무기)가 없는 이상 시민은 개돼지와 같다. 노회찬은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명단을 공표한 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로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의 자살은 그 결과가 누적된 것이다. 이처럼 선출되지 않은 권력(사법부)에 의해 정의가 유린될 때, 이들을 징치할 수 있는 제도가 없는 이상 시민들은 언제나 소·닭이다. 지은이는 민주주의란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문제에 함축되어 있으며, 시민의 결정권을 확대해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말한다. 시민이 법안을 발의할 수 있는 국민발의제, 권력을 남용하거나 태만한 공직자의 책임을 묻는 국민소환제, 시민이 법안을 직접 통과시킬 수 있는 국민투표제, 중앙의 권력을 기초자치단체로 이양하는 자치분권제가 바로 민주주의의 확대이며,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시민과 정부 간 무기의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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