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왜, 어떻게 해체철학 하게 되었나
  • 장정일 (소설가)
  • 호수 625
  • 승인 2019.09.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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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자크 데리다(1930∼2004)는 자신이 쓴 다양한 글 속에 자전적인 파편을 흩뿌려 놓았지만, 글쓰기의 유희 속에 섞여 있는 자전적 파편들은 매우 불분명하고 진위를 알 수 없다. 자신을 기호로 삼아 차연(差延·différance)을 기도한 것은 데리다가 별나서가 아니다. 명성은 자신의 과거를 가공할 수 있게 해주는 권리다. 드높은 명성을 갖고서도 가공 불가능한 것은 그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나치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가 비시 정부를 세웠던 시기, 열두 살 난 우등생이었던 데리다는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때의 상처는 그의 일생을 군집화하고 일체화한 공동체와 단체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의문시되어본 적이 없는 기원과 오래전에 형성된 온갖 이항적 대립을 끊임없이 해체하도록 만들었다. 데리다는 자신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해줄 이 개념(해체)을 프랑스어에서 찾을 때, 파괴나 몰락 같은 부정적인 함의가 없는 ‘déconstruction’이라는 단어를 고심해서 골랐다지만, 그의 해체 철학에는 반계몽적이고 반인간주의라는 파괴적인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알제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건너간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입학에 필요한 또 한 번의 예비 학교를 마친 다음, 그토록 열망했던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한다. 그가 이 학교에 입학했던 1952년 무렵, 파리는 프랑스 지식인들을 양분한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으로 들끓었다. 데리다는 동향이자 유대계 모친을 둔 카뮈나 그가 선망했던 사르트르 가운데 어느 편에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두 논쟁가가 시범을 보였던 논쟁을 그가 평생 동안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서로 열광했다가 앙숙이 되어 꼴사납게 싸우고 난 다음 영원히 적이 되거나, 가까스로 화해를 했더라도 그때부터는 서로 데면데면해졌다.

“철학자는 완전히 광적 욕망을 가진 자”

당시의 고등사범학교에는 아직 무명이었던 루이 알튀세르가 철학 전공 학생들의 책임 교수로 있었다.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와 라캉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준 그는 제자의 천재성을 일찍 알아보고 학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지원해주고 보호해주었다. 데리다는 그 보답으로 1967년에 태어난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을 ‘장-루이 에마뉘엘’이라고 짓게 된다. 이 이름에는 데리다가 평생 존경했던 위인의 이름이 다 들어 있다. ‘장’은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장 주네, ‘루이’는 루이 알튀세르, ‘에마뉘엘’은 그에게 타자의 의미를 가르쳐준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이들과 함께, 프랑스 안에서 데리다와 아무런 반목 없이 우정을 이어간 이들로는 모리스 블랑쇼와 장뤼크 낭시 정도가 전부다.

일반인에게는 철학자들의 논전이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소한 것이 철학자들에게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요리사나 미용사들이 서로의 비법을 헐뜯듯이(이거야말로 생사가 걸린 싸움이다), 철학자들의 싸움도 그와 같다. 여기에 요리사나 미용사들에게 없는 이유 두 가지를 보태야 한다. 알튀세르는 훗날 정신착란 상태에서 그의 아내를 교살하게 되는데,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동료가 된 스승의 정신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반면, 알튀세르는 자신의 옛 제자의 정신적 취약성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만이 아니라 철학자들 대부분이 심한 우울증과 자기도취를 동반한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것이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데리다가 직접 말해줄 것이다.

“철학자는 완전히 광적인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가장 위대한 정치인들의 권력욕조차 철학자의 욕망에 비하면 아주 하찮고 어린애 같은 욕망입니다. 철학자는 철학 작업에서, 규모와 크기로 볼 때 다른 누구에게서보다 무한히 더 강한 지배 계획과 동시에 지배의 포기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담론들과, 때로는 모든 예술 법칙들과도 비교가 안 됩니다.”

현재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MTV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슬라보이 지제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그라마톨로지>와 <글쓰기와 차이> 같은 그의 대표작이 미국어로 속속 번역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데리다는 “세상에서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된 철학자”로 악명을 떨쳤으며, 세계의 주요 도시와 대학을 누볐던 그의 강의와 세미나는 “진짜 록 스타의 순회공연”과도 같았다.

본국에서 경원받으며, 변변한 교수 자리 하나 꿰차지 못한 데리다와 그의 해체철학이 세계화되는 데는 미국 동부의 명문 예일 대학 영문학과의 공이 컸다. 그러나 데리다가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배치’를 거쳐야 했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은 마르크시즘, 헤겔·니체,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 소쉬르의 언어학, 라캉의 정신분석학 등 폭넓은 유럽 문화·철학의 기반 위에 구축된 것이다. 미국 문화에는 그런 철학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데리다와 해체철학은 철학 영역에서 문학 연구 영역으로 축소·변형했다. 이때 수입처였던 예일 대학 영문학과가 한때 신비평(New Criticism)의 요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텍스트에서 진리(의미)를 찾는 과학적 방법인 신비평과, 그렇게 찾아진 의미(진리)를 늘 의심하고 전복하려 드는 데리다의 해체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네 요소인 세계·독자·작가·작품(텍스트) 가운데서 텍스트만 떼어내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를 하는 신비평의 방법론은 독서의 기술로 전용할 수 있는 해체의 방법론과 얼마든지 호환이 가능하다.

데리다는 스물여섯 살 무렵, 훗날 아동정신분석가가 된 마르그리트 오쿠튀리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이후 고등사범학교에서 자신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한 뒤에 제자가 되었던 열다섯 살 연하의 실비안 아가생스키와 혼외 아들을 낳았다. 이들의 관계는 실비안이 서른여덟 살 때까지 이어졌고, 그녀가 제16대 프랑스 총리가 된 리오넬 조스팽과 결혼하는 1994년에야 완전히 끝났다. 브누아 페터스의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그린비, 2019)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화보란에는 “1966년 7월 파리에서의 실비안(왼쪽)과 언니 소피 아가생스키(오른쪽)”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본문 921쪽에서는 “실비안의 동생 소피 아가생스키”라는 대목이 나온다. 데리다는 소피의 동생과 언니 가운데 누구를 만났는가? 이것은 편집부의 실수가 아니다. 데리다라는 유령이 우리에게 산종(散種·dissémination)의 기회를 선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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