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7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8년 출생아 수는 전년 (35만7800명)보다 8.6% 감소한 32만6900명이다. 이에 따라 작년 합계출산율(0.98명)은 역대 최저였던 전년(1.05명)보다 더 낮아졌다. 이 수치는 1970년부터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최저치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2016년 평균 1.68명) 중 합계출산율이 1 미만으로 떨어진 곳은 한국 이외에 아직 없지만, 저출산 적신호는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 백인의 경우 대체 수준의 자녀(2.1명)를 생산한 것은 1971년까지였고, 미국 총출산율 역시 여성 1인당 2.0125명에 불과하다. 이것은 인구를 대체하는 데 필요한 수준에 미달한다.

이 주제를 논하겠다면 필립 롱맨의 〈텅 빈 요람〉(민음인, 2009)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저출산을 한 국가나 민족의 지속성과 이익을 위협하는 재앙으로 여기는 논자들은 그 원인으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찾아낸 여성해방운동을 지목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영향력은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결혼율과 임신율 자체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결혼이란 남녀 모두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해줄 상대를 찾는 게임인데 “여성들은 ‘낮춰서 결혼’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저하된 출산율이 요지부동으로 오르지 않는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다.


부모의 역할을 기피하거나 유예하려는 근본적인 동기는 높은 수준의 소비생활과 상승하는 주택비다. 이 때문에 맞벌이 가정이 압도적으로 늘게 된다. 맞벌이 부부의 역설은 “수입이 늘어남에 따라 가족이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경제적 여유”는 더 커지지만, “수입이 늘어날수록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도 따라서 커지는 것이다. 출산과 양육을 위해서는 배우자 어느 한쪽이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런 결정은 그들을 계층 사다리에서 실족시킨다. 또 부모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도 일종의 투자 심리가 작용하는데, “끊임없이 증가하는 고등교육의 중요성은 또 다른 방식으로 출산율을 떨어뜨리고 있다.” 즉 아이가 “중산층에 진입하거나 그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수 조건”이 된 교육비가 “부모 자신이 원하는 투자액”을 훨씬 상회할 때, 부부는 아이 낳기를 포기한다.

인간의 존재는 목적인가, 수단인가

그러나 출산율 저하의 원인보다 더 궁금한 것은, 필립 롱맨이 출산율 저하를 ‘지구적 재앙’이라고 걱정하는 이유다. 먼저 전 세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보장제도는 새로운 납세자가 그 이전 세대보다 많아지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었기에 인구가 줄어들면 복지 혜택을 대폭 축소할 수밖에 없다. 명심할 것은 “인구 성장이 바로 경제 성장의 주요한 동력”이라는 것이다. 더 많은 인구는 생산물에 대한 더 많은 수요를 창출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보장하기에, 출산율 저하는 수요와 취업이 선순환하는 고리를 끊는다. 그리고 인구가 급속히 고령화하거나 위축되면 위기 시에 군사적 방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칸트는 용납할까? 아니, 태아는 이런 논리를 반길까?

저출산을 재앙이라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출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이 신생아에게 자신의 재앙을 떠맡기는 일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태아라면 더 많아진 노인을 먹여 살릴 납세자, 풍부한 수의 새로운 군인, 특정 정당의 이익을 편들 유권자가 되기 위해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했지만, 저출산 문제를 고심하는 이들에게 인간은 수단이다.

인류는 언제나 출생을 예찬하고 당연시해왔다. 그러나 반출산주의 (反出産主義·Antinatalism) 철학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베너타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서광사,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고통을 겪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면서도, 아이들의 모든 고통을 예방하는 하나의 그리고 유일하게 보장된 방법은 아이들을 애초에 존재하게끔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채는 이들이 그토록 적다는 점은 매우 별난 일이다.”

지금도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생식을 위해서만 성교를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그래서 피임구도 금지한다). 하지만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은 애초부터 불행이나 박탈을 겪을 수 없는 반면, “사람은 존재하게 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다면 입지 않았을 심각한 해악을 입는다”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섹스가 도덕적으로 수용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생식적이어서는 안 된다. 섹스는 그것이 생식적이지 않는 경우에만 도덕적으로 수용 가능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인간은 부모의 쾌락(섹스)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태어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는 방금 나온 인용문보다 더 불쾌한 것이 수두룩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재미있어 하거나 오히려 지은이를 놀리려고 할 뿐 아무도 지은이의 주장을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출산주의와 인간의 존재론이 동일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곧 출산하는 존재이므로 (생육하고 번성하라!), 반출산주의는 한 번도 금지되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괴짜들의 어리광으로 대범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분야에는 불경과 성경의 말씀을 비롯해 소포클레스· 하이네·쇼펜하우어 등등의 어록이 있지만, 우리 속담으로 간단히 줄인다. ‘무자식이 상팔자다!’

페미니스트 학자 13명이 쓴 〈재생산에 관하여〉(마티, 2019)에 발제문을 쓴 머브 엠리는 여자라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인류의 통념은 “존재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예컨대 출산은 모든 인간에게 고귀한 것이 아니라 이성애·인종주의·계급·가족이라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더 잘 반영하며 불임과 관련한 보조 생식기술(assisted reproduction)은 주류 이데올로기에 더욱 친화적이다. 보조 생식기술만큼 이데올로기로서의 생명정치 (biopolitics)의 실상을 더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한편 여성 작가 16명이 한 편씩 글을 보탠 〈나는 아이 없이 살기로 했다〉(현암사, 2016) 역시 반출산주의를 실천한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과 함께, 출산이 존재론과 무관한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거듭 웅변한다. 재즈 음악가인 남편과 작가인 아내는 각기 가장 중요한 연주와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지만, 여성만이 정작 ‘중요한 것’을 빠트린 것으로 비난받는다. 또 미셸 오바마가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할 때, 버락 오바마는 ‘무엇보다 먼저’라는 수식어 없이 그저 “저는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한다. 출산을 지배하는 것은 본성보다 이데올로기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